북한산 둘레길(소나무숲-순례-흰구름-솔샘-명상길)

2011. 1. 22. 22:24둘레길

 

우이령길입구 우이분소에서 시작되는 북한산 둘레길을 연결하고자

중무장을 하고 추운날씨에도 집을 나섰다.

발빠른 친구들은 하루나 이틀이면 끝낼 13구간을

벌써 나는 나흘째로 접어어 거의 반을 넘었으니 오늘 한번 힘좀 내어보자.

새해들어 연일 이어지는 강추위로 온나라가 꽁꽁 얼어붙어 추운데

구제역에 조류독감까지 창궐하여 몸도 마음도 춥다.

주인이 주는 밥잘먹고 무럭무럭 크기만 하면 되는줄 알았던

소나 돼지들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다.

자기가 죽어줘냐 친구들이 살수있다니 살신성인의 자세로

죽는 주사도 달게 맞는다.

10초면 쓰러진다는 주사를 맞고도 지새끼 젖을 다 빨때까지 3분을 기다렸다 죽었다는

소이야기가 가슴 찡하다.

그게 애미다.

주말 알바를 가는 아들을 내보내고 아침을 먹고 진하게 커피를 탔다.

장거리 산행도 아닌데 혹시 모를 추위에 대비해서 이것저것 집어넣은 베낭을 남편이 메고

언제나 그랬던거 처럼 나는 카메라 하나만 목에걸고 갔다.

 

수유역 3번출구로 올라와 120번 종점까지  간다.

유일하게 둘레길중 우이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지척에서 들을수있다는 구간의 상단은

우이령길 입구와 반대방향으로우리는 걷기 시작하였다.

의암 손병희 선생의 묘역을 시작으로 애국열사들의 묘소가 줄지어 나올것을 예감한다.

민족대표 33인의 영도자로 3,1운동 계획수립및 독립선언식 거행으로

서대문형무소 복역중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던 의암은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여

천도교 제3세대 교조로 종교 체제를 근대화시킨 천도교 지도자이다.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도 소나무 향내가 그윽한 솔밭근린공원에는

갈곳없는 노인내들의 휴식터이자 운동장이었다.

두툼한 잠바를 입고 햇볕드는 의자에 앉아 장기나 바둑을 두기도 한다.

허기야 이런공원이라도 나와 바람도 쐬고 걷기라도 해야지

집에만 있으면 젊은사람도 우울증이 오기 쉬운데

노인들의 건강을 위해서는 공원만 한곳도 없는것 같다.

 

 

 

 

 

 

 

 

꽃마다 열매가 되려고 합니다.

아침은 저녁이 되려고 합니다.

변화하고 없어지는것 외에는

영원한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여름까지도

가을이 되어 조락을 느끼려고 합니다.

나뭇잎이여,바람이 그대를 유혹하거든

가만히 끈기있게 매달려 있으십시오.

그대의 유희를 계속하고 거역하지 마십시오.

조용히 내버려 두십시오.

바라밍 그대를 떨어뜨려서

집으로 불어가게 하십시오.

-헤르만 헷세-

시구가 솔밭근린공원 산책로에서 가고 오는자의 눈길을 멈춘다.

자켓을 벗어 베낭에 넣고 부지런을 떨어 걷기 직전에 기념 사진한장 찍었다.

접으면 한주먹도 안되는 베낭같지도 않은 베낭이 가볍고 제법 그럴싸해 맘에 들었다.

어께와 허리를 받쳐주는 역활만 있다면 금상첨화인걸,

 

 

 

 

 

 

 

 

 

골목길을 들어서면 개인집을 박물관으로 꾸민듯한 자수박물관이 나온다.

박을복 자수박물관 이란다.

주말과 공휴일을 제외하고는 11시에서 16시까지 전시하고

관람요금은 성인은 6000원이고 학생은 4000원이다.

 

별로 걸은것 같지 않은데 벌써 손병희 선생묘소에서 1,8km를 지난걸보니

오늘 벌걸음이 빠른것같다.

부지런히 수유동쪽으로 향하는 곳곳에는

다보지 못한 우리의 애국지사들과 유림의 묘소가 있다.

 

 

 

 

 

 

 

 

 

 

 

손병희선생,이용문장군,김창숙선생,양일동선생,서상일선생

김도연선생,신숙선생,신익희,신하균선생,김병로선생

유림선생,이명룡선생,조병욱박사 그리고 광복군 합동묘소

2,3km의 순례길에는 군데군데 봉긋한 봉분들로 공동묘지나 다름없다.

특히 히이그 밀사인 이준열사와 초대부통령이신 이시영선생을 묘소도 있고

또한 조국을 위해 꽃다운 청춘을 바친 17위의 광복군합동 묘소까지

모두 12기의 독립유공자 묘역이조성된구간이다.

 

순국선열들의 묘소입구에는 선조들의 독립운동은 어떻게 하였는지를

간단하게나마 알리는 문구가 있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긴 이래

국내와 전세계를 무대로 다양한 독립운동을 일으킨

우리는 1910년 그이전에는 의병전쟁을 이후에는 중국동북지방(만주)에서

중국 관내(만리장성 남쪽지역)에서는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이 무장투쟁을 이어 나갔다.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과 학교 설립 신문,잡지간행등의 교육,문화운동및

농민 노동자,여성이 참여한 대중운동으로 일제에게 강탈당한 윌의 국권을 되찾고자 노력했다.

안중근,이봉창,윤봉길의사와 같은 수많은 독립투사들의값진 희생은

온민족의 소망이던 광복을 향한 밑거름이 되었다.

 

좀더 자세하게 공부해보면

1920년 8월29일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자 독립운동가들은

중국,러시아,미국등 국외로활동무대를 옮겨 독립운동의 거점기지를 만들어

한글신문과잡지를 펴내고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기도 하였으며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키워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또한 도쿄(동경)에서는 한인유학생들이 독립을 선언하고 상하이의 신한청년단이

파리 강화회의(1919)에 대표를 파견하는등 끊임없이 국제사회에 일제침략의

부당성을 알렸다.

이와같은 광복의 열망은 3,1운동으로 이어져 각지에서 비폭력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독립운동가들은 서울,상하이,연해주에 독립운동을위한 임시정부를수립하였다.

각지의 임시정부는 1919년 9월 상하이 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3,1운동은 자주독립의 소중함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많은 학생운동과 신문잡지를 발간함으로 민족의 독립을 반드시 이루고자 노력하였다.

근대교육을 받은 학생을 중심으로 6,10만세 운동(1929)이 일어났으며

국내의 독립운동세력은 신간회를 만들어 독립의지를 하나로 모았다.

또한 중국의 상하이 난징,베이징등 중국인과 연합하여

항일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많은 활약을 하였다.

 

한편 일제는 만주사변(1931)을 일으켜 중국을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민족의 말살정책과 함께 대륙병참 기지화를 추진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종교단체,농민,노동조합등을 중심으로 항일비밀결사활동을 펼쳤다.

이봉창,윤봉길의사의 의거(1932)를 계기로 상하이를 떠난임시정부는

항저우-전장-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을 거쳐 중국의 전시수도인 충칭으로 옮겼다.

임시정부를 이끌던 한국독립당과 조선민족혁명당은

근대민족국가 수립을 대비한 독립운동을 하였다.

 

순례길을 걷다가 연도별로 쓰여진 문구를 자세히 읽어보는 사람이

과연 몇명이나 있을까마는 먼저간 선조들의 독립정신은 본받을 만하다.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재충전을 하라!

근심이 많고 외롭고 불상한 사람들을 치료할수있는 최고의 비법은

혼자서 조용히 하늘과 자연과 신을 느낄수 있는곳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곳에서만 모든것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음을 느끼고,

신은 인간이 자연속에서 행복을 느끼기를 바라는걸 알수있기 때문이다.

-안네 프랑크(Anne Frank)-

북한산 국립공원 둘레길에 가면 세계유명인의 명언을 감상할수 있다.

 

순례길 도중에는 국립4,19민주묘지 전망대가 있다.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하신 혼령들의 마당에는

어제 내린 흰눈으로 덮여있다.

배가 고파 추운줄도 모르고 김밥을 정신없이 먹다보니

떨꾹질이 나오고 그제서야 벗어둔 외투를 걸치고 뜨거운 물을 마셔도

달달 떨리는 추위가 엄습해와 더이상 앉아 쉴수가 없다.

걷는수밖에 걸으면 안춥다.

 

 

 

 

 

 

 

 

 

 

나룻배를 띄울수없는 낮은 강에 통나무와 솔가지 흙을 이용해 만든

임시다리인 섶다리가 있다는데 춥다고 정신없이 걷는일에만 집중하다보니

섶다리를 건너고도 보지 못한꼴이 되었다.

 

나는 당신의 마음을 지니고 다닙니다.

나는 당신의 마음을 지니고 다닙니다(내 마음속에 지니고 다닙니다)

한번도 아니 할때가 없습니다.

(내가 가는 곳은 어디든,그대여, 당신도 갑니다.

내 홀로 무엇을 하든 그건 당신이 하는 일입니다.님이여)

나는 운명이

두렵지 않습니다(님이여,당신이 내운명이기에)

나는 세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진정이여,아름다운 당신이 내세계이기에)

달이 늘 의미해 왔던 것이 바로 당신이요

해가 늘 부르게 될 노래가 바로 당신입니다.

여기에 아무도 모르는 가장 깊은 비밀이 있고

(여기에 생명이라는 나무의 뿌리의 뿌리와 싹의싹과 하늘의 하늘이 있고

그것은 영혼이 희망하고 마음이 숨을수 있는것보다 더 크게 자랍니다.0

그리고 이것이 별들을 서로 떨어져 있게 하는 경이입니다.

 

나는 당신의 마음을 지니고 다닙니다.(내마음속에 지니고 다닙니다.)

-미국 e. e.커밍즈-

 

 

 

 

 

 

 

 

 

 

 

 

 

 

 

 

이준열사 묘역입구를 지나 둘레길 탐방센터안으로 들어가 화장실을 찾으니

따뜻한 실내 화장실을 직원들 화장실이고 탐방객들은 실외에 설치된 간이 화장실을 이용하라한다.

숨만 쉬어도 입에서 입김이 풀풀나오는데 궁둥이를 바깥에서 까고 오줌누기도 맘맘치가 않다.

화장지도 없는 간이 화장실은 둘레길을 찾는 탐방객을 쫓아내는길이다.

남편의 등에 맨 없는것이 없는 베낭에서 화장지가 나오고

아랫도리까지 얼어버릴까봐 후다닥 바지를 추스리고 다시 갈길을 갔다.

굴뚝인지 유난히 뾰족한 건물을 힐끔거리며 바라봤다.

고요한 산속에 다소 생소한 건물은 통일교육원이다.

지금은 여권과 비자만 있으면 누구나 해외에 나가지만

예전에는 해외에 나갈려면 이곳에서 교육을 이수해야 했던 시절이 있었단다.

 

땅길 끝나는 곳에서 다시 구름길이 시작된다는 흰구름길에 오니

다소 오르막 계단이 나온다.

둘레길중 난이도는 중으로 약간 숨이 찰정도로 올랐다 내렸다를

반복하여 도착한곳이 보기에도 제법 큰절인 화계사이다.

오늘 여기까지만 걷을것이지 아님 더 걸을것이지를 화계사가서 보자고 내 가이드는 말한다.

우선 쉴만한 앉을자리를 찾아 식당으로 들어가니

절에도 대학과 대학원이 있는가,오늘 사은회를 한다고 부산스럽다.

식혜한잔을 얻어마시고 잠시 쉬었다 생각하니

또다시 이길을 걷고자 오기가 쉽지 않고 좀 무리하더라도

지난번에 끊긴 평창길까지 도전해보고 싶어 그냥가기로 하였다.

 

 

 

 

 

 

 

 

 

 

 

12m의구름 전망대가 독특하게 원형계단으로 설치되어있었다.

북한산,도봉산,수락산,불암산,용마산,아차산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에서 빌빌한 아내 체력을 보강시키는 일에

열중한 남편과 다정한 포즈를 취해본다.

겨울 파란하늘은 햇빛에 눈부셨고

바위골짜기에는 밀가루 뿌려진듯 희긋하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쟈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쟈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도 하여라.

-김상헌(1570-1652)-

청음 김상헌은 병자호란당시 주전파(척화파)로서 전란후에

소현세자 봉립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게 되는 처지가 되었다.

청나라 심양으로 잡혀갈때의 비분강개한 심정을 전하는 시조가

북한산이 잘보이는 구름전망대에서 볼수있다.

 

조선의 궁녀들과 인근 주민들의 빨래터겸 쉼터로 이용되고

한양 과거길에 나서는 선비들이 우이령을 넘어 이곳에서 손발을 씻고

한양으로 들어왔다는 빨래골은 공원으로 이쁘게 조성되었으나 꽁꽁 얼어붙었다.

 

 

 

갈길이 바빠 발걸음을 재촉하여 북한산 생태숲이라는

소나무가 많은 구간 2,1km를 한시간 넘게 걷고 나니 아직 오후 4시전이다.

피곤이 몰려오고 아직 걸을길을 남아있어 솔샘길은 사진한장 없다.

정릉탐방안내소에 도착하니 북한산국립공원을 알리는 비석이 요란하다.

여기부터는 내쳬력을 무시한 욕심이 앞서는 둘레길 걷기가 되었다.

다 떨어진 간식으로 빵과 음료하나를 사들고 오르는길은

걷기가 아닌 등산길 산행이었다.

도로 물릴수도 없이 지나쳐버린 욕심은 화를 낳아

둘째 발가락이 자꾸 쥐가 났다.

 

 

 

 

내부에서 나오는 빛!

사람들은 스테인드 글라스와 같다.

그들은 햇빛이 밖에서 비치면 반짝일 뿐만 아니라 광채가 난다.

그러나 내부에서 빛이 나오는 경우 어둠이 스며들때

진정한 아름다움은 감추어진다.

-스위스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Elisabeth Kubler-Ross)-

 

한편의 명언을 감상할수있는 시간이

오늘 처럼 무리한 걷기만 아니면

둘레길을 걷는 시간이 될것이다.

 

 

 

 

 

 

 

 

 

 

밑으로는 북악터널이 뚫려있고 위로는 형제봉 능선으로 이어지는

북악산 갈림길 산봉우리를 넘어서 드디어 내리막으로 치닫는다.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다는 구복암이 지나니 평창동이 코앞이다.

많이 지치고 발가락이 좀 말썽을 부렸지만

무사하게 다섯구간을 다섯시간동안 걸은것이 대견하다고

떨어지는 석양이 바라본다.

 

 

그날후로 일주일째 몸살감기는 대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