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5. 10. 23:09ㆍ일반산행
일 시 -2011년 5월 10일 화요일
코 스 - 남문-영춘정-수어장대-서문-연주봉옹성-북장대터-북문
참가자 -김의성,김인자,김용석,남 우,박동웅,신정희,신향님,이경옥,이명구,이병돈,
이성덕,이성용,이윤정,이춘구,임석래,장용자,조용철,진성섭,정복례,황정진.(가나다순)
뒷풀이 참석자-박덕희,정대형.
누가 오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했나,
오락가락 하던 봄비는 우리의 약속시간을 맞추어 거세진다.
한달전에 공지를 띄워놓고 약속을 없앨수도 미룰수도 없는 진퇴양난은
지까지것, 봄비가 오면 얼마나 오겠거니,
이봄이 아니면 볼수 없는 산성의 여린 이파리 들처럼
중년이 넘어도 초등 감성을 갖기에 더 좋은 봄이라
비가 와도 머시매와 가시내의 모임은 이루어졌다.
약속시간 15분전에 도착해보니 미리 와 기다리는 동창들이 눈에 띄고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한다.
전주에서 차량으로 이동한 5인조는 이미 산성에 도착한 상태이고
오기로 되어있던 인성이는 감기로 못오고 덕희는 집안일로 나중에 온다 하고
늦은 경옥은 뒤따라 오기로 하고
산성역에서 드라이브 코스인 고도 400m인 지그재그 오르는길을
진정한 산꾼들은 도로옆으로 뚫린 등산길을 이용하나
우리처럼 등산은 쬐끔하고 앉아 먹고 마시고 수다나 떠는 모임은
벌써부터 걷다간 정문도 통과 하기전에 퍼질러 질게 뻔하므로
회장 차량과 9-1버스로 산성터널을 지나 남문 주차장에서 하차에
남문(至和門)에 모이는데만 한시간의 시간이 훌러덩 지나가 버렸다.
어가행렬은 강화도를 단념하고 1636년 병자년
그해 겨울 눈보라를 뚫고 남한산성에 들어섰다.
강을 건너온 청병들이 삼전도에 본진을 세우고
서문과 북문을 압박했으나 아직 남문으로 다가오지 않았을때도
수어청 군사들은 남문을 지키면서 성밖으로 빠져나가는
백성들을 붙잡고 곡식과 가축을 빼앗았던 그 남문이다.
남문 정자에 올라서니 온통 윤무로 뒤덮힌 산야와 질떡거리는 비는
이대로 산행이 불가하니 식당에서 밥이나 먹고 놀자는 팀과
여기까지 와서 성곽길도 못밟고 가면 아니된다는 의견이 분분하다.
척화파와 주화파로 나뉘어 시간만 축내고 싸움다운 싸움한번 제대로 못해본
47일간의 항전이 떠오른다.
하늘이 하는일을 사람이 어찌 할수없다는 핑계로 위로를 삼으며
오늘 일정을 단축하기로 했다.
비오는날 산길을 우산을 받고 걸어본 사람 이라면 더 좋아라 할테고
우산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와 흙으로 스며드는 빗물소리를
가슴으로 느낄수 있다고 좋아라 할텐데
비에 젖는 옷과 끈적 거리는걸 못참는 성격은
지날같은 봄날 산행이 될것이다.
업허지면 코가 닿을곳에 살고 있는 경옥을 믿었건만,
정작 남문을 못찾고 헤매이다 무사히 만나니 반가움이 극에 달한다.
빗속의 남한산성이라,
우중의 산성길 행로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오르막 산성길 20여분만에 오른쪽에 위치한 영춘정(迎春亭)에 도착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올라왔는지 홍길동같은 의성이와 명구가 짠~하고 나타나
또 한번 반가움에 빗속의 모임은 어디서 오던지 오느라 수고한 그대들을
영춘정 소나무 향내가 빗물에 씻기며 일행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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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춘정은 팔각정 일명 정자로 원래는 남문 아래에 위치한것을
남문과 수어장대 중간으로 옮겨와 서울 일대와 경기도의 경치를 감상하며 쉬는 곳이다.
봄 맞이 영춘정은 성곽아래 운무만 가득하고
오려거든 차라리 주룩주룩 모든걸 포기하게 만들던지
오락가락 하는 비는 갈길이 창창한 일행에게
약을 올리는것 맨치로 오다 말다해 우산을 접었다 폈다하게 만든다.
수어장대로 향하는 발걸음은 숨을 약간 헐떡거려도 가벼웠다.
마누라 초등얘들이 고향후배같이 귀여워 가이드로 나선 남편은
수어장대 길목에 서서 수어장대로 오르라고 손짓을 했다더니만,
소리를 질러댔으면 행여 올라 왔을까 키작은 남자의 손가락을 못본
일행의 반은 수어장대 에서는 보지 못했다.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아직 이름과 얼굴 줄긋기도 안되었는데 내동무들은 보이지 않고
오지 말라는 비는 찔끔거리고 눈앞은 흐려만 진다.
인조2년(1624)년 남한산성 축성때는 단층누각으로 서장대라 했던것을
영조때 이층누각으로 쌓아 '수어장대'라는 편액을 썼다.
청량산(482,6m)의 높은 곳에 위치한 수어장대(守御將臺)까지 와서
영장이 진을 치고 휘하장졸들을 지휘하던 수어장대의 늙어서도 위풍당당한 누각과
이회장군의 영혼이 깃든 청량당과 매바위를 못본채 친구는 사라졌다.
남한산성의 성쌓기를 북쪽은 벽암스님과 남동쪽은 이회장군이 맡았는데
북쪽의 성에 비해 남동쪽의 성이 늦어지자 이회장군을 서장대로 불러들여 참형을 했다
이회장군은 "내가 죽은 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죄가 있는것 이다."라고 참수당하자
그의 목에서 매한마리가 나타나 시체 주위를 돌다가
뜰앞에 있는 바위에 앉았다 날아가고 앉았던 그바위에 매발톱 자국을 남겨
이회장군의 죽음의 억울함이 서린 전설의 매바위도 안보고
내려가 버린 동무들의 안타까움에 애꿎은 빗물만 탓했다.
그리고는 앞으로 오를길 없는 산성벽을 따라 오르락 내리락거리며
서문(右翼門)에 도착했다.
서문에서는 성문을 통과해 성밖으로 나가야 되는데
먼저 간 일행은 없고 뒤를 돌아봐도 10명의 일행은 안온다.
용철,석래,성덕,용자,향님,복례,경옥,정희,인자,성용이
확실한가 헷갈리지만 안보이는것 같았다.
성곽길 말고 다른길로 북문에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고
우리 일행만 강행한 산성길과
성문밖으로 한겹 더 쌓아 성벽을 보호 하는성을 옹성이라하는데
복원중인 연주 봉옹성(蓮珠峰瓮城) 밖에 구름길은 우리만 즐겼다.
서문을 지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아름다운 성벽에도
봄기운이 완연해 생명은 살아 있었다.
낮인듯 밤인듯 어두컴컴한 하늘과 뿌연 안개속은
꿈길이 아니고 지금 걷고 있는길이다.
서문에서 빠져나와 성밖길을 돌다
마침내 북문안으로 들어가면 다시 산성안이다.
성안에 갖힌 왕과 백성이나 성을 에워싸고 있는 청군이나 답답하기는 매한가지
병자년 겨울내내 백성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새순돋는 연두색 이파리를 안보면 일년을 앓는다는 정진이와
가을 단풍을 안보면 겨울내내 우울병을 이기지 못하는 두여자가
빗물 가득담은 애기붓꽃앞에 얼굴 들이 밀고 감탄하고
북문을 열고 어쩌다 한번 시도한 적들을 향해
창이나 활로도 막지 못한 북문앞에 섰다
여기까지 안내한 가이드는 아쉬운 발길을 돌리고 성밖으로 나갔다.
처자식을 배수구를 통해 성밖으로 내보내고
성안에 다시 들어와 대장간을 운영한 서날쇠(소설속 이름이고, 실제는 서흔남)상놈이나
사공의 도움으로 송파강을 건너 당당히 서문을 통과에
성안으로 들어온 예조판서 김상헌 양반이나
성벽을 사이에두고 안과 밖으로 가족은 헤어졌다.
조용하던 성안의 백성들은 느닷없는 임금의 행차에 얼마나 놀랐으며
적군들의 포위에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고 갖혀있었으니
죽으나 사나,예 지금이나 위정자들의 정신이 곧아야 백성들은 안심이다.
이조판서 최명길과 예조판서 김상헌사이에서 갈피를 못잡는 영의정 김류나
더 한심한것은 인조 임금 이었으니
세금깍아 재산 불려준다는 말에 혹해 한표 던진 백성도 무식하기는 똑같다.
여기서 잠깐,우리가 남한산성에 와서 먹고 마시는것도 중요하지만
역사를 알아가는것도 필요할것 같아 공부를 해보면,
남한산성은 사적 제57호와 도립공원으로 지정 되어 있다.
서울을 지키는 외곽에 4대 요새가 있는데
북쪽의 개성,남쪽의 수원,서쪽의 강화, 동쪽의 광주로 남한산성은 광주에 있다.
서울에서 동남쪽 24km 성남시에서 북동쪽으로 6km 떨어진곳에 있는 남한산에 위치한다.
원래 2천여년전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 백제 시조인 온조왕때 쌓은 토성이었다.
신라 문무왕때 다시 쌓아 '주장성'을 만들고
그옛터를 활용해 후대에는 여러번 고쳐 쌓아 조선조 광해군(1621)때 본격적으로 축성
석축으로 쌓은 남한산성 둘레는 약 11.7km
자연석을 써 큰돌을 아래로 작은돌을 위로 쌓았고
동서남북에 각각 4개 문과 문루 8개의 암문을 내었으며 동서남북 4곳에 장대가 있었다.
성안에는 수어청을 두고 관아와 창고, 행궁을 건립했다.
유사시에 거처할 행궁으로 73칸 하궐 154칸으로 모두 227칸을 이때 지었다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샘을 만들고 광주읍의 행정처도 산성안으로 옮겼다.
산성이 축조 되고 인조17년(1639)기동훈련에 참가한 인원만도 12700 여명이었다.
그러나 지금 성곽에 남아있는 건물은 얼마 안된다.
동남문과 수어장대, 현절사,문무관, 장경사, 지수당, 영월정,
침괘정, 이서 장군사당, 승렬전, 보루, 돈대등이 남아있다.
비와 운무를 뚫고 우리가 구경한 건물은
남문과 영춘정, 수어장대,서문,북문이 전부이나
징글징글 춥던 겨울을 몰아내고
봄꽃들이 피어나는 자연의 경이로움을 보고
아직은 쓸만한 다리심으로 우중에도
남한산성 구경길에 나선 동무들을 보았으니
더이상을 바란다면 미친년으로 여겨질것이다.
먹을것이 좋기는 참 좋은것이 제각각 흩어져서 누가 누군지도 모르는 동창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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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갖혀 고민했던
지난 역사의 수모를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꼭 둘러봐야 할곳이 바로 아곳이다.
한일합방 이전에 가장 쪽팔리는 역사의 전쟁이
조청전쟁인 1636년 병자호란 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미스 코리아나 미스터 코리아 출신말고
진정한 코리아 출신이라면 역사를 알아야
후대에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을것이다.
청태종이 몰고온 용골대를 대장으로 총12만 8천여명을 상대해
아무리 우리가 산성안의 적은 군사 1만 5천여명뿐 이었다지만
조선의 인구 800-900 만명에 비하면
당시 후금의 인구는 50-60 만정도로 15배나 되는
우리가 조선 전체 병력을 총동원하면 20만명을 되었을 것이니
전략을 잘써서 싸워보면 될것을
인조는 애초부터 싸울 생각은 안하고 도망갈 궁리만 하고
적을 앞에 두고 총사령관인 도원수 김자점 이라는것은 우왕자왕
주화파와 주전파로 나뉘어 입방아만 찧다 조선의 기개는 땅에 떨어졌다.
주전파인 김상헌과 삼학사(홍익한, 운집,오달재)는 싸우자고
대표적인 주화파는 최명길로 화친을 주장했다.
병자년 그해 겨울은 눈이 많이 와서 땅은 얼고
언 땅에 다시 눈이 쌓여 빙판길을 이루었다 한다.
오늘처럼 봄비는 생물을 돋아나게 하는거라면
겨울비는 추운겨울을 얼게 만드는 고통일게다.
밤새 내리는 비로
군병들은 창을 쥐지 못하게 손가락이 얼고 또, 언발을 구르고
임금은 버선발로 내행전 마당에 나와 젖은땅에 무릎을 대고 울었다.
성안에서 성밖으로 나가는 길도 머지않아 왔듯이
겨울지나 봄이되어 남한산성 로타리에도
식당가 마당에도 꽃은 피었다.
보라, 빨강, 노랑색으로 뽐내는 튤립도
빗물을 흠뻑 젖었다.
비를 구슬처럼 달고 있는 생의 환희와
아득한 길을 비추는 봄은 빗물에 갇혀있어도 벌써 왔건만
잠 못이루는것은
문자질로 꼬셔대는 쌩판 모르는 여자였던 거라서도 아니고
다부지게 생겼으나 성깔깨나 있는놈이랑 사는것도 아니면
무엇때문에 오늘밤 내내 뜬눈으로 지내다
새벽녁에야 잠이들어 다음날 아들 딸 아침도 못차려 줬다.
그리하여,나의 남한산성길은 이어진다.
글 :李 貞
사진:이 정,조용철.
참고:백지원의 '왕을 참하라'
김훈의 '남한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