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30. 13:56ㆍ참고
한강 천 삼 백리를 걷는 여정이 8번째로 서울의 한강을 걷습니다. 광나루에서 여의도 지나 행주대교까지 이어질 이번 여정은 대한민국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 한강의 역사문화를 탐사하며 걷는 길입니다.
서울에 살면서도 서울의 역사를 알기는 쉽지 않은데, 한강의 역사는 더더구나 알 길이 없지요. 그런 한강의 역사를 한 발 한 발 걸어가며 되짚어볼 이번 행사에 많은 참여 바랍니다.
‘한국전쟁 때 참전했던 미국의 육군 소장 워커힐의 이름을 따서 지은 워커힐호텔 아래에 한양과 경기도 광주를 잇는 나루터인 광나루가 있었다.
이곳 광나루(광진)에서부터의 한강을 경강京江이라고 불렀다. 광진. 삼전도. 송파진. 신천진. 두무포. 한강도. 서빙고진. 동작진. 흑석진. 노량도. 용산진. 마포진. 서강진. 율도진. 양화도. 공암진. 철곶진. 조강진이 모두 서울로 통하는 길목에 자리 잡은 나루였다.
그렇다면 남한강을 따라 강원도에서 이곳까지는 어마나 걸렷을까? 물길이 많고 적음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충청도 영춘에서 서울까지는 닷새반이 걸렸고, 단양에서는 닷새, 충주에서는 나흘, 여주에서는 이틀, 이포에서는 하루만이면 이곳 서울에 도착했다고 한다.
강 건너가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이 있는 풍납동이다. 백제 때의 옛 성으로 처음에는 배암드리 또는 한자명으로 사성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바람들이성 또는 풍납토성이라 부른다.
풍납토성은 서울시 송파구 풍납동에 자리 잡고 있는 토성으로 제방처럼 보이며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호로 지정되었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아차산성과 마주보는 형세인 이 풍납토성은 한강 남북교통의 요충지로 한강 연변의 평지에 축조된 순수한 토성이다. 남북으로 길게 타원형을 이룬 풍납토성의 길이는 동벽은 1,500m, 남벽은 200m, 북벽은 300m 정도이며, 서벽은 을축년이던 1925년 의 대홍수로 유실되었다. 현재 446m가 복원되어 있는 이 풍납토성은 둘레 3,740m에 이르는 규모가 큰 평지 토성이었으나 현재는 2,679m 정도 남아 있다. 성벽의 표면은 잔디와 잡초로 덮여 있는데, 내부에는 돌이 거의 없고 고운 모래로 쌓아 올렸다. 풍납토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 평고성坪古城이 <증보문헌비고>의 ‘성곽광주조’ 에는 “백제의 방수처防戍處이다.‘라고 실려 있으므로 진성鎭城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지금의 석촌호수 부근에 서던 시장은 송파시장은 본래 조선 초기 이래로 삼전도(三田渡)가 나루터로 개설되어 있었지만 병자호란 이후 쇠퇴하였다. 그 대신 이 송파진이 주된 나루가 되어 수어청(守禦廳)에서 파견된 별장(別將)에 의하여 관리되었다. 송파진은 하중도(河中島)를 끼고 있어 삼전도보다 물이 풍부하여 좋은 포구 조건을 가졌고, 맞은편의 뚝섬이 조건이 좋지 못하였기 때문에 크게 변성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상공업의 발달로 물화(物貨)의 유통량이 대폭 증가한 조선 후기에 송파는 원주·춘천·충주·정성·영월·단양 등 한강상류지역에서 내려오는 각종 물화의 집산지가 되었다. 강운(江運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이곳을 지나 판교. 용인을 거쳐 충청도. 강원도로 가는 길, 또 용인을 거치지 않고 광주. 이천을 거쳐 충주나 여주. 원주를 거쳐 대관령. 강릉으로 가는 길이 열려 있어 사람과 말의 통행이 번잡하였다. 도성이 또한 2십리 밖에 떨어지지 않아 강상江商은 물론 이현梨峴. 칠패七牌.등 각 시장의 상인과 중개상인. 그리고 주민들이 장에 나오기도 하였다.
삼전도 부근에는 부군당이란 당집이 있고 근처의 한강변에 쌀섬여울이 있었다. 그리고 서울 부근 한강에는 여러 개의 섬들이 있었는데 불과 몇 십 년 전 까지만 해도 여러 개의 섬과 드넓은 백사장이 있었던 한강은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공유수면 매립과 한강 종합개발의 여파 속에 그 모습이 크게 바뀌고 말았다. 조선 시대의 지도를 보면 서울의 한강에는 잠실·저자·밤섬. 여의·난지도 등 다섯 개의 큰 섬이 있었다. 이 섬들은 평소에는 육지와 백사장으로 이어져 있다가 큰물이 지면 섬이 되었고, 물이 줄어들면 다시 육지와 연결되었기 때문에 섬사람들의 삶은 홍수와 물난리 때문에 불안하기만 했다. 그래서 영산강이 범람하는 나주 지역에선“광산 큰 애기 오줌만 싸도 넘친다.” 라는 말이 전해져오고 서울 부근의 한강에는 “메기가 하품만 해도 넘치고, 개미가 침만 뱉어도 물에 잠긴다.” 라는 말이 전해져왔다. 잠실 섬사람들은 여름철에 홍수가 나면 큰물을 피해 현재의 광진구 자양동이나, 삼성동의 봉은사로 대피했다고 한다.
한강 개발로 인해 사람들이 떠나 가버렸거나 사라진 한강 가운데의 섬, 그 섬들의 역사와 문화는 무엇이며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
그 섬들이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서 퇴적과 침식에 따라 생겼다 사라지고는 했다.
정조 임금이 화성華城에 있는 사도세자의 현륭원顯隆園을 참배하고자 행차할 때마다 배다리를 가설하였던 곳이 노량진이었다. 조선후기만 해도 이곳을 ‘모래밭 마을’이라는 뜻의 ‘사촌沙村 ’이라 부르고, 모래밭 쪽으로 해가 넘어가는 풍경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노량진에서 건너다보이는 모래언덕이 노들이라는 이름의 섬이 된 것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탈한 뒤였다. 1917년 일제는 한강 북쪽에 있던 이촌동과 남쪽에 있던 노량진을 연결하는 ‘철제 인도교’를 놓았다. 그 때 다리가 지나는 모래언덕에 흙을 돋우어 다리 높이만큼 쌓아올린 뒤, ‘중지도’라고 이름 지었다. 1925년인 을축년에 일어난 대홍수로 유실된 둑을 34년에 복구했을 때 섬의 남북 길이는 165m였고 주변에는 100만평의 ‘한강 백사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불과 40십년 전만 해도 강북에서 한강대교 가운데에 있는 노들섬까지 다리를 이용하지 않고도 건널 수가 있었다. 그것은 이촌동에서 노들섬까지는 강이 아니라 드넓은 모래밭이었기 때문이다. 1930년 무렵 노들섬까지 전차 궤도가 놓이면서 한강인도교 역이 생겼고, 일제시대에는 창경원, 남산공원과 더불어 서울지역의 유원지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5~60년대 국군의 날 에어쇼가 열리면 서울을 비롯한 지방 사람들까지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여름철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노들섬 부근 한강 백사장에서 물놀이를 즐겼다. 하지만 68년에 시작된 한강개발계획으로 인해 노들섬과 한강 백사장은 유원지의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한강 북단 이촌동의 연안을 따라 현재의 강변북로인 한강제방도로를 건설하면서 경원선 철길을 따라 놓인 기존 둑의 바깥쪽에 새 둑을 쌓고, 두 둑 사이를 ‘한강 백사장’에서 퍼온 모래로 메운 것이다.
압구정에는 무지개개울이 있다
이곳 압구정 앞에 있는 개울은 모양이 무지개같이 굽어 있기 때문에 무지개개울이라고 불렀으며 두멍소란 못이 있었는데 그 못이 묻히면 난리가 나고 그 못이 드러나면 평화가 온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곳에서 무수막으로 건너가던 압구정나루가 있었다는데, 한강시민공원으로 변해버린 한강변에 나루터는 찾아볼 길이 없다.
이른 아침이라선지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뛰어다니고 하늘에 해는 보이지 않고 구름만 자욱하다. 『조선환려승람』을 지은 이병연은 겸재 정선의 『속멱조돈』을 보고 시 한 편을 읊었다.
새벽빛 한강에 떠오르니
산모롱이 사이로는 낚싯배가 아련하네
아침마다 나와서 우뚝 앉으면
첫 햇살 남산에서 오르네
'잠원 청소년 전용광장'이라고 붙여진 한강변에는 가을의 전령인 양 억새꽃들이 피어서 바람에 흩날린다. 벌써 가을이구나 싶다. 한남대교 아래 무섭게 질주하던 차들 사이를 전속력을 다해 건너자 멀리 관악산이 보이고 동작대교 너머 63빌딩과 여의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동작대교 아래에 초로의 한 남자가 세상의 모든 것을 잊어버린 듯 아침잠에 빠져 있다. 저 사람의 꿈속에도 세상의 근심 걱정들이 존재할까?
뽕나무가 많았던 잠실
한편 우리가 지나가고 있는 이곳 잠원동 일대는 오래지 않은 옛날에는 넓고 넓은 뽕나무밭이었다.
동東잠실이 성동 아차산 아래에 있다. 내시가 맡아본다. 지금 새로 새잠실을 한강 아래 원단동에 설치하고 역시 내시로 하여금 맡아보게 하고 있다. 서西잠실은 도성에서 서쪽으로 10여 리쯤에 있다. 곧 옛날의 연희궁이다.
이들 잠실마다 별좌別坐 2인으로 전담하게 하다가 별좌를 상의원尙衣院에 예속시키고 여름철에 현지로 가서 누에를 치고 그 일을 마치면 상의원으로 돌아와서 근무하게 하였다. 동서 잠실로 하여금 제각기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아 승정원에 납품하게 하고 이것을 검사하여 잘 되고 못 된 정도에 따라 상도 주고 벌하기도 한다.
남강에 있는 밤섬에서도 여러 가지 종류의 뽕나무를 심고 해마다 뽕잎을 따서 누에를 친다. 지난날에는 도성 안 지체 높은 집이라도 겨우 서너 집 정도가 누에를 치더니, 이제는 지체 높은 집뿐만 아니라 가난한 집 부녀자까지도 누에를 치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 그러므로 자연히 뽕잎 값이 폭등하여 요즈음에 와서는 많은 사람들이 뽕나무를 심어 이득을 챙긴다.
―『용재총화』, 10권
드디어 마포대교를 지난다. 쌀과 소금 그리고 삼베의 집산지라서 삼개라고 불리다가 지금의 이름인 마포로 자리 잡은 연유는 무엇인가, 엣 시절 강원도 영동과 영서지방에서 생산된 삼베가 원주 지방에 모였다가 뱃길을 따라 내려가 마포 나루에 부려져 그곳에 나라 안에 제일 큰 삼베시장이 이루어지면서 생긴 이름인 ‘삼개’의 한자 지명이라고 한다. 이 마포에도 다른 지역의 팔경처럼 8경이 있었다. '용호제월, 마포귀범, 방학어화, 율도명사, 농암모연, 우산방축, 양진낙조, 관악청람'을 들었다. 곧 용산강 물 위로 뜨는 달, 마포 포구로 돌아오는 돛단배, 강 건너 방학 언덕의 밤낚시, 밤섬의 깨끗한 모랫벌, 동바위마을의 저녁 연기, 와우산의 소 말 방축, 양화나루의 석양 무렵의 낙조, 관악산의 맑은 날의 아지랑이 등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어느 것 하나 찾아볼 길이 없다.
1940 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서울 사람들은 얼굴만 보고도 마포 사람을 금방 알아냈다고 한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가 펴낸 『동명연혁고』의 마포구 편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실려 있다.
조선시대에 구전으로 전해오는 이야기로 목덜미가 까맣게 탄 사람은 왕십리 미나리장수, 얼굴이 까맣게 탄 사람은 마포 새우젓장수라 하였다. 그 이유는 왕십리에서 아침에 도성 안으로 미나리를 팔러 오려면 아침 햇빛을 등 뒤에 지고 와 목덜미가 햇빛에 탔기 때문이고, 마포에서는 아침에 도성 안으로 새우젓을 팔러 오려면 아침 햇빛을 앞으로 안고 와 얼굴이 햇빛에 새까맣게 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강을 따라 걸어가며 목덜미가 새까맣게 타서 쿤타킨테라는 말을 듣고 있는 나 역시 왕십리 미나리장수인가.
한편 여의도는 고려시대에 죄인을 쫓아 보냈던 귀양지로, 배로 건너야 했던 모래섬이었다. 작은 샛강을 사이에 두고 영등포와 떨어져 있는 한강 속의 섬이었다. 양밀산의 한 부분은 지리학적으로 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산인데 지금 국회의사당 자리가 그곳이라고 한다.
면적이 8.48km2인 이 섬은 모래땅으로 된 범람원으로 방목이 행해지던 곳이었으나 1916년 이곳에 간이비행장을 만들면서 섬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김포비행장이 1936년 건설되고서도 여의도 비행장은 그대로 존속되었고 1945년 광복 후에는 미군이 사용하였다. 1968년에 서울시에서 윤중제 공사를 착공하였고 70년대 중반에 여의도는 개발의 문이 활짝 열리기 시작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서강西江: 도성 남쪽 15리에 있는데, 황해. 전라. 경상. 충청. 경기도 하류의 조세곡 수송선이 모두 여기에 모인다.”고 실려 있다.
어린아이들이 여름이면 미역을 감고 풍류객들이 산수를 즐기던 이곳 양화진에서 서울을 감싸는 송파까지의 한강 부분만을 따로 떼어 경강京江이라 불렀다. 경강의 주요 나루터들은 전국에서 몰려든 운수업자와 상인들로 언제나 북적거렸다. 흥정 끝의 말다툼, 호주머니를 노리던 투전, 해질녘의 술주정 등은 이 무렵 나루터의 일상이었다. 그렇듯 평화로웠던 양화진에서 피비린내가 난 것은 1866년이었다. 아름답던 양화나루의 산마루에서 대원군은 천주교 신자들의 목을 쳤다. 그로 말미암아 절두산切頭山 곧 사람의 목을 자른 산이 되고 만 것이다. 한국 천주교는 병인박해가 있은지 백 년째인 1966년에 그 자리에 순교자 기념관과 기념성당을 세웠다.
한편 선조 때 문집인 『지봉유설』을 보면 "머리 뒤에 코가 있고 길이가 한길이나 되는 이름 모를 하얀 생선이 잡혀 구경거리가 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까지 돌고래가 올라와 붙잡혔던 것이 확실하다. 1925년에도 6척 가량 되는 고래가 한강 양화진에서 붙잡혀 화제가 되었으나 지금은 고래는커녕 멸치 한 마리 올라오지 않고 있으니.
방화대교 아래에는 많은 사람들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어디서 이렇게 사람들이 오는가 의아해하자 "성남에서도 오고 미사리에서도 많이 와요"라며 음료수 등을 팔고 있는 아주머니가 대답한다. "뭐 타고 와요?" 하고 내가 묻자 "자전거 타고 오지요. 아저씨는 어디서 왔어요?" "태백에서요" 하고 대답하자 "그래요, 멀리서도 왔네요." 거금 1천원씩을 주고 물과 음료수를 사먹고 일어서자 아주머니는 "숭어 잡은 거 회 떠먹고 가세요" 하고 붙잡는데, 옆에 있는 사람들 역시 회 접시와 소주잔을 건네며 한 잔 마시란다. 하지만 진재언 씨의 말대로 한강을 내려오며 더러운 물만 계속 보고 왔는데 그 물에서 잡은 고기를 어떻게 먹겠는가 생각하는 사이에 윤자尹慈의 시 한편이 떠오른다.
“고기잡이 첨지는 갯가에 살면서 낚싯대 드리우고 앉았고, 장사하는 사람은 조수潮水를 맞이하여 닺줄 풀고 가네. 물 위의 백구는 응당 나를 보고 웃으리라. 일생동안 무슨 일로 헛 이름에 얽매이느냐.”
신정일의 <한강 따라 짚어가는 우리 역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