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역사4

2013. 12. 20. 21:55참고

5,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제1차 세계대전,제국의 붕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독자적이 주권을 보유한 2개의 개별 왕국이

1명의 군주를 정점으로 하여 하나의 국가형태를 취한것이다

외무와 국반 재무 업무는 양국 공동의 사안으로 하였고

기타 업무는 각각의 정부에서 개별적으로 처리하였다.

관세와 무역에 관한 규정 중앙은행 설치와 운영문제등의 경제적 업무 사항은

10년마다 양국이 타협하여 협정을 맺기로 하였다

인구는 3500만 제1차세계대전 시점에는 5000만으로 인구상으로 유럽에서

3번째로 큰나라였고 실질적 국력은 5-6위 정도였다

그러나 이중 제국은 자체내의 여러가지 이질적인 요소들을 도외시 하고

하나로 통합함으로 국가로서의 통일성과 동질성이 결여된 채 수많은 내적 갈등

요인과 모순성을 간직하고 있어 모순의 제국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민족문제였는데 제국내에는 약21개의 민족들이 존재하였고

이에 갈ㄹ등은 점점 심화되었다 이와 더불어 봉건사회 질서와 경제 구조가 완전히 제거되지 못한채

현재의 시민사회및 경제 체제와 함께 공존하는 모순적 상황 또한 벌어지고 있었다.

헝가리는 1867년부터 1918년까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시기에 빠른 성장을 이룩했다.

경제는 급속도로 발전했고 농업 목축 공업이 발달하요 후진적 농업국가에서 농 공업 국가로 변모하였다.

급속한 산업화 과정속에서 신흥산업 자본가들이 등장하였고 중하위 귀족들이 젠트리러 변모하여

정치적 의미와 노농다 계층이 형성되는 동의 사회적 의미의 현대화도 진행되었다.

모든 종파에 대해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였고 가종 교육기관이 확충되었으며

헝가리어를 의무화 했다.

문화와 예술에는 낭만적 귀족적 시민적 조류가 다양하게 섞여있었으며 코다이와 버르토크는

전통민요들을 수집 정이해 소개하기도 하였다.

학문분야에서는 자연과하과 수학이 크게 발전했고

1896년 헝가리인들의 카르파티아 분지정착 1000년을 기념하여 유럽대륙내 최초로 지하철이

개통되고 영웅관장 국립미술관등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축제는 헝가리 정신이 과도하게 강조된 면이 있었고

타 민족들의 반발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이러한 민족 문제를 고려하지 못한 강력한 소수 민족 탄압정책은 부작용이 상당하였고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군대 내 언어 사용도 문제점이 대두 되었다

또한 노동자 농민 소수 민족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하지 않음으로써 20세기초부터 본격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다.

1905년부터 제국은 정당의 난립 노동자들의 파업 소수 민족에 대한 동화 정책으로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인들은 슬라브 연합체를 구성하여

오스만 튀르크와의 발칸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여러 소국들을 탄생시켰고

러시아와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점차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위의 흐름속에 191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의 대학생에게

암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중제국은 처음에는 이를 단순 암살사건으로 종결지으려 했으나

결국 이를 기회로 세르비아에 대한 침략을 단행하기로 한다.

이에 세력 확장을 노리는 프로이센도 동조하여 러시아와 프랑스의 부추김을 받은

세르비아도 이에 대적하게 된다.

세르비아라는 작은 나라와 이중제국간의 해묵은 민족적 적대감에서 비롯된 중동부

유럽의 민족주의가 뒤엉키고 유럽 열강의 제국주이적 세력 확장 정책과도 결부되어

이작은 암살사건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학대된다.

전쟁은 러시아가 자체혁명으로 전쟁에서 물러나게 되었지만 잇따른 미국의 참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프로이센의 패배로 끝나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종말을 맞게 된다.

제1차세계대전이 진행중이던 1918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내

제 민족의 민족 자결권과 독립을 보장하겠다는 내용을 포함한 14개조 원칙을 발표하였다.

전쟁이 동맹국의 승리로 마무리 될즈음에 오스트리아~ 헝가라 제국 체제를 고수하려는 집권당에 반대하는

헝가리 국민의회가 결성되었고 카로이 미하이를 수상으로 선출하였다.

인느 1848년 이후 처음으로 수립된 자주적 헝가리 정부였고 11월16일에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막을 내리고

헝가리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카로이 미하이 수상은 헝가리 역사상 가장 커다란 신임과 환영을 받으며 등장했지만

동시에 패전의 결과로 인한 동맹국들과의 평화협상이라는 비극적이고

험난한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곧이어 이정부는 체코슬로바키아와 유고슬라비아가 독립하고 민족 구성과 관계없이

국경선이 잘려나간 트리아농 조약에 의해 초래된 내내외적 혼란을 막지 못하고 실각하게 된다.

트리아농 조약의 결과 헝가리는 피해국에 막대한 보상액을 지급하고

최소의 군대를 유지하며 엄청난 영토의 상실과 민족의 분단이라는 결과을 맞이하게 된다.

경제적 기반도 와해 되었다.

또한 갑자기 다른 국가의 국민이 된 헝가리 민족들의 문제는 오늘날의 정치적 사안으로까지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수백년만에 처음으로 헝가리 영토내에 외국군대가 상주하지 않게 되고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수립해 나가는 계기가 마련되기도 했다.

한편 쿤 벨러에 의해 결성된 헝가리 공산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표방하며

급속도로 대중성을 얻어갔다.

이는 대규모 영토 상실의 위기가 현실로 다가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정치적 대안 세력으로

좌익세력을 선택한것에서도 기인하였다.

공산당은 사회민주당과의 합당을 통해 헝가리 공산 정권인 소비에트 공화국을 탕생시켰다.

소비에크 공화국은 모든 토지를 국유화 하고 동맹국측의 최후 통첩안을 거부하며

군대를 조직하였다.

이에 따라 동맹국측은 소비에트 공화국을 인정하지 않고 루마니아와 체코슬로바키아가

헝가리와 전쟁을 벌이도록 하였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내부적 갈등이 발생하였고 루마니아군의 침략을 계기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부는 결국 무너지게 되었다.

이후에는 헝가리에서의 민주주의 기반이 극도로 약화된 상황에서 반혁명 및

극우세력의 입지가 크게 강화 되었다.

호르티 마클로시를 잠정적 국가 운수로 선출한 극우 세력은 친 독일적이고 파시즘적

성격을 띠었으며 반 유태주의적 태도를 견지 하였다.

헝가리가 트리아농 조약의 충격으로로부터 회복하여 서서히 사회의 안정을 되찾게 된시가는

베틀렌 이슈트반이 수상으로 재임한 1921년부터 1931까지 였다.

그는 토지분배와 참정권확대를 통해 농민층의 지지를 얻고

외국 차관과 새로운 화폐 단위인 펭괴를 도입하였다.

하지만 1929년부터 밀어닥친 세계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헝가리 사회는 다시 흔들리게 된다

농업발전이 정체되고 실업률이 급증하였는데 이는 좌익세력이 다시 활동 할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우익 세력들은 더욱더 강력한 극우화를 추진하였고 옛 영토 회복을 꿈꾸며

독일과 관계를 개선하였다.

1938년에는 재무장을 선언하고 유태인들에 대한 억압을 시작하며 파시스트국가들과의 동맹관계도 맺어갔다.

마침내 히틀러가 체코를 점령하고 그 영토의 일부를 헝가리에게 넘겨주자 헝가리는

이때부터 적그적으로 추축국의 일원이 되었다.

이러한 우익 정권은 영토 회복의 꿈을 실형할수 있다는 환사에 빠진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고

반대 세력의 입지는 더 약화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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