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역사5

2013. 12. 21. 15:09참고

6,제2차 세계대전과 공산화1956년의 헝가리 혁명

제2차 대전이 전개되면서 헝가리는 독일의 압력에 의해

본격적으로 전쟁을 수행하게 되었지만 경제의 현대화가 뒷받침되지 못한

헝가리군의 장비는 매우 열악하였고 이는 대패로 이어진다

칼러이 미클로시는 연합국측과의 비밀협사에 돌입하지만

연합국 측이 다소 미온적인 태도를 보임과 함께 히틀러에 의해 이중 외교정책이

간파됨에 따라 전쟁의 끝까지 추축국에 남아 있을수 밖에 없게 되었다

2차 대전의 결과 수도 부다페스트는 반 이사이 페허가 되어 여러사회기반 시설들이

파괴되었다 또한 영토는 트리아농 조약의 경계에서 슬로바키아 지방으로 더 많이

빼앗기게 됨으로써 모든 비극적 현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1944년 말부터 소련군에 의해 점령된 헝가리에는 인민위원회가 구성되기 시작했고

정당활동도 재재 되었다

12월에는 임시의회와 임시정부도 세워졌다

농림장관 너지 임레의 토지개혁은 농민사회에서 소농민층이 주류를 이루는 사회구조를

만들어냈고 농민층은 헝가리 정치와 사회의 중요변수로 부상하게 된다.

소련군이 진주한 상태에서 실시된 비밀선거를 통해 4개의 당이 연립정부를 구성하게 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공산당이 실권을 장악한 상황이었다.

1947년 헝가리는 연합국 측과의 협의에 따라 국가의 주권을 완전히 회복했다.

당시에는 역사상 유래가 없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였는데

포린트를 도입하는 화폐 개혁조치와 여러 과감한 경제 정책을 통해 경제는 안정을 되찾게 된다

은행과 기업을 모두 국유화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로 전환되어 갔다

이과정에서 공산당은 살라미 전술을 사용하여 다른 당들을 무력화 시키고

모든 주도권을 독점하였다

1948년 이후 등장한 헝가리 공산당 서기장 라코시는 스탈린주의식 독재권력을 행사하며

반 공산당 조직을 완전히 와해 시켰다

국가 보위부를 통해 재판이 행해졌고 소련식 경제 계획을 추진하여

농업대신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육성하였다

1953년 스탈린의 사망을 계기로 소련의 노선이 탈스탈린두의로 전환되어

라코시 정권의 위기는 표면화 되었고 1956년 라코시는 서기장에서 물러나게 된다

10월에는 라코시에 의해 처형되었던 러이크 라슬로의 유해를 다시 안장하는

장례행렬에 엄청난 인파가 가담하는 사건을 계기로 분위기는 고조되었고

결국 1956년 일단의 대학생들에 의해 조직된 집회가 거대화되며

민중 혁명화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공산당은 라코시 시대를 청산한다는 의미에서

당명을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으로 바꾸고 카다르를 서기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헝가리 국민들은 완전한 민주주의 독립을 요구하였고

새로 수상에 오른 너지는 일당 독제 폐지 사회민주당 재설립을 약속하고

바르샤바 조약기구 탈퇴를 선언하였다

이에 11월4일 소련군은 부다페스트로 진입하여 민중 혁명을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소련군의 개입은 카다르가 비밀리에 추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소련의 하수인으로서 권력을 장악한 카다르는 1969년까지의 정상화 과정을 통해서

소련식 정치 사회구조를 갖추어 나갔다.

카다르의 통치는 개혁과 반개혁의 과정속에서도 개혁 정책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겠다는것이 특징인데

이와 더불어 경제 개혁과 사회의 자유화를 조금씩 실천해 나갔다.

경제 규모가 작고 지하자원이 적으며 시장 규모가 협소한 헝가리의 특성상

무역 의존도가 높은 사실을 인식하고 시장 경제 요소룰 갖춘 신경계 구조를 도입하였다.

이는 헝가리 산업의 국제 경쟁력강화 기술 혁신을 목표로 시장 경제의 장점을 효율적으로

흡수하며 사회주의적 경제 구조 골격은 그대로 유지해 나가는 정책이었다.

이로 인해 헝가리는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농업분야에서 큰 성장을 이루며

농산물의 수출이 대외 무역에 큰 비중을 차지할 정도가 되었다,

이후에는 지속적인 외환의 부족과 외채의 급증으로 경제가 악화되었는데

그동안 쌓아온 서방구과의 신뢰로 극복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급격한 경재의 현대화를 통해 많은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카다르식사회주의는 반개혁 감정 경제 구조상의 문제 이에 수반된 정치 개혁

민족 문제 후계자 문제등을 노출하며 비판 세력의 등장을 야기 시켰다.

이러한 비판세력들은 철학자및 사회학자들로 구성된 지적 시민적 야권과 작가

문필가들로 구성된 지적 민족적 야권으로 구분되었는데 이둘 모두 지하 출판물등을 통해

활동하였다,

카다르의 집권말기에는 공산당내의 개혁 공산주의 세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이들은 카다르가

서기장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개혁을 가속화 하여

새로운 체제로의 평화로운 전환 가능성을 열었다.

포주거이를 중심으로 한 개혁공산주의 세력은 1956년 헝가리 혁명을 반혁명이 아닌

민중 봉기라고 정의 하였고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에 설치된 철의 장막을 제거하였으며

너지의 복권,민주화의 가속화를 진행하였다.

1989년 너지 처형 31주기 행사를 계기로 헝가리는 다시 법치국가로 복귀하게 되었으며

이는 헝가리 민주화 과정의 커다란 전기가 되었다.

 

7,체제 전환과 유럽으로의 회귀

1989년 10월7일에는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이 해체되고

헝가리 사회당이 창당되었다.

이로써 헝가리 공산당은 헝가리 민주화와 개혁에 많은 기여를 한후에 자발적으로 해체하여

여타 신생정당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1990년 자유선거에 임하게 되었다.

한편 시민적 야권세력과 민족적 야권세력은 1985년 중반까지는 서로 함께 모여 의견을 교환했으나

이후 정치적 입장이 엇갈리며 서로 다른길을 가게 되었다.

민족적 야권세력은 헝가리 민주 포럼을 시민적 야권세력은 자유 민주 연합을 결성하였다.

또한 급진적인 대학생들을 중심으로하는ㄴ 정당 조직적인 청년 민주 연합도 결성되었다.

헝가리 민주포럼은 1989년3월 언털을 의자으로 선출하고 민주화 과정에 대한 의견을 조정했으며

6월에는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과 재야정당들이 모인 원탁회의에서는

1990년 선거방식에 대한 의견이 합의 되었다.

1989년10월에 시작된 국회에서는 헝가리 사회당은 공산당으로부터 계승받은 103억 포린트에

달하는 당의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키고 기업 내에서 황돌하던 당조직과 노동 적위대를

자진해서 해체 시키는 안을 결의 한다.

국회의장인 쉬뢰시는 1989년 10월23일 헝가리 공화국으로의 전환을 공식적으로 선포한다.

또한 1956년 헌가리 민중혁명일을 국경일오 지정하고

1990년에는 소련군의 철수가 시작되었으며 1991년 말까지 군사력을 35프로 감푹하기로 하였다.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고 복잡하게 행해진 의회선거에서 헝가리민주 포럼은

165석을 확보하였고 과반수에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언털 요제프는 독립 소농당, 기민당과

연합정부를 구성하였다.

언털은 헝가리 공화국의 수상으로 선출되었다,

헝가리 민주포럼은 두번째로 많은 의석을 확보한 자유민주 연합과 협정을 맺어

5년 임기의 대통령은 자유 민주 연합소속의 괸츠 아르파트로 선출하기로 하였다.

40년만에 처음으로 시행된 이 자유선거는 저조한 투표율 지역에 따른 가치관 차이

헝가리 사회당의 몰락 정책 대결이 아닌 과거 행적대결을 특징으로 하였다.

언털이 이끄는 새로운 민주정부는 1990년 5월22일 부터 정식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궤제로 부터 물려맏은 사회문제와 경제난 그리고 대내외적 문제들이 겹치며

어려움에 직면하였다

시장경제로의 전환에 모든 국민들이 잘 적응할수는 없었고 그에 따른 사회 문제들이

대두되며

대중들의 지지를 잃어갔다.

1994년의 선거에서는 진보적 성향의 야당인 자유 민주 연합과 헝가리 사회당이 보다

현실적인 공약을 내세워 승리하게 되었고

이중 헝가리 사회당은 54프로의 의석을 획득하였다.

이후 헝가리 사회당은 안정적 정치를 목적으로 자유 민주 연합과

연립하여 정부를 구성하였다.

헝가리사회당의 의장인 호른줄러는 수상으로 취임하였고

구 동유럽 사회주의권 시장을 회복하는등 자유주의적 경제 정책과 병행하여

서구적 의미의 사외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정책노선을 취하였다

체제 전환 이후 오랜 노력끝에 미침내 헝가리는 2004년 5월1일 유럽 연합회의 정회원으로 가입하였고

정식으로 유럽의 일원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이후 2011년 상반기 유럽 연합회의의 순회 의장국을 맡아 활동함으로써

책임있는 유럽의 일원으로써 그 역활을 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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