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2014. 1. 17. 11:21참고

서해안을 따라 우리 국토를 걷는다. 목포에서 무안까지

서해안을 따라 우리 국토를 걷는다.

목포에서 무안까지

 

2014년 갑오년의 테마도보답사가 시작됩니다. <서해안을 따라 우리 국토를 걷는다.>라는 주제로 펼쳐지는 이번 답사는 목포에서 무안에 이르는 길입니다.

목포에서 서해안을 따라 한강이 서해안으로 들어가는 김포시 월곶면 보구곶리까지 걷고, 다시 고양에서 휴전선을 따라 철원 인제 고성에까지 이어질 예정입니다. 이번 여정은 서해안에 펼쳐진 바다의 풍경과 함께 우리민족의 삶의 원형을 발견하게 될 중요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목포영은 현에서 남쪽으로 68리 떨어져 있다. 나주와 목포가 여기 와서 바다로 들어가는 까닭에 통칭 목포라고 한다”고 하였던 이곳에 수군만호 1명이 있었고 후삼국이 자웅을 겨루던 시절 이곳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다.

 

궁예弓裔 때에 고려 왕건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주 포구에 이르렀는데, 후백제 견훤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전함戰艦을 벌려놓아 목포로부터 영암군 덕진포까지 뱃머리와 꼬리가 서로 잇닿아 있었다. 거기에다가 수군과 육군이 겹겹이 깊고 넓게 배치되어 병세兵勢가 매우 왕성하였으므로, 여러 장수가 근심하고 있었다. 이 때 왕건이 말하기를 “걱정마라, 싸움에 이기는 것은 단결에 있는 것이지 수가 많은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하고 진군을 명하여 공격하자, 견훤의 전함이 조금씩 물러나기 시작했다. 그 때 바람을 타서 불을 지르자 타 죽고 강물에 빠져 죽은 자가 태반이고, 머리를 베어 모은 것이 500여급이었으며, 견훤은 작은 배로 도망을 가고 말았다.

 

이곳 무안군 상향면 남악리에 전라남도 청이 이주해온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광주광역시에 위치하던 기존의 도청을 옮기기 위해 1999년 1월 9일 신도청 소재지 용역을 실시했고, 그 결과 현재의 부지가 선정되었다. 3년의 공사 끝에 2005년 11일 11일 개청식을 열었다.

전남도청이 있는 무안에서 바라다 보이는 영산강 하구둑 아래가 바로 항구도시 목포木浦이고 목포에 노적봉이라고도 부르는 유달산儒達山(130M)이 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고

“사공에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부두에 새 아씨,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으로 시작하는 이난영의 노래는 문일석文一石이 193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의 향토가요 가사로 당선된 노랫말이다. 이 가사에 작곡가 손목인孫牧人 이 곡을 붙인 노래가 <목포의 눈물>이다. 이 노래뿐만이 아니라 “목포는 항구다”라는 노래로 기억되는 목포를 광주의 시인 문병란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목포

 

더 갈 데가 없는 사람들이 와서

동백꽃처럼 타오르다

슬프게 시들어 버리는 곳

항상 술을 마시고 싶은 곳이다.

 

잘못 살아온 반생이 생각나고

헤어진 사람이 생각나고

배신과 실패가

갑자기 나를 울고 싶게 만드는 곳

문득 휘파람을 불고 싶은 곳이다.

 

없어진 삼학도에 가서

동강난 생 낙지 발가락 씹으며

싸구려 여자를 바라볼거나

삼학 소주 한잔을 기울일거나.

 

........

실패한 첫사랑이 생각나는 곳이다.

 

끝끝내 바다로 뛰어들지 못한

목포는 자살보다

술맛이 더 어울리는 곳

.........

목포를 어째서 목포라고 불렀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영산강 물과 서해 바닷물이 합쳐지는 이곳의 지형이 마치 ‘길 목쟁이’처럼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하여 ‘목개‘ 로 부르던 것을 한자로 옮겨서 목포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이야기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진을 쳤던 고하도가 목화의 집산지라서 이 나라에서 생산한 목화를 일본으로 실어 날랐기 때문에 ’목화의 항구’라서 목포로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목포가 큰 항구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주위에 섬이 많고 항만 동남쪽에 있는 영암반도의 돌출부와 남서쪽에 가로놓인 고하도가 자연방파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배후의 유달산이 자연방파제 역할을 하여 지형 상 유리한 위치에 있던 목포였다. 1895년 관제개혁으로 무안군에서 분리된 목포에 목포만호청이 설치되었고, 목포가 개항된 것은 청일전쟁이 끝난 1897년 10월이었고 그때부터 목포진 또는 목포항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곳 목포는 유달리 예술가들이 많이 태어난 곳이다. 소설가 박화성 천승세가 있고, 작고한 문학평론가인 김현, 우리 시대의 시인인 김지하. 극작가 차범석, 동양화가인 허건도 이곳 목포에서 살았다.

목포 하면 떠올리는 삼학도에 얽힌 전설이 하나 있다.

옛 날 이곳 목포에 무예를 익히려는 한 장사가 있었다. 그는 유달산에서 무예를 익히면서 절벽 같은 암벽을 오르내리기도 하고 바위와 바위 사이를 건너뛰기도 하고, 활로 날아가는 새를 쏴아 떨어뜨리기도 하였고, 큰 칼로 호랑이의 숨통을 단번에 끊어놓기도 하였다.

그가 무술을 익히고 있는 유달산 아래에 세 처녀가 살고 있었다. 아침마다 마을에서 올라와 물을 길어갔는데 늠름한 그 장사의 모습에 연정을 품게 되었고, 장사 역시 그들에게 마음이 끌려서 무예를 닦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러다가 무예수업을 제대로 마치지 못할 것 같다고 느낀 장사가 새 처녀에게 자기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당신들을 사랑하게 되어 마음이 혼란스러워 져서 무예를 익힐 수 없으니 무예수업이 끝날 때까지 멀리 떨어진 섬에 가서 나를 기다려 주시오.” 하고 부탁하였다. 이 말을 들은 세 처녀가 어느 맑은 날 돛단배에 몸을 싣고 먼 섬으로 향하였다. 그 광경을 몰래 지켜보던 그 장사는 세 처녀가 살아 있는 한은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다고 생각하고서 유달산에서 배를 향해 화살을 마구 쏘아날렷다. 장사의 화살을 맞은 배는 두 동강이가 나면서 목포 앞바다 한 가운데에 가라앉고 말았다. 그러자마자 그 자리에 세 마라의 학이 솟아오르면서 하늘 높이 날아갔으며 곧 이어 그 자리에 세 개의 바위가 솟아나 섬이 되었다,. 그 섬을 삼학도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삼학도는 1968년 이후 목포와 연결되면서 자연이 크게 파괴되어 옛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목포 앞바다의 섬들로 이루어진 군이 신안군이다. 신안군이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은 1969년이었다. 그 이전에는 지도군이었으며, 1914년에는 무안군에 소속되었다가 1969년에 신안군이라는 이름으로 떨어져 나왔다. 안좌도․압해도․암태도․장산도․대흑산도 등을 비롯, 유인도 111개와 무인도 719개로 이루어져 있다. 흑산도는 우리나라 3대 파시 즉 흑산도. 위도 연평도의 조기파시 중 제일 남쪽에 위치해 있는 곳이다.“

 

“영산강 하구에 자리잡은 고을이 무안군務安郡이다. “ 주민들은 꾸밈이 없어 수수하며, 실속 없는 겉치레는 숭상하지 않는다. 농사와 길쌈을 본업으로 삼고, 하찮은 기술 따위를 일삼는 경우는 드물다”라고 형승 조에 실린 무안의 백제 때 지명은 물아혜군(勿阿兮郡)이다. 이곳 무안의 진산은 승달산(僧達山)인데, 승달산이라는 이름이 지어지게 된 유래가 다음과 같이 전해온다.

원나라 때에 임천사(臨川寺)의 중 원명(圓明)이 바다를 건너와 이 산을 택한 뒤 풀을 엮어서 암자를 만들었다. 그 소식을 들은 임천에 있던 그의 제자 500명이 원명을 찾아와서 함께 도를 통했으므로 승달산이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승달산에 호승예불형胡僧禮佛穴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이 혈은 승려가 부처님께 예불을 드리는 모습이라고 하는데 “이 혈에 묘를 쓰면 98대에 이르도록 문무백관을 탄생시킬 것이다”라고 <도선비록>에 전해온다.

사람의 1대를 대체로 30년을 치는데, 98대 라면 3천년에 이르는 긴 시간이다. 그래서 이곳의 명당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혈은 개인이 소유할 수 없는 혈이고 그래서 개인의 욕심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자리라고 볼 수 있다”는 말이 더욱 설득력을 얻는 시대가 아닐까?“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전라도 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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