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역사와 헝가리

2014. 1. 17. 11:53참고

일시-2014년 1월16일 목요일 오후 2시~4시

장소-국립 고궁 박물관 본관 강당

강사-김장수,김대순

 

 

1,오스트리아 제국의 민족 문제

 3월 혁명(1848)이후의 시기를 중심으로-------김장수(관동대 사학과)

 

프랑스에서 발생한 2월 혁명(1948)의 영햐으로 같은해 3월13일 빈에서도

혁명적인 소요가 발생했다.

이후부터 오스트리아 제국에서는 민족문제가 크게 부각되었는데

그것은 그동안 견지되었던 메테르니히체제(1815-1848)가 민족주의 이론의 확산과

그것에 따른 민족운동을 원칙적으로 허용하지 않은데서 비롯된것 같다.

일반적을 다민족국가에서 어떤 특정민족에 대한 법적 사회적인 배려가 있을경우

민족문제는 발생하게 된다

빈정부 역시 독일민족을 우선시하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펼쳤기 때문에

민족문제가 발생할수 있는 상황하에 있었지만 빈 정부의 실세였던 메테르니히는

자신이 지향한 반동적이고 복고적인 정책을 통해 민족문게가 수면위로 부각되는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메테르니히가 실각됨에 따라 비 독일계 믽고의 정치가들은 민족문제에

대한 관심을 공식적으로 표멸하게 되었고 그것을 해결할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논의하는등 적극성도 보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미족문게에 해결방법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했다.

이당시 코수트를 비롯한 헝가리 정치가들은 민족의 권리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질서체제 즉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반면 팔라츠키를 비롯한 슬라브정치가들은 제국의 존속을 인정하고

거기서 그들 민족의 법적 사회적 지위향상을 우선적으로 지향했다.

이를 통해 헝가리 정치가들은 현실적 상황보다 그들이 지향한 정치적 목표달성에

집착한 반면 슬라브정치가들은 현실적 상황을 우선적으로 고려했음을 확익할수 있다.

헝가리 정치가들은 이상주의적인 자세 슬라브 정치가들은 현실주으적인 관점에서

민족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비 독일계 민족의 정치가들이 펼친 민족정책은 오스트리아제국내에서

반혁명이 다시 우위를 차지하게 됨에 따라 아무런 성과없이 끝났다.

헝가리 슬라부 비 독일계 정치가들이 정치적 경험을 가졌었더라면

당시 상황을 고려한 타협안내지 양보안을 제시하여 정치적 목표나 민족문제해결은

실천시키려는 노력을 펴쳤을 것이다.

빈 정부도 민족문제 해결 제국 존속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지 못했기에

1849년 초에 신절대주의체제를 도입하는 실수를 범했다.

3월 혁명기간둥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에서는 독일 통합방안으로 제시된석은

대독일주의와 소독일주의엿지만 통합방안들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1860년대 초 비스마르크가 프로이센의 실세로 등장하게 됨에 따라

소독일주의 원칙에 따른 독일의 통합이 본격화되고

1866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사이에 형제전쟁이 발생하게 된다.

이전쟁에서 오스트리아는 패하고 그동안 독일권에서 주장한

우위권마저 사라진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위정자로부터 이중체제의 도입을 서두르게 된다,

1867년3월15일 오스트리아제국의 이원화는 공식적으로 선포되고

효력발생은 1867년6월12일부터 시작되었다.

독일민족과 헝가리 민족은 제국내에서 지배민족으로 등장하고

이들 민족은 자신들에게 할당된 영역을 아무런 제한없이 통치하게 된다.

이원체제가 도입된 이후 슬라브민족들의 반발 체코민족의 반발로 잠시나마 구상된

3원화 즉 독일 헝가리 슬라브 제국의 탄생은 독일 헝가리 반대로 시행되지 못한다

체코를 비롯한 슬라브민죽들은 빈 정부와 타협을 거부하는 소극정치를 펼치고 장기간 지속된다

제1차대전이 끝난후 오스트리아는 민족주의 원칙에 따라 나눠지게 된다

 

 

 

 

 

 

 

2,17~19세기의 헝가리

 주요사건과 핵심 인물을 중심으로---------김대순(한국외대 헝가리어과)

 

합스부르크 제국의 통치와 제국으로부터 독립전쟁(1686~1790)

1686년 9월2일 헝가리를 점령햇던 오스만터키군이 합스부르크를 주축으로 한 연합군에 패배한후

오스만 터키의 헝가리 점령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1699년1월26일 카를로비츠에서 합스부르크 주도의 연합군은 오스만 터키와 평화조야을 체결하였고

이는 15년 지속되었던 합스부르크 오스만 터키 트란실바니아 자치 공국의 삼분할 시대 종결을 고하였다

22년이상 지배했던 합스부르크의 통치는 억압 통제 민족의식 성장의 제한으로 요약할수있다.

합스부르크는 헝가리를 제국에 귀속하는 하나의 영토로 간주하였다.

헝가리 귀족회의에서 행사했던 왕위 선출권을 폐기시키고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헝가리 국왕을 세습토록 했다.헝가리에 주둔한 합스부르크 군대에에 대한 부가침권을 강조하며

귀족과 농민의 토지와 재산을 합스부르크 전리품으로 착취하였다.

억압받은 헝가리 농민과 군인들은 몇변의 봉기를 일으키나 실효를 거두지 못한다.

 

라코치 피렌츠 2세가 이끈 독립 전쟁(1703~1711)은

라코치는 트란실바니아 귀족가문 출신으로 반 합스부르크에  투쟁을 이끈 헝가리 영웅이다.

독립군인 쿠르츠를 이끌었고 프랑스 루이14세와 협공하여 합스부르크 저항했다.

당시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오 맞물려 프랑스 세력 확장을 견제 하려 했던

영국과 네덜란드가 합스부르크군에 편승함에 라코치는 패전한다.

라코치는 피터대제로부터 군사적인 도움을 요청하기 위하여 1710년말 러시아로 떠났으나

그가 부재학 전권을 위임받은 카로이 산도르는 1711년 4월29일 서트마르에서 합스부르크와

평화 조약을 체결한다.

조약에 반대하며 라코치는 폴란드및 프랑스를 거쳐를 옯겨가며 독립 투쟁을 하나

1735년 망명지인 터키에서 사망한다.

 

합스부르크 왕가 칼4세가 아들없자 그의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권을 계승하였는데

그녀는 합스부르크 주변 국가들을 연합하여 통일 국가를 갖춘 단일 다뉴브제국 건설을

추구하였다.

헝가리 귀족들이 충성을 맹세한 왕이다.

기존의 헝가리 억압방식에서 벗어나 개혁을 단행하였다.

귀족과 농민의 책무를 경감하는 진보적이었으나

합스불크가 신봉하는 로마 카톨릭 교도를 정책으로 펼쳐 신봉하지 않은자는 이등 국민으로

강등되고 공직을 맡지 못했다.

 

 

 

2,개혁시대(1790~1848)

테레지아 여제를 계승하여 요제프 2세와 레오폴트2세를 거쳐 종교와 신분의

개혁을 단행하고 레오폴트2세를 계승한 피렌체1세는 흐름과 역행하는 조치를 단행한다.

합스브르크 제국과 헝가리 왕국 개혁세력을 감시하고 절대 왕조시대 강압정치를 추구한다.

불만을 품은 지성인들은 프리메이슨조직과 비밀모인을 구성한다,

프랑스혁명처럼 자유와 평등회 조직을 구성하기도 하였다.

합스부르크 제국으로부터 헝가리 독립성과 자주성을 목표로 무장반란을 계획했던

머르티노비츠는 경찰에 발각되어 공개 처형된다.

개혁과정 중심에서 현재까지 추앙받는 인물은 세체니 이슈트반,러요시,페퇴피 산도르이다.

경제 개혁에는 세체니 이수트반 정치적 이상은 러요시 민족의 노래로 유명한 페퇴피 산도르다

실제 1848년 3월15일은 절대 왕조를 붕괴시키고 시민사회로 나갈수있는 시민 혁명의 기점으로 펑가한다.

1848년3월18일은 개혁입법안으로 개정된날로 기록된다.

시민 혁명은 합스부르크제국의 통치에 대한 도전으로 이에 대응하여

페르디난트 5세는 헝가리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한다.

공세에 맛서 합스부르크 군대는 헝가리 군을 상대로 패배한다.

피렌체 요제프 황제는 러시아 니콜라스군대를 요청하여

양쪽에서 공격받은 헝가리군은 러시아군에 항복하고 시민 혁명은 종결된다.

그뒤 헝가리민족의 피의 숙청이 감행되었다.

1849년 10월6일 혁명정부에서 개혁의 필두에 있던 버차니 수상은 총살되고

혁명군 지휘관은 처형되었다

국제 정세에 따라 합스부르크는 데아크 페렌츠가 주도인물로

공존과 타협을 모색하면서 1865년 비빌 협상을 통해 향후 50년간

오스트리아 헝가리 왕국의 탄생된다.

독자적인 주권을 보유한 개별 왕국이 한명의 오스트리아 황제를 정점으로

하나의 국가형태를 골자로 한다.

 

3,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왕국(1867~1918)

독자적인 의회 정부 행정제도 반면 외교 안보 재정은 공동 지휘체제였다,

이해가 상충될시 오스트리아 황제가 절대적인 지위를 부여받은 구주로 최종 결정을 내린다.

내부적으로 민족 문제가 갈등요소였다.

당시 주류를 이루었던 오스트리아 독일계 헝가리을 제외한 체코 슬로바키아 폴란드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세르브 크로아티아 슬로베키아 이탈리아 유태인 집시 아르메니아 불가리아

는 투표권이 없고 종교와 언어 자유를 누릴수가 없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내에서도 내적 갈등있었다

아르누보와 아방가르드 양식이 등장하며 새로운 미술의 증흥을 맞하기도 하였으나

왕국내 비결의 문제로 농민과 제 민족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체에서 왕국의 번영의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다.

1905년부터 표면화되고 농민과 노동자들은 권리 신장을 요구하였다

왕국내 제 민족들은 동등한 권리를 보장받는 입법안 제정을 요구하고

세르비아인들과 크로아티아인들은 발칸지역의 모든 슬라브인들이 뭉친 연합체를 구성하자고

주장하였다.

1914년 6월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테자가 민족주의에 심취한

세르비아 학새에 의해 암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단순 암살사건은 세르비아인들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구실로 세르비아 침공을 결정한다.

당시 세력확장을 추구했던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 편에 동조하는 상황에서

이를 견제하려 했던 프랑스와 러시아는 세르비아 편에서 전쟁을 부추김으로

오스트리아 암살사건은 유럽 열강의 이해관계가 얽힌 1차 세개대전으로 확대 되었다

1917년 러시아에서 10월혁명이 발발함에 다라 러시아는 대전에서 철수하고

오스트리아 헝가리왕국으로 유리하게 전개된듯하다 미국의 참전으로

1918년 여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중왕국이 패전함에 따라

1867년 타협으로 형성되어 반세기 동안 지속되었던 오스트리아 헝가리 왕국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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