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5. 12. 12:50ㆍ참고
통영에서 가야산 해인사로 이어지는 길<2014, 여름 걷기 학교>
통영에서 가야산 해인사로 이어지는 길<2014, 여름 걷기 학교> <!--[if !supportEmptyParas]--> <!--[endif]--> <2014년 여름 걷기학교>가 남해에 그림 같이 아름다운 통영과 합천, 그리고 거창 일대에서 펼쳐집니다. 8월의 두 번째 목요일 밤에 떠나 통영의 미륵섬에 이를 것입니다. 미륵산의 용화사에서 관음암을 지나면 한국전쟁당시 가야총림의 피난처였던 도솔암에 이릅니다. 이곳에서 근대의 고승인 효봉대선사의 제자인 법정과 일초스님이 머리를 깎은 절입니다. 그곳에서 미륵산 정상이 지척입니다. 미륵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한려수도의 아름다운 섬들이 꿈길처럼 보입니다. 정상에서 내려가면 효봉스님과 구산스님이 구도를 했던 미래사에 이릅니다. 삼덕리의 장군봉에서 한려해상국립공원을 보고 통영으로 나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선정한 통영의 문화 생태탐방로의 도보답사가 시작 됩니다. 박경리. 이중섭. 유치환, 유치진, 윤이상 등 우리시대의 문화 예술인들의 삶터였던 통영의 동파랑길 남망산 공원등 통영의 골목길 도보답사는 말 그대로 골목길의 진수를 보여줄 것입니다. 다시 발길을 옮겨 고성의 옥천사에 이르고, 합천의 가야산에 도착할 것입니다. 나라 안의 삼보사찰중 법보 사찰로 알려진 합천 해인사에서 가야산을 오르고 최치원의 자취가 서린 홍류동계곡에서 시작된 ‘소리길’을 걸어서 월광사에 이를 것입니다. 나라 안에 가장 아름다운 절 중의 한 곳인 청량사를 답사 한 뒤 여정은 거창으로 향합니다. 거창읍 양평동 석조여래좌상을 보고 위천면에 자리 잡은 수승대와 동계 정온 선생 고택을 비롯 위천변의 아름다운 길을 걷고 마무리할 이번 여정에 많은 참여 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경상남도 통영시 봉평동 미륵산 자락에 있는 용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이다. 미륵산은 예로부터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의 상주처로 믿어져왔던 곳이다. 이절은 광해군 9년에 성화선사가 통제사 윤천(尹天)의 주선으로 군 막사의 성격을 띈 사찰을 창건하고 정수사(淨水寺)라고 하였다. 5년이 지난 후 폭풍으로 정수사가 파괴되어 1622년에 미륵산 제3봉인 삼장골에 중창하고 천택사라고 하였다가 1628년(인조6년) 다시 화재로 절이 불타버리고 말았다 이처럼 바람과 물과 불의 삼재(三災)를 당하자 성화는 미륵산 제1봉에서 7주야를 기도를 올렸다. 그때 신인(神人)이 나타나 지금의 자리에 절을 지어 미륵불을 모시도록 계시하였다. 벽담당 행선이 화주가 되어 천택사의 남은 건물을 이전하여 용화사라고 이름 지었는데 지금의 보광전 기둥은 그때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내세울 만한 문화재는 별로 없지만 용화전, 명부전, 석진당, 적묵당, 해월루 등의 건물들이 있고 문화재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된 석존여래상과 80여년전 함양 영은사에서 옮겨온 고려중기의 작품인 지장보살상과 시왕상이 있다. 그리고 적묵당 주봉 쪽으로 올라가면 육모정 형태의 종루가 있으며, 그 뒤편에 효봉스님의 5층 사리탑이 있다. 종루의 글씨는 범어사 종루의 현판을 모각한 것으로 하성파의 글씨이다. 용화사의 용화전 앞에 서면 통영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너머로 보이는 벽발산은 석가세존의 의발(衣鉢)을 장차 미륵불이 세상에 내려올 때 그에게 전해주라는 유언을 받은 가섭존자가 그 산에 머물면서 미륵불이 출연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용화사에서 관음전에 이르는 길섶에는 축 늘어진 소나무들과 잡목 숲이 어우러져 한가로운 산책로를 연출하고 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형태가 온전치 못하나 오래된 듯 한 지암대사의 부도가 있다. 조금 오르자 며칠간 내린 비로 넘쳐흐르는 개울이 나타나고 20여 미터 쯤 오르면 관음암이다. 광해군 8년에 청안선사가 창건하였다는 관음암의 입구에는 마치 석성의 문루와 같은 누문을 세웠고 ‘당래선원’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문을 들어서자 가정집 분위기를 풍기는 관음전 건물이 시야에 들어온다. 절 주위를 대나무 숲이 에워싸고 그 아래 자락에 상사화 꽃이 무리지어 피어있다. 동관전, 산신각 요사채가 들어선 경내에 잔디와 꽃나무들이 곱게 가꾸어져 한가로운 정원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지울 길이 없다. 길은 도솔암 쪽으로 이어진다. 300미터 쯤 올라갔을까 천지봉 아래에 도솔암이 자리 잡고 있다. 미륵산 내에서 가장 오래된 고찰로 알려져 있는 도솔암은 고려 태조 21년(943년) 도솔스님이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창건에 얽힌 설화가 매우 유명하다. 17세에 출가하여 25세까지 지리산 칠불암에서 수도하였던 도솔스님은 이곳 미륵산으로 옮겨와서 암굴에 머물며 수도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호랑이와 가까이 지내게 되었고 그 호랑이가 한 처녀를 업어다 바쳤다. 처녀는 전라도 보성에 사는 배이방의 딸이었는데 혼례 날을 받아 놓고 목욕을 하다가 호랑이에게 붙들려 온 것이었다. 도솔스님이 그 처녀를 고향으로 데려다 주자 배이방은 그 은혜를 갚기 위하여 엽전 300이라는 거금을 희사하였고 그 돈으로 도솔암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영주 희방사의 창건설화와 비슷한데 지금도 도솔암 위쪽에는 도솔이 수도하였던 천연동굴이 있고 창건 이후 초음과 자암등의 이름 높은 스님들이 수도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하여 한때는 ‘남방제일선원’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창 및 중수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현존하는 건물은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62호인 대웅전과 칠성전 종각, 요사채 등이 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가야총림의 피난처였던 도솔암 이 도솔암에 한국전쟁 때 가야총림의 대중들이 피난을 오게 된다. 그때 해인사 방장인 효봉대선사와 금오대선사 등 불교계의 거물들이 이곳에서 피난살이를 하던 중 구산대선사가 고성 이(李)부자집 사랑채가 헐리는 것을 사서 동국선원이라는 현판이 걸린 선방을 지었고 1954년에는 미륵산 남쪽 영운리 일대의 적산 산림을 불하받아 미래사를 창건하게 된다. 금강산에서 피난을 왔던 효봉 스님의 스승인 석두 스님이 이곳에서 입적하고 이곳에서 효봉스님의 큰 제자들인 법정(法頂), 일초 스님들이 머리를 깎아 큰 문파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if !supportEmptyParas]--> <!--[endif]--> 통영항이 한 폭의 풍경화처럼 내려다보이는 남망산 공원으로 오르는 길 옆에 세워진 시비가 유치환의 <깃발>이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理念)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그리고 그곳에서 정상에 오르면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큰칼 옆에 찬 채 한려수도를 바라보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서 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풍경화처럼 펼쳐진 통영 앞바다를 바라보며 태어난 인물로는,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와 김상옥(金相沃)․김춘수(金春洙)․유치환 등의 시인, 극작가 유치진(柳致眞)을 들 수 있다. 또한 분단조국의 현실 속에서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채 독일에서 숨진 작곡가 윤이상(尹伊桑)씨와 화가 김형근․전혁림씨도 이곳 통영의 아름다운 바다를 보고 그들의 꿈을 키웠으며, 화가 이중섭(李仲燮)도 이곳에 있으면서 남망산 자락 아래 펼쳐진 통영의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다. 통영 바다 건너 쪽이 거제도이다. <신정일의 신 택리지 경상도 편>에서 <!--[if !supportEmptyParas]--> <!--[endif]--> 해인사가 있는 한천 가야산 <!--[if !supportEmptyParas]--> <!--[endif]--> 『택리지』에 ‘임진왜란 당시에 금강산․ 지리산․ 속리산․ 덕유산은 모두 왜군이 들어오는 화를 면치 못하였으나, 오직 오대산과 가야산 소백산에는 이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부터 삼재三災가 들지 않는 곳이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가야산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을 중심으로 거창군과 경상북도의 성주군과 고령군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주봉인 상왕봉(1,430m), 두리봉(1,133m), 남산(1,113m), 단지봉(1,028m), 남산제1봉(1,010m), 매화산(954m) 등 1,000m 내외의 연봉과 능선이 둘러 있고, 그 복판에 우리나라 3대사찰 가운데 하나인 해인사와 매화산 자락에 청량사 및 그 부속암자들이 자리 잡고 있다. 가야산 일대에서 해인사에 있는 치인리 골짜기에 모이는 물은 급경사의 홍류동 계곡을 이루고, 동남방을 흘러내려와 가야면 황산리에서 낙동강의 작은 지류인 가야천이 된다. 가야산은 예로부터 ‘조선팔경’ 또는 ‘12대명산’의 하나로 꼽혀왔다. 1966년 가야산 해인사 일원이 사적 및 명승 제5호로 지정되고 1972년 10월에 다시 가야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가야산의 이름은 가야산 이외에도 우두산․설산․삼왕산․중향산․지달산 등 여러 가지가 있었다 한다. 『택리지』에 가야산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떠나 있으면서도 그 높고 수려함과 삼재가 들지 않는 영험함을 말하여 명산으로 불렸다. 한국의 명산에는 산신(山神)이 있는데, 가야산에 있는 가야산신은 정견모주(正見母主)라는 여신이다.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가야산신 정견모주는 천신 이비가지에 감응되어 대가야왕 뇌질주일과 금관국의 왕 뇌질청에를 낳았는데, 뇌질주일은 대가야의 시조 아진아시왕, 뇌질청에는 금관국의 시조 수로왕의 별칭이라 했다. 따라서 가야산의 산신 정견모주는 가야지역의 여신이었을 것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가야산 형승은 천하에 뛰어나고 지덕은 해동에 짝이 없으니 참으로 수도할 곳이다.’라고 실려 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큰 절이 그렇지만, 특히 해인사는 창건과 그 뒤 여러 차례의 중창이 있었는데 모두 국가의 각별한 지원에 힘입어 이루어졌다. 신라 애장왕이 그러했고, 고려 태조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발원, 그리고 세종․세조․성종의 중창 지원은 각별한 것이었는데, 그렇게 국가의 재정을 넉넉히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해인사가 민족의 고귀한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판을 천여 년 가까이 보전함으로써, 법보종찰의 명성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야산 해인사는 또 국가가 환란에 처했을 때 일어난 불교 호국전통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불가사의하게도 민족의 보물인 고려팔만대장경판과 이를 봉안한 장경각만은 한번도 화를 입지 않고 옛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산속에는 해인사海印寺가 있다. 신라 애장왕哀莊王이 죽어서 염을 한 뒤에, 다시 깨어나니 명부의 관원에게 약속한 발원에 따라,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구입해서 배에 싣고 왔다. 목판에다 새긴 뒤 옻칠을 하고 구리와 주석으로 장식한 다음, 장경각藏經閣을 120칸을 지어서 보관하였다. 지금 일천여 년이 되었지만 판이 새로 새긴 것 같다. 날아가는 새도 이 장경각을 피해서 기와지붕에 앉지 않는다고 하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유가儒家의 경전은 비록 내부의 깊은 궐내에 있다고 하여도 날아가는 새가 집 위를 지나가지 않을 리가 만무하다. 불교 경전은 이와 같이 신기하니,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해인사 서북쪽이 가야산 상봉이다. 사면의 돌이 깎아지른 듯 하여 사람이 올라갈 수 없다. 산 위에는 평탄한 곳이 있을 것 같지만 알 수가 없다. 그 위에는 항상 구름기가 자욱하게 서려 있으며, 초동과 목동들은 가끔씩 산봉우리 위에서 풍악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또한 절에 있는 스님들의 말에 의하면 짙은 안개가 덮이면 산 위에서 말 발자국 소리가 날 때가 있다고 한다..”고 말한다.’ 이는 <택리지>의 기록이다. 조선중기의 학자였던 한강 정구(鄭逑)는 『가야산 기행』에서 ‘산꼭대기에 올라가 눈을 식히고 가슴을 펴보는 것’을 강조하였고, 산골짜기에서 푸른 물이 맑은 소리를 내면서 흘러가는 소슬한 경치를 보고 ‘가슴을 시원하게 씻겨준다.’고 느낌을 표현했다.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간직하고 있는 해인사는 통도사, 송광사와 함께 ‘삼보사찰’ 중의 하나이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대로 통도사에는 석가모니의 사리가 모셔져 있고, 해인사에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의 총화라고 할 수 있는 팔만대장경이 봉인되어 있으며, 송광사에서는 고려 이래로 국사를 지낸 열여섯 명의 고승들이 배출되었다. 그런 연유로 세 절을 각각 불보(佛寶)․법보(法寶)․승보(僧寶) 사찰로 꼽는데, 법보사찰인 해인사가 창건된 것은 신라 애장왕3년(802)이었다. 순응스님은 이 절을 세운 뒤 그의 증조스님인 의상의 화엄종지(華嚴宗旨)에 따라서 해인사라고 지었는데, 해인(海印)은 ‘세계 일체가 바다에 그림자로 찍히는 삼매’를 말하는 불교의 화엄정신을 나타낸다. 화엄종의 근본경전인 화엄경 곧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에 나오는 ‘해인삼매(海印三昧)’라는 말로, 이 화엄경의 세계관은 일심법계(一心法界)라고 할 수 있다. 온갖 것에 물들지 않은 진실과 지혜의 눈으로 바라본 세계가 일심법계인데, 일심법계에는 물질적 유기세계, 중생들의 세계, 바른 깨달음에 의한 지혜의 세계가 있는 그대로 다 나타난다. 세차게 불던 바람에 드높던 파도가 어느새 그치고 바다가 고요해지면 거기에 우주의 수만 가지 모습이 남김없이 드러나는 것, 이러한 경지를 해인삼매라고 한다. 해인삼매는 부처가 이룩한 깨달음의 내용이며, 일체의 것들이 돌아가야 하는 근원이며, 본래의 모습이다. ‘해인사’라는 절 이름은 바로 이러한 뜻을 지니고 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도는 어제보다 깊으나 앞산은 더욱 첩첩하고 <!--[if !supportEmptyParas]--> <!--[endif]--> 가야면 소재지에서 해인사 들목에 이르는 홍류동(紅流洞) 계곡은 봄에는 꽃으로 가을에는 단풍으로 물이 붉게 흐른다 하여 ‘홍류동’이라 이름이 붙었다. 해인사 들목까지 뻗어 내려온 이 골짜기는 그 언저리의 울울창창한 숲도 숲이지만 속세의 소리를 끊어버리기라도 할 듯이 우렁차게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유별난 정취를 안겨주는 곳으로 알져져 있다. 계절에 따라 진달래와 철쭉꽃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피어나고 녹음과 단풍의 계절 뒤엔 눈꽃들이 정취를 일깨워주며 두 개의 폭포와 푸른 소가 기암절벽에 어우러진 곳에 농산정이란 아담한 정자가 있다. 이곳에서 최치원은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농산정은 최치원이 살던 시대의 정자는 아니고 조선후기에 다시 지은 것이다. 최치원은 신라말엽인 857년에 태어났다. 열두 살 때에 당나라로 유학길에 올랐던 최치원은 그곳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냈다. 천재로 널리 알려졌던 그는 스물여덟에 귀국하여 신라에서 아찬이라는 벼슬을 받았지만 기울어져 가는 신라 조정의 어지러운 권세다툼에 환멸을 느끼고 벼슬자리를 그만두었다. 그는 지리산과 가야산을 비롯하여 나라 안의 산수가 좋은 곳들을 찾아다니며 유유자적하다가 38세에 가족들을 데리고 이 산에 들어왔다. 그 후 최치원은 어느 날 가야산에서 갓과 신만 남겨놓고 신선이 되어 홀연히 사라졌다는 이야기만 남겨놓았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이곳 해인사 일대는 고운 최치원에 얽힌 일화들이 많아서 해인사의 여관촌이 있는 치인리는 고운 최치원의 이름을 딴 ‘치원리’에서 비롯된 이름이라 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거창 위천의 수승대 <!--[if !supportEmptyParas]--> <!--[endif]--> 당시는 안의현이었다가 현재는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로 행정구역이 바뀐 강동마을에 정온의 고택이 있고 팔십이 넘은 종부가 그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곳에 가서 종부에게 들은 바로 정희량의 난 이후 정국에서 소외받은 그들은 같은 파벌끼리 혼사를 맺어 그 맥을 이어갔는데, 현재 정온의 종부는 경주에서 13대 만석꾼으로 이름난 최부자집의 큰 딸이고, 하회 유성룡의 종부는 둘째 딸이며 정온댁 종부의 시고모는 해남 윤선도 집으로 시집을 갔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요즘 재벌이나 정관계의 고위 인사들이 서로 얽히고 얽힌 혼맥을 보는 듯 했지만 혼맥을 통해서 파벌의 끈을 그렇게 이어갔다는 사실이 가슴을 먹먹하게 하였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옛 시절 안음현이었던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에 수승대(搜勝臺)가 있다. 밑으로는 맑은 물이 흐르고 조촐한 정자와 누대가 있으며 듬직한 바위들이 들어서 있는 수승대는 거창 사람들의 소풍이나 나들이 장소로 애용되는 곳으로, 이곳에 서린 이야기들이 많다. 거창군은 예로부터 지리적으로 백제와 맞붙은 신라의 변방이었기 때문에 항상 영토 다툼의 전초기지였다. 그래서 백제가 세력을 확장했을 때는 백제의 영토가 되기도 하였는데, 거창이 백제의 땅이었을 무렵, 나라가 자꾸 기울던 백제와는 달리 반대로 날로 세력이 강성해져 가는 신라로 백제의 사신이 자주 오갔다. 그때나 지금이나 강대국에 약소국이 느끼는 설움은 깊고도 깊어 신라로 간 백제의 사신은 온갖 수모를 겪는 일은 예사요, 아예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에서는 신라로 가는 사신을 위해 위로의 잔치를 베풀고 근심으로 떠나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잔치를 베풀던 곳이 이곳으로, 근심[愁]으로 사신을 떠나보냈다.[送]하여 ‘수송대(愁送臺)’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넓게 생각해 본다면 절의 뒷간이 ‘해우소(解憂所)’, 즉 근심을 푼다는 의미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처럼,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며 ‘근심을 떨쳐버린다’는 뜻이 수송대가 지니고 있는 본디 뜻이었을 것이고, 더 깊이 생각해 본다면 백제의 옛 땅에서 대대로 살아온 민중들이 안타깝고 한스러운 백제의 역사를 각색해 입에서 입으로 전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수송대에서 지금처럼 수승대로 바뀐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이다. 거창에서 널리 알려진 가문 중에 거창 신씨(居昌愼氏)가 있으며 그들이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사람이 요수(樂水) 신권(愼權)이다. 그는 일찌감치 벼슬을 포기하고 이곳에 은거한 채 학문에만 힘을 썼다. 수송대 앞의 냇가에 있는 거북을 닮은 바위를 암구대(岩龜臺)라 이름 짓고 그 위에 단을 쌓아 나무를 심었으며, 아래로는 흐르는 물을 막아 보를 만들어 구연(龜淵)이라 불렀다. 암구대 옆 물가에는 구연재(龜淵齋)를 지어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이곳을 구연동(龜淵洞)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냇물 건너편 언덕에는 아담한 정자를 꾸미고 자신의 호를 따서 요수정(樂水亭)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지금 남은 요수정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버린 것을 1805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어느 날 자연 속에 살던 그에게 반가운 기별이 왔는데, 아랫마을인 영송마을(지금의 마리면 영승마을)에서 이튿날 당대의 이름난 유학자인 이황이 찾아오겠다는 전갈이었다. 1543년 아직 이른 봄날, 정갈히 치운 요수정에 조촐한 주안상을 마련하고 마냥 기다리던 요수를 찾은 것은 퇴계가 아니라 그가 보낸 시 한 통이었다. 급한 왕명으로 서둘러 서울로 가게 된 이황은 다음과 같은 시를 보내고 떠났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수승(搜勝)이라 대 이름 새로 바꾸니 봄 맞은 경치는 더욱 좋으리다 먼 숲 꽃망울은 터져 오르는데 그늘진 골짜기엔 봄눈이 희끗희끗 좋은 경치 좋은 사람 찾지를 못해 가슴속에 회포만 쌓이는구려 뒷날 한 동이 술을 안고 가 큰 붓 잡아 구름 벼랑에 시를 쓰리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 시를 받아든 신권은 다음과 같은 화답을 보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자연은 온갖 빛을 더해가는데 대의 이름 아름답게 지어주시니 좋은 날 맞아서 술동이 앞에 두고 구름 같은 근심은 붓으로 묻읍시다. 깊은 마음 귀한 가르침 보배로운데 서로 떨어져 그리움만 한스러우니 속세에 흔들리며 좇지 못하고 홀로 벼랑가 늙은 소나무에 기대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두 사람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두 사람이 주고받은 시는 만남보다도 더 정에 겨웠다. 이황은 수송대라는 이름의 연원이 좋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수승대’라는 새 이름을 지은 것이며, 그때부터 이곳을 수승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우리 산하 편에서 <!--[if !supportEmptyParas]--> <!--[endif]--> 1. 일시: 2014년 8월 7일(목)에서 10일(일)요일까지, 3박 4일 2. 출발시간 및 장소: 서울 저녁 8시 30분, 양재역 12번 출구 국립외교원. 앞 출발 전주 저녁 11시 전주 종합경기장 앞 출발 3. 참가비: 18만원(입장료 포함). 선착순 90명 4. 어디로 가나요: 첫날(8일, 금), 통영 미륵산 용화사, 도솔암, 미륵산 정상, 미래사, 삼덕리 장군봉, 통영 이얏길, 남망산 공원, 옥천사, 해인사 도착 둘째 날, 가야산 산행(일부는 해인사 답사), 합천 소리길과 청량사, 월광사, 셋째 날: 거창 위천, 수승대, 동계 정온 고택, 금원산 가섭암, 5. 안내 도반: 신정일<새로 쓰는 택리지> 경상도 저자, 6. 신청방법: 댓글로 신청하고 참가비 입금해야 완료 7. 참가비 입금계좌: 국민은행 754801-01-479097 사단법인 우리땅걷기 8. 참가비 입금 후 취소 시 환불 규정 (1) 행사일 5일전 인지: 은행 수수료를 공제 후 전액 환불 (2) 행사일 4일전부터 3일전까지: 참가비 50%를 공제후 환불 (3) 행사일 2일전부터 당일까지(미참가 포함): 환불액 없음 위와 같이 행사 참여 취소 시 행사비 환불을 명심하시어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회비를 입금하시고 대기자로 기다리셨다가 참여를 못하시는 회원님들의 불편함을 없게 하고자 함이오니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9. 문의전화: 010-8954-2554 또는 010-9144-2564 10. 주의사항: 모든 걷기의 안전에 대해서는 참석자 본인이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카페나 진행자는 안전사고에 대하여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습니다. |
|||
'참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스마르크, 몰트케,룬 (0) | 2014.06.13 |
---|---|
하루가 이미 추억이 되어버린 저녁에 (0) | 2014.05.13 |
길을 잃어야 새로운 길을 찾는다 (0) | 2014.05.09 |
아픔 (0) | 2014.04.28 |
참극 (0) | 2014.04.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