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마르크, 몰트케,룬

2014. 6. 13. 13:10참고

<비스마르크의 독일 통일>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독일 북부를 지칭한 왕국, 영어로는 프러시아)의 재상으로 독일 통일을 이끈 총리가 되고  첫 연설에서
"오늘날의 중대한 문제는 연설이나 다수결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다.
오로지 鐵과 血로써만 해결할 수 있다"라고 말하며 이른바 철혈정책을 내세웠다.

철혈정책의 鐵은 무기를, 血은 전쟁을 통해서 흘리게 될 군인들의 피를 뜻한다.
즉 군대를 동원해 전쟁을 일으켜 통일을 쟁취하겠다는 뜻이다.
당시 독일은 39개의 작은 나라들로 쪼개져 있었으며, 영국이나 프랑스, 러시아보다 약소국으로 남아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이 통일되어야 유럽의 다른 강국들과 대등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끊임없이 군대를 양성하던 비스마르크는 덴마크의 슐레스비히와 홀스타인 지역이 덴마르크로부더 독립운동을 일으키자 오스트리아와 함께 이 지역의 독립을 지원했다.
3년에 걸친 덴마크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이 지역들에 대한 처분문제로 다시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일으켰다.
1866년 7주에 걸친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은 마인 강 북쪽에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하는 북독일 연방을 결성했다.

이러한 프로이센의 움직임에 프랑스는 위기감을 느꼈고, 비스마르크 역시 독일이 서유럽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와 맞부딪힐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결국, 1870년 7월 19일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잘 훈련된 프로이센 군대는 빠르게 프랑스로 진격했다.
미쳐 전쟁을 준비하지 못한 프랑스는 패배를 거듭했고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히고 파리를 함락당하는 치욕을 당했다.

이 전쟁의 승리로 프로이센은 알자스, 로렌 지방을 얻게 되었으며, 프랑스는 프로이센에 50억 프랑에 달하는 전쟁 배상금을 물게 되었다.

이로써 프로이센은 유럽의 신생 강국으로 부상했으며, 전쟁 중이던 1871년 1월 18일 프랑스의 베르사유궁전에서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를 황제로 한 독일제국이 선포되었다.
이것이 최초의 독일 통일이다.
<서진근 편저 UN 192 회원국 다이제스트 중에서>

 

<베르사이유 조약>

베르사이유 조약은 1919년 6월 28일 프랑스 파리 근교에 있는
Versailles(베르사이유)궁전의 겨울의 방에서 조인한 평화협정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마무리를 위해 연합국과 독일 사이에 체결되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중인 1871년, 독일의 빌헤름 1세는 베르사이유 겨울의 방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고 독일의 통일을 선포했다.
또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서유럽의 패권은 프랑스에서 독일로 넘어갔으며, 독일은 프랑스가 가지고 있던 알자스, 로렌 지방을 차지했다.
이 때 까지 베르사이유 겨울의 방은 독일인 들에게 승리의 장소였다.

그러나 독일은 1919년 6월28일, 통일 독일통일을 선포했던 바로 그 겨울의 방에서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으로 베르사이유 조약에 서명하게 된다.
연합국의 대표들, 특히 1871년 독일에 패한 경험이 있는 프랑스는 독일에게 가혹한 보상을 요구했다.
독일은 알자스, 로렌 지방을 다시 프랑스에 반환했으며, 독일의 해외 식민지는 영국과 프랑스, 일본이 나눠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혹했던 것은 배상금 문제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독일의 병력을 대폭 축소시키는 한편 전쟁으로 인한 손실을 모두 독일이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1년 소집된 특별위원회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액을 330억 달러로
잠정 집게해내고 독일에게 전액 보상을 요구했다.
이는 독일로써는 도저히 갚아낼 수 없는 금액이었으나 연합국 측은 독일이 무슨 일이 있어도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합군 측의 이러한 태도는 독일이 착실히 전쟁복구를 하느대신 배상을 포기하고 연합군 측에 반발하게 되는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결국 독일은 1930년대 군국주의로 돌아섰고, 히틀러라는 독재자가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서진근 편저 UN회원국 다이제스트에서>

 

 

몰트케 백작( Helmuth von Moltke the Elder,1800-1891)

 

프로이센 왕국의 군인, 군사학자. 육군참모총장으로, 덴마크와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해서 독일통일에 공헌했고, 비스마르크 수상(Otto von Bismarck, 1815-1898, 1862-1890년간 수상재임. 공작의 작위를 받음), 룬 백작(Albrecht Theodor Emil Graf von Roon, 1803-1879)과 함께 독일제국(1781-1918) 건국의 영웅 3명 중 하나로 불리는 사람입니다. 나중에 제1차대전 개전시까지 독일군 참모총장(1906-1914년)을 한 조카 소 몰트케(Helmuth von Moltke the Younger,1848-1916)와 구분하기 위해 대 몰트케(Moltke the Elder)라고도 불리기도 합니다

 

그는 휘하의 군인(부하, )들의 유형을 그들의 정신적 및 육체적 특성(mental and physical characteristics)에 따라서  4가지로 분류했다.

유형 A: mentally dull and physically lazy (멍게형) - 중간형. 군대에서 높은 위치까지 승진은 할 수도 있음.

유형 B: mentally bright and physically energetic (똑부형) - 훌륭한 리더는 아님. 지휘보다는 시키는 일을 제대로 하는 위치. 중간급 장교(관리자)  

유형 C: mentally dull but physically energetic (멍부형) - 군대에서 내쫏아야 되는 유형

유형 D: mentally bright and yet physically lazy (똑게형) - 군대 최고 위치(지휘관)이 될 수 있는 유형

 

 

론 [ Roon, Albrecht Theodor Emil von ]

플로이샤겐 출생. 1821년 군에 입대하여 1859년 중장으로 승진하였고, 군제개혁위원회에 참여하였다. 1859년 말 육군장관이 되었으며 참모장 H.K.B.몰트케 등의 지원을 받아 군제(軍制)개혁을 추진하여 군의 근대화에 주력하였고,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제징병제를 확충하였는데, 이것이 1866년의 대(對)오스트리아전쟁 및 1870∼1871년의 대(對)프랑스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1861~1871년 해군장관을 겸하였고, 1871년 백작, 1873년 원수(元帥)가 되었다.

또 비스마르크의 뒤를 이어 프로이센 총리가 되었으나, 1873년 11월 건강 때문에 사임하였다. 보수적인 국가주의자로 비스마르크, 몰트케와 함께 독일제국 건설의 3걸로 일컬어진다. 저서로 《지리학 ·민족학 및 정치학 초고 Grundzge der Erdkunde, Vlkerkunde und Staatenkunde》(3권, 1847∼1855)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