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6. 16. 13:53ㆍ참고
노고단을 거쳐 뱀사골을 가고 지리산 자락을 거닐다.
노고단을 거쳐 뱀사골을 가고 지리산 자락을 거닐다.
갑오년 여름에 지리산을 갑니다. 성삼재에서 노고단을 거쳐 뱀사골로 이어지는 길, 그리고 마천에서 함양으로 이어진 지리산 둘레길과 함양 상림이 에정되어 있어 민족의 성산 지리산의 속살을 걷는 길입니다.
“한국의 명수(名水)로 잘 알려진 지리산 뱀사골은 마음까지 깨끗이 해주는 청정 지역이다. 지리산 깊은 산기슭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줄기가 거침없이 쏟아지고 주변을 에워싼 푸른 산림이 맑은 공기를 더한다.
뱀사골은 많은 도보 여행객이 찾는 만큼 구간도 잘 정비되어 있다. 뱀사골 계곡에서 시작해 요룡대를 지나 뱀소, 병소, 병풍소, 간장소를 잇는 구간 동안 짙푸른 녹음이 가득해 걷는 내내 눈이 즐겁다. 계속 걷다 보면 구름도 쉬어 간다는 와운 마을과 마주하게 된다. 와운마을에는 천연기념물 제424호로 지정된 천년송이 우직하게 마을을 지키고 있다.”
이렇게 모 신문(매일경제)에 실려 있는 뱀사골은 길이가 14km에 이르는 긴 골짜기로 긴 여름을 견디어 내는 촉매제로 작용할 것입니다.
다음 날은 마천에서 함양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둘레길과 함양 상림에서 푹 쉬었다가 돌아올 이번 여정에 참여바랍니다.
『택리지』에 실린 지리산(智異山)의 기록을 보자.
‘지리산智異山은 남해南海 가에 있는데, 이곳은 백두산의 큰 산줄기가 끝난 곳이다. 그런 까닭에 이 산의 다른 명칭을 두류산頭流山이라고 한다. 세상에서는 금강산을 봉래산蓬萊山이라 하고, 지리산은 방장산方丈山이라 하며, 한라산을 영주산瀛洲山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삼신산三神山이다.〈지리지地理誌〉에는 지리산을 태을성신太乙星神이 사는 곳이며, 여러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하였다. 계곡이 서리어 뒤섞였고 깊고 크다.
지리산은 남해 가에 있는데 이는 백두산의 큰 줄기가 다한 곳이므로 산의 다른 이름이 두류산이다. 세상에서는 금강산을 봉래산, 지리산은 방장산, 한라산을 영주산이라 하는데, 소위 삼신산이다. 『지지(地誌)』에는 지리산을 태을선인(太乙仙人)이 사는 곳이며, 여러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한다. 계곡이 서리어 뒤섞였고, 깊고 크다.’
지리산은 백두산에서 비롯된 백두대간이 끝맺음 되는 산으로 높이는 1915미터, 산의 둘레는 8백여 리에 달한다. 전라북도‧전라남도‧경상남도 등 세 개 도와 남원시‧구례군‧하동군‧산청군‧함양군 등 다섯 개 군에 걸쳐 있는 산으로 총 면적이 438.9평방킬로미터에 이른다. 동북쪽에 있는 주봉인 천왕봉(1915m)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칠선봉(1586m)‧덕평봉(1522m)‧명선봉(1586m)‧토끼봉(1534m)‧반야봉(1732m)‧노고단(1507m) 등과 동쪽으로 중봉(1875m)‧하봉(1781m)‧싸리봉(1640m) 등의 높은 산들로 이루어진 이곳 지리산은 노고단에서 천왕봉에 이르는 주능선만 해도 42킬로미터쯤 된다. ‘지리’는 원래 산을 뜻하는 ‘두래’에서 유래된 말인데, 두류산‧백두산에서 흘러내려 이루어진 산이라고 설명하는 사람도 있다.
서산대사 휴정은 이곳 지리산을 웅장하나 수려함은 떨어진다고 표현했지만 이중환은 지리산을 전국의 12대 명산 중의 하나로 꼽았다.
풍년과 흉년을 모르는 산 지리산
이중환의 <택리지>는 다시 이어진다.
“흙의 성질이 두텁고 기름지므로 온 산이 모두 사람이 살기에 알맞은 곳이다.
산 속에는 백리나 되는 긴 골짜기가 많은데, 바깥쪽은 좁지만, 안쪽은 넓기 때문에 가끔 사람이 발견하지 못한 곳도 있으므로, 나라에 세금稅金도 바치지 않는다.
땅이 남해에 가까워 기후가 따뜻하므로 산속에는 대나무가 많고, 또 감과 밤이 대단히 많아서 가꾸는 사람이 없어도 저절로 열렸다가 저절로 떨어진다.
높은 산봉우리 위에 기장이나 조를 뿌려 두어도 무성하게 자라지 않는 곳이 없다. 평지의 밭에도 모두 심을 수 있으므로 산 속에는 촌사람과 섞여서 살아간다.
스님이나 속인들이 대나무를 꺾고, 감과 밤을 주워서 살기 때문에 수고하지 않아도 생리生利가 족하다.
농부와 공인들 역시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도 모두 충족하게 살아간다. 이런 까닭으로 이 산에 사는 백성들은 풍년과 흉년을 모르고 지내므로 부산富山이라고 부른다..’
이중환의 말처럼 지리산은 수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육산이다. 그래서 조용헌 선생은 골산(骨山)과 육산(肉山)을 빗대어 ‘사는 것이 외롭다고 느낄 때는 지리산의 품에 안기고, 기운이 빠져 몸이 쳐질 때는 설악산의 바위 맛을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남원의 동쪽에 자리 잡은 지리산이 『신증동국여지승람』 ‘산천’ 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지리산은 부의 동쪽 60리에 있다. 산세(山勢)가 높고 웅대하여 수백 리에 웅거하였으니, 여진 백두산의 산맥이 뻗어내려 여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두류(頭流)라고도 부른다. 혹은 백두산의 맥은 바다에 이르러 그치는데 이곳에서 잠시 정류하였다 하여 유(流)자는 유(留)로 쓰는 것이 옳다 한다. 또 지리(地理)라고 이름하고 또 방장(方丈)이라고도 하였으니, 두보(杜甫)의 시 「방장삼한외(方丈三韓外)」의 주(注)와 통감(通監) 집람(輯覽)에서 ‘방장이 대방군의 남쪽에 있다.’한 곳이 이곳이다. 신라는 이것으로 남악(南岳)을 삼아 중사(中祀)에 올렸다. 고려와 본조에서도 모두 이에 따랐다. 산 둘레에는 십 주(州)가 있는데, 그 북쪽은 함양이요, 동남쪽은 진주(晋州)요, 서쪽에는 남원이 자리 잡고 있다. 그 기이한 봉우리와 깍은 듯한 절벽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 동쪽은 천왕봉과 서쪽의 반야봉(般若峯)이 가장 높으니 산허리에 혹 구름이 끼고 비가 오며 뇌성과 번개가 요란해도 그 위 산봉우리는 청명하다. 해마다 가을 하늘이 높으면 새매가 북쪽에서 모여드는데 열군(列郡)의 사람들이 다투어 그물을 쳐서 잡는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태을(太乙:북극의 신)이 그 위에 살고 있으니 많은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며, 용상(龍象)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도 한다.’
지리산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숨어들었던 곳이다. 조선중기 이후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에는 지리산에는 병년과 흉년이 없는 피난 보신의 땅을 찾는 정감록을 믿는 사람들이 찾아들었고,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뒤에는 혁명을 꿈꾸다 실패한 동학도들이 찾아와 후일을 도모하기도 했다. 그들은 지리산에 들어와 1차‧2차‧3차 의병전쟁의 주역이 되었고, 진주 형평사운동(衡平社運動:1923년 진주에서 일어난 백정의 신분해방운동)을 배후조종하기도 했다. 그들 중 김단야 같은 사람은 조선공산당을 만들기도 했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이 지리산에 들어와 수없이 죽어가고 포로가 된 비운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누군가의 말처럼 한국의 지리산은 스페인내전 당시 파르티잔들이 활동했던 무대와는 판연히 달랐는데도 지리산으로만 가면 살 길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수없이 들어왔다가 실패하고만 한이 서린 산이다. 지리산은 한민족의 어머니와도 같은 산, 그 이상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산이 민족의 성산(聖山)이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우리 산하 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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