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3. 9. 22:09ㆍ백두대간
일시-2016년 3월8일 화요일 흐리고 바람붐
장소-백두대간 마패봉 부봉구간 북진
코스-고사리 주차장-조령3관문-마패봉(927m)-북암문-동암문-부봉 삼거리-부봉(935m)-부봉 삼거리 회귀
-주흘산 갈림길-평천재-탄항산-하늘재(525m)
백두대간 9.3km+접속구간 2.2km=11.5km 5시간50분 걸림
봄을 제촉하는 비가 내리고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절기인 경칩도
넘어갔다.
코끝으로 뜨듯한 봄기운이 들어와 봄나물인 씀바귀 냉이와 여린 머위의 쌉쓸한맛을
혀끝에서도 부르는것을 보니 계절은 귀신같이 변하고 있었다
이십여일간의 봄맞이 긴 몸살도 어느덧 사라져 갔다
삼월 둘째 화요일 백두대간길 이어나가는 날이 돌아와 상하의 내의를 모두 벗어 버리고
가쁜한 몸으로 길을 나섰다
하늘재로 내려왔던 지난번과 연결하기 위해 이번에는 조령문에서 북진으로 올라
하늘재로 내려오는 코스이다.
들머리인 조령산 자연휴양림 고사리 주차장에서 2.2km 떨어진 조령3관부터 대간길로
이어진다.
애초에 계획했던것은 남진인데 걷기 편한 방향으로 길을 선택하다보니
어떨때는 남진 어떨때는 북진 위 아래 뒤죽박죽이다
집에 와서 지도를 봐야 걸은길과 앞으로 걸을길이 이해가 되니
이제 간신히 한반도 등줄기을 알아가는 초보인셈이다
조령산까지 걷는길은 자연 휴양림으로 조성된 소나무길이 무척 아름답다
몇년전 문경 새재에 들러
영화촬영소와 주흘관 조곡관을 거쳐 조령관까지 걸어왔다가
다리아파 무작정 내려가던 자가용을 얻어타고 내려갔던 곳이건만
벌써 가물가물하다
완만한 아스팔트 오르막길을 올라 조선시대 가장 큰 고개였다는 문경새재의 고갯마루인
조령3 관문인 조령관에 도착했다
새재는 낙동강 문화권과 남한강 문화권을 연결하는 길목으로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부산까지
영남대로중 가장 컸다
한양과 영남의 관문인 고개로 영남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오던 과거길이었다
일제 강점기때 신작로가 건설되기전까지 새재는 오백년동안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소통의 주축이었다
또한 새재는 군사적 전략적 요충지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을 어디서 막을지 고민하던 조선은
신립을 총사령관으로 세웠다
의병장 신충원은 제2관문에서 성을 쌓고 왜병을 기습하여 큰 타격을 입혔으나
함경도 변방에서 용맹을 떨치던 신립장군은 험준한 조령과 충주평야를 두고 고민하다
조선 최고 정예부대인 기마병을 이끌고 충주 달천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넓은 평지에서 전투준비를 하였다
습지대인 평지가 전날 내린비로 진흙탕이 되었고 기마병은
진흙탕속에서 북진하는 왜군에게 전멸당했다.
백두대간의 조령산과 마패봉 사이에 있는 고개가 조령 새재이다
그 어원은 '새도 날아서 넘기 어렵다는 고개' 또는'억새풀이 우거진 고개'라는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하늘재와 이우리재 사이에 있다고 해서 새(사이)혹은 새로 된 고개라서
새재라고 한다
조선 숙종 34년인 1708년 관문을 쌓아 그것이 오늘의 제1관문 2관문 3관문이다
잊혀졌던 새재는 1970년대에 유적지로 복원되었다
제1관문인 주흘관 2관문인 조곡관 3관문인 조령관과 김주영 소설인 '객주'의 무대로
문학 기행방문지인 객사가 있던 조령원터와 국밥 한그릇에 시장기와 여독을 풀던 주막과
경상감사가 업무를 본 교귀정등이 복원되었다
요즘은 걷기 좋은 역사의 옛길을 조성하여 많은 관광객을 부른다
그러고 보니 조곡천의 징검다리와 조곡폭포 그리고 드라마 태조왕건에서 궁예가
마지막칼을 받았던 너럭바위등이 인상 깊었던게 생각났다
조령관을 넘었다
조령관의 남쪽은 경북 문경이고 북쪽은 충북 괴산이다
빗물이 조령관 북쪽 지붕에서 떨어지면 남한강에 흐르고 남쪽 지붕에서 떨어지면 낙동강물이
되어 흐른다는 얘기다
주흘관과 조곡관은 남쪽에서 침입한는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성문이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조령관은 북쪽을 향하고 있다
북쪽에서 침입하는 오랑캐를 방어하기 위함이다
홍건적의 난으로 문경에 피신왔던 공민왕은 새재에서 개경이 수복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광복을 예감한 역술인 이달은 조곡관에 올라 해방의 소식을 들었단다
조령 약수터와 군막터를 지나 산성터옆으로 걸어 마패봉으로 가는길은
오르막이다
작은 암봉길에는 어김없이 밧줄이 달려 있었다
바위좀 탄다하는 사람들은 바위만 나오면 환호성을 지르고 좋아라 하면서
힘도 들이지 않고 쓱쓱 잘도 올라 서 있더만 나는 밧줄만 나오면 밧줄 잡기도 전에 먼저
팔에 힘이 들어가 있어 긴장이 된다
사십여분을 올라 마패봉에 도달했다.
마패봉 정상석은 산악회에서 만들어놓은 작은표지석까지 두개였다
927m의 마패봉은 경북 문경과 충북의 괴산의 경계를 이루는 봉우리이다
어사 박문수가 이산을 넘으면서 이곳에 마패를 걸어놓고 쉬었다는데서 유래되어
경북에서는 마패봉으로 불리고 충북에서는 마역봉으로 불리고 있다
충북의 충주와 괴산 경북의 문경의 세고을이 만나는 마패봉은 봉우리 정상에서
가까이 신선봉 봉우리와 멀리 조령산 산줄기가 넘실댔다
마패봉을 벗어나 가파르게 내려서면 북암문이 나오고 다시 오르락 내리락 동암문까지
3.3km는 무너진 산성 흔적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동암문에서 0.5km를 더 가면 부봉 삼거리가 나온다
바위길을 계단과 밧줄을 잡고 올라서니 드디어 부봉이 나온다
커피 한잔만으로도 날 밤을 새우는 카페인에 예민한 내가 매번 대간길 나설때마다
박카스 한병을 조금씩 나눠 마시면서 힘을 내는데 얼마남지 않은 마약을 탈탈 털어 마시고
밧줄 타기를 했다
오르막보다 내리막에서 팔 다리는 더 떨렸다
935m의 부봉은 포함산과 하늘재를 지나 문경새재에 접어들기전의 봉우리로
주흘산에서 부봉1봉에서 6봉을 거쳐 동화원으로 가늘길과 동암문과 북암문을 거쳐
마패봉으로 가는길의 두갈래가 있다
어렵게 올라선 부봉을 다시 내려와 부봉삼거리로 회귀하여 1km를 더 가면
철계단길을 걸어 주흘산 갈림길을 지나고 평천재까지는 기이한 바위와
소나무의 풍경에 감탄하여 시간가는줄도 모르게 걸었다
평천재는 예전에는 경북 문경쪽의 평천리에서 평천재를 거쳐 충북 미륵리로 연결하는
고개였단다
새재를 벗어난 대간길은 평천재를 지나 탄항산까지는 완만한 능선길이다.
능선길에는 꽃멍울을 품은 사람키보다 큰 진달래가 많았다
월항 삼봉의 856m의 탄항산은 충주시 상모면에 위치한 월항삼봉 뾰족한 봉우리 3개가
나란히 서 있어 삼봉이라 부르기고 하고 삼이 많이 나와 삼봉이라고도 하고
탄항은 변방 국영을 지킨다는 의미가 있고 이 정상에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던
군사적으로 요충지였다
복원되지 않은 옛산성길을 걸어 966봉을 지나고 날머리가 바로인데
오후 다섯시까지 약속된 시간은 아직이다
그동안 걷기 바빠 점심 먹기 위해 잠깐의 휴식외에는 쉴틈없이 걷기만 하여도
항상 꼴찌를 못 면하던 내가 일행들과 담소를 나누며 걸을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벼락맞아 죽은듯 시꺼멓게 멍든 나무 한그루가 대간길목에서 처연하여 이리저리 눈길을 보내고
사람보다 어마어마한 바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바위에 달싹 들러붙어 기대보고
만져 보아도 변함없는 그 위력에 놀라 나보다 약한것은 아무것도 없는거 같다.
최대한 가벼운 베낭에 가벼운 신발을 신어도 한번씩 대간길을 걷고 나면 다음날까지
아고고 곡 소리가 절로나서 일행중 가장 저질체력이라는 남편말을 부정할수 없다
지난번에 이어 새로산 무거운 신발을 신고 걸으니 걷는길은 얼마 안되어도
신발밑에 붙은 흙더미와 함께 걸어가고 있는지 천근만근 무겁다
마침내 오늘의 날머리인 하늘재로 내려 오려는데
아직 끝나지 않은 산불방지 감시구역이라 감시원들의 퇴근시간까지 모래산에 숨어 있었다
그 많은 전나무와 상수리나무들은 바로옆에 서 있건만 풀 포기하나 없이 흰모래만 쌓인
작은 언덕이 있어 모래산이라니 신기했다
한시간이나 일찍 내려온탓에 거위털을 입고도 쌀쌀한 바람탓에 몸이 움추려 들었다
하늘재는 삼국시대에 이어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까지는 영남과 기호지방을 연결하는
일명 계립령또는 대원령이라 불리는 고개로 우리나라 최초의 신라의 고갯길로
죽령보다 이년 먼저 열렸다
동쪽은 문경의 관음리와 서쪽은 충주의 미륵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며
관음세계에서 미륵세계로 이어지는 해탈의 고개라고도 한다
신라의 8대 아달라왕이 북진을 위해 죽령과 조령사이 가장 낮은곳에 길을 개통한 이후로
계립령은 삼국의 북진과 남진의 통로였기에 서로 차지 하려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군사 요충지였다
신라는 이곳 계립령을 경계로 한강유역 진출이 가능했고 고구려와 백제의 남진을 막았다
고구려 온달장군은 계립령과 죽령서쪽을 빼앗지 못하면 돌아가지 않겠다며 출사표를 던지고
후삼국시대 궁예가 상주를 칠때도 이고개를 넘었단다
망국의 한을 품은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이고개에서 쉬어갔고
고려시대에는 공민왕이 홍건적의난을 피해 피난갔던 고개이다
조선에 이르러서는 태종14년(1414)에 지금의 문경새재인 조령이 뚫리면서
옛고개로 잊혀지게 되었다
이천년의 장구한 역사를 지닌 고개아래 마을에는 회황색 사토인 고운흙과 물과 불을 함께한
공기 청정 자연조건으로 도자기인 분청사기가 유명하다
해발 525m 고도의 하늘재로 내려오니 지난번 걸었던 허연 속살을 드러내는 포암산이
바로 앞에 떡 버티며 바라보고 하늘재의 표석이 그동안 어떤 표석보다도 멋지게 위풍당당했다
흐릿한 하늘아래 하늘재 언덕에서 지난 겨울 잎 떨어지고 등허리가 시렸던 나무들의
수런스런 소리가 들려오고 봄이 오는 달큼한 흙냄새를 맡았다
산길에서
찬 겨울 긴 고개 넘어
벼슬길 찾아 떠나는데
까악까악 까마귀도
하늘 아래 길 찾아 떠나가네
깊은 산 긴 고개 넘어
탁주 한 사발 들이키고
바람 따라 걸어가면
나 뒹구는 낙엽도 길손이네
이산 저산 산길에서
온몸에 길이 스며들어
늙어서도 초록으로
세상길과 소통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