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4. 8. 13:43ㆍ백두대간
일시-2016년 4월5일 화요일 맑음
장소-백두대간 희양산 구간 남진
코스-분지리 안말-사다리재-곰틀봉-이만봉(990m)-베너미 평전-희양산갈림길-희양산(998m)-암릉길
-지름티재-구왕봉(879m)-마당바위-호리골재-은티마을로 하산
백두대간 8.8km+접속구간 4.6km+희양산 왕복 1.0km=14.4km를 7시간30분걸림
일년중 날이 가장 맑은 청명이 가고 찬음식을 즐겨도 되는 한식이 오자
절기는 완연한 봄을 맞았다
대간버스는 그동안 꽃샘추위에 떨고있던 꽃들이 한꺼번에 피우고 있는 도로를 지났다
괴산군 영풍면 분지리 저수지를 지나 좁은 강둑을
이리저리 돌다 다른길로 가는 바람에 후진과 직진을 자유자재로 하는
신기한 운전솜씨로 깊숙한 마을인 안말 농가 입구에서 일행을 풀어 놓는다.
대간길 걸으면서도 까딱하면 알바를 수시로 하는 판국이고
살다보면 인생자체가 실수의 드라마인것에 비하면 왔던길 돌아 나오는
몇분간의 실수쯤이야 애교나 다름없다
지난주에 이어 두번째로 방문한 마을의 한적함은 그대로였고
하늘을 맑고 생각보다 날씨는 더웠다
사다리골로 흐르는 계곡물 소리에 마음을 빼앗겨 한눈을 팔다보면
일행을 놓치므로 오직 대간길에만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데
방광 비우라고 들려오는 졸졸졸 소리로 또 꼴찌를 못 면하게 생겼다.
계곡을 지나쳐 사다리재까지 2.0km가파른 오르막을 초반부터 숨고르기를 하지 않고
힘자랑 하며 올랐다가는 정작 대간길 걸을때는 지치고 만다는것을 알기에
서두르지 않았다
익숙한 두번째 길임에도 어째 지난주보다 더 다리가 무겁다
흙길과 작은 바위 너덜지대를 올라 드디어 사다리재로 올라섰다
사다리재에서 고사리밭등을 지나 백화산으로는 북진이고
오늘 걸어나갈 이만봉으로는 남진구간으로 이어진다
이만봉 방향으로 가는길도 오르막이다
사다리재 주변인 고사리밭등을 지나고 곰잡는 틀을 놓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
곰틀봉은 소나무에 곰틀봉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물론 옛날에는 천미터 첩첩산중에 곰뿐 아니라 호랑이라도 살고도 남았을것이다
허기사 곰이 뛰어 다닌다면 대간길을 동네 뒷산 가듯 걸어다니는 사람들이 없겠지만
지리산에 방사된 곰새끼 한마리는 커녕 이제 백두대간 어느길에서도
곰이나 호랑이를 보았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질 못했다.
일제의 야혹에 맞선 조선의 자존심인 지리산 산군 호랑이를 그린 영화'대호'에서도 보았듯
일본놈들은 우리의 온산에 쇠말뚝을 박아 조선의 얼과 혼을 빼내고
해로운 짐승을 없앤다는 명분으로 해수제거정책을 써서 온산의 짐승들을
마구잡이 박멸을 하여 백두대간을 안방으로 여겼던 많은 짐승들이 사라졌다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워 상춘객들로 붐비는 산아래와는 달리 대간 능선 높은길에는
고개를 숙여야 자세히 볼수있는 노랑제비꽃과 현호색같은 작은 꽃들이 먼저 피워
대간꾼들을 반겼다
곰틀봉에서 다시 십오분여를 걸으면 이만봉(990m)이 나온다
이만봉은 황학산 백화산 희양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의 봉우리로 옛날 만호라는
무신 벼슬을 한 이씨가 이곳에 살았다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백화산과 희양산 중간에
위치한다
이만호골이 시작되는 도막은 임진왜란당시 도원수 군율이 군막을 쳤다 해서 붙여진 지명이고
임진왜란때 이만여명이 피신했다고 전해진다
이만봉에서 마당바위와 용바위를 지나 시루봉 갈림길에 도착했다
이만봉과 시루봉 못가서 968봉인 베너미평전에서는 대간꾼들이 야영을 주로 하는 곳이다
시루봉(914.5m)는 소백산맥 능선에 속하며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와 문경시 가은읍의
경계가 된다
동쪽으로는 이만봉과 백화산이 서쪽으로는 희양산과 구왕봉의 봉우리가 연결되어 있으나
시루봉 봉우리는 대간길에서는 벗어나 있다
점심요기를 한뒤 희양산으로 전진하는데 이킬로쯤 걸으면 신라의 옛산성인
희양산성터가 나온다
희양산성은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봉암사 뒷산인 희양산 정상 주위에 있는 석성으로
동국여지 승람에는 "가은현 북쪽 15리에 옛성이 있으니 삼면이 모두 석벽이며
옛 군창이 있었다."라고 하였으며 증보문헌비고에는 "희양고성은 가은폐현의
북쪽15리에 있는데 삼면이 모두 석벽이다."라고 쓰여있다
삼국말기에 신라 경순왕이 이성에서 견훤과 싸웠다고 한다.
신라말기의 장군이자 후백제의 시조인 견훤은 성은 이씨로
아자개의 첫째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탄생비화는 밤마다 정체불명의 사나이가 처녀의 방에 동침하고
아침이면 사라졌다
사나이의옷에 바늘을 꿰어 실을 따라가보니 멀지 않은곳에 바늘에 찔려
죽은 뱀이 있었는데 그후 처녀가 임신하여 낳은 아들이 견훤이란다
견훤은 현재 전주인 완산주에 들어와 후백제를 세우고 꿈을 키웠으나
오천년 역사속에 단 삼십여년 꿈틀하다 후고구려의 궁예와 왕건과
여러차례 전쟁을 일으키고 왕건에게 멸망하였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말처럼 그후 전주 완산은 조선왕조의
개국의 불씨가 되었다
희양산 갈림길에서 희양산 정상까지는 오백미터 암릉 바위길이다
소나무와 큰 바위들을 지나면 음기가 센 마을에 바락이라도 하듯 충만한 양기로
우뚝 솟은 희양산이 나온다
희양산(998m)는 충북 괴산군과 경북 문경시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정상은 백운대라하고 동서남 삼면이 화강암 암벽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돌산이다.
북한산인 삼각산의 세봉우리인 인수봉 노적봉에 이어 최고봉인 봉우리도
화강암 덩어리인 백운대이다
암봉들이 마치 열두판 꽃잎처럼 펼쳐져 있으며 그 중심에는 봉암사절이 있다
산세가 험해 한말에는 의병의 본거지 였다
서쪽으로 휘어진 백두대간 줄기에 우뚝솟은 신령스런 암봉을 보고 옛사람들은
갑옷을 입고 무사가 말을 타고 앞으로 나오는 형상이라고 했단다
오르기도 힘겨웠던 희양산 정상에 서서 좌우 앞뒤를 돌아봐도 푸른산들이 출렁출렁
춤을 추고 있었다
힘겹게 밧줄잡고 오르내렸던 조령산이 손에 잡힐듯 조망이 끝내주는 산이다
힘들게 오른만큼 파노라마로 펼쳐진 풍광으로 가슴이 뻥 뚫린다
희양산 절벽으로 떨어진 한낮의 봄햇살이 날카롭게 내 눈을 찌르고
졸고 있는 산새들을 깨운다
거대한 절벽의 산위에서 작은 내 몸 하나가 산새나 다름없는 자연속의 일부다
험한 바위위에서 쩔쩔매는 나보다 훨훨 날아 보란듯이 봉우리를 넘나드는 산새가
이곳에서는 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돌덩이에 돌덩이를 이고 있는 바위길은 발바닥에 잔뜩 힘을 주어졌다
살금거리며 올랐던 길을 되돌아 갈림길까지 내려와
다시 지름티재로 내려가는 도중에는 수직 절벽의 암릉구간이 나온다
그동안 오르고 내려왔던 로프보다는 가장 긴 로프가 매달린 하강구간으로
남은 힘을 모두 모아 긴 로프를 내려오니 팔다리가 후둘거렸다
그래도 다시 걸어야 된다
희양산에서 1.4km떨어진 지름티재에 도착했다
지름티재(640m)는
연풍과 가은을 넘나드는 최단거리 지름길이라 붙여졌다고 하고 또는
희양산과 구왕봉으로 오르는길이 기름의 사투리인 지름을 칠해
놓은것처럼 미끄럽다 하여 지름티재라고 부른단다
오래된 무덤과 봉암사 출입금지를 알리는 표지가 있는 지름티재에서
은티마을까지는 한시간여면 내려가는길이 있으나 오늘의 대간길은
구왕봉과 주치봉을 찍고 내려가야 해서 구왕봉으로 향했다
희양봉에서 사진찍고 구경한다고 시간 소비를 많이 한탓에 발길을
제촉해야만 했다
구왕봉 가는길 좌측으로는 목책이 세워져 있었다
어릴때 땅따먹기 하면서 내 땅되면 금 그어 놓고 하던 놀이가 있었는데
자기네 땅 밟지 말라는듯 자비를 베풀어야할 절 인심이 야박하다
예전에는 암자에서 나온 스님들이 지키고 서서 출입을 막았다는 얘기에
분노하지만 자비로 다스려야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수긍해야만 한다
지름티재(640m)에서 구왕봉(879m)까지 0.7km는 고갈된 체력으로
어떻게 구왕봉에 올랐는지 모를 정도로 팔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러다 삐끗하면 사고로 이어지겠지 하면서도 기력 딸리면 보충하러 매번 들고 다니던
비상 꿀병을 꺼내 먹을 겨를도 없었다 아직 부족한 대간꾼이다
구왕봉 정상석은 아주 작다
쉬어가라 날갯짓하는 잎 틔우는 가지에 눈길한번 주지못하고 발걸음을 떼야하는
아쉬움이 컸다.
지증대사가 심충이란 사람의 권유로 현 봉암사 자리를 사찰자리로 정하고
그자리에 있던 큰 못을 메우려 하는데 거기에 용이 살고 있었다
지증대사는 용을 쫓아내고 봉암사를 세웠다
용이 뒷산으로 올라갔기에 그 산을 구룡산이라 부르다가
지금은 구왕봉이라 부른다
희양산 자락과 봉암사 바위 남쪽 아래 자리한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5년인 879년에
창건한 고찰이다
백운계곡에 계암이라는 바위가 있었는데 봉암사를 세울당시 날마다 그 바위위에서
닭 한마리가 새벽을 알렸다고 한다
그로 인해 절 이름이 봉암사라 부른다
성철스님등 고승들이 부처님 법대로만 살자고 결의했던 살아있는 조계종의
수행도량으로 천육백년간 불교계의 소중한 유사으로 남아 있다
당나라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최치원이 처음으로 맡은 소임으로
지증대사 탑비문 짓는일을 맡아 봉암사계곡 곳곳에는 최치원의 흔적이 남아있다
창건당시 지증대사가 계곡의 한복판에 들어가지세를 살피니
"병풍같이 둘러싼 산을 마치 큰 봉황이 구름을 흔들며 날아오르는듯 하고
백겹의 굽이도는 물은 용이 허리를 돌에 걸쳐 누워있는듯하다"
"이땅을 얻는다는것은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만약에 이곳이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않으면 아마도 도적의 소굴이 될것이다."라
하였다
희양산의 정기와 봉암계곡의 늠름한 기상을 표현한 말이다
108평의 대웅보전과 보물 문화재등을 보관한 유서깊은 고찰이나
1982년부터 일반인들의 사찰 출입을 막고 수행가풍을 이어가고 있고
봉암사는 현재 일년에 딱 한번 석가탄신일에만 개방한다.
구왕봉도 희양산보다는 작은 봉우리였으나 바위산으로 오르 내리기 힘들고
위험한 구간이 있어 출입금지시킨 이유를 알것 같았다.
구왕봉에서 마당바위를 지나고 앞으로 은티재까지 2.2km 다시 마을까지 2,6km나 남았는데
시각은 벌써 오후 네시가 넘어갔다
죽었다 깨어나더라도 한시간 안에는 내려갈수 없는 거리다
늦으면 괴산에서 버스타고 서울로 올라갈 요량으로 부지런히 마당바위를 지나치고 내려오니
앞선 일행들이 호리골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호리골재의 백두대간길 중간에는 버티고 있다는 말이 어색하지 않게 무덤하나가 있었다.
대간길이 명당길임에는 틀림없나보다
아무래도 주치봉까지 걷는것은 무리라 여겨진 대장지시로 호리골재에서 은티마을로
하산키로 하였다는 전갈이다
호리골재는 구왕봉과 주치봉 사이의 고개로 여우와 삵이 자주 나타나서 붙여진걸로
여겨진다.
여우는 몰라도 삵은 살고 있을려나 그러고 보니 대간길 도중 곳곳에 무더기로 뽑힌
새털들을 종종 보았다
은티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희양산과 구왕봉 가는길에 비하면 꽃길이었다
산위에서 만나지 못한 진달래꽃이 드디어 얼굴을 내보이고 키 큰 소나무와 전나무
낙엽송이 좌우로 대열하여 풀렸던 팔다리가 다시 기운이 솟는다
개나리 매화가 피어있는 마을어귀에 도착하니 음기가 강해 물이 많아서 그런지
약숫물이 시원스레 나와 목을 축였다
땀 흘리고 마시는 자연수가 식도와 위를 거쳐 금세 혈관을 타고 도는양
시원했다
마을 사과밭에서는 십팔년째 사과농사를 지었다는 부지런한 농부는
한해 농사 시작으로 움트는 꽃잎을 솎아주고 있었다
은티마을은 백두대간 구왕봉이나 희양산 악휘봉 장성봉을 가려면 들리는 마을로
초입에 노송들이 사열하듯이 즐비하게 서 있고 장승이 서 있었다
계곡을 중심으로 발달한 마을은 형세가 마치 여성의 성기와 같아 여근곡 또는
여궁혈이라고 표현하고 쎈 음기를 막기위해 남근석과 전나무를 심었다 한다
여자의 바람기를 막는 역활을 한다는 남근석은 내 눈에 띄지 않았다
수령 사백년이 넘는 소나무와 전나무가 아름다운 마을의 어귀에서 수문장 역활을 하는듯
서있는 나무그늘아래 노파 한분이 앉아서 알록달록 옷을 입고 베낭을 짊어진 우릴 보고
오히려 의하해 하는듯 하다
황혼길의 노파도 한때 봄꿈 꾸는 바람기가 있었을지 텅빈 눈동자에
주름진 골짜기만 보인다
네발로 오르고 내려왔던 조령산 구간보다 대간길도 힘들고 접속길도 힘들어
백두대간 걷기를 포기하고 싶은 방정맞은 심정이 되살아난 구간이었다
로마 철학자인 세네카는"가장 용감한 자들조차 두려움을 느낀다
중요한 차이는 두려움을 느끼는가 느끼지 않는가가 아니라 두려움을 다스리는 능력과
기술의 유무였다."라고 말했다
바위길만 나오면 용감하게 뛰어다니는 그네들보다 내가 더 두려운것은
지구력보다 빨리 고갈되는 체력이다
위험천만한 바위에서 포즈잡다 쓰러질까 무서운것도 두려움에 포함된다
경험만한 스승없다고 부족한 경험탓일게다
드디어 오만분의 일 백두대간 스물네장의 지도책을 구입하여 걸어온길을 들쳐보니
진즉에 살걸 이제사 복습과 예습이 가능하게 되어 소경이 눈뜬 기분이다
푸른하늘 아래 꽃 향기가 날리고 산들거리는 봄 바람이 부르는 마법에 걸려
몇날 며칠을 꽃 구경 다니면서 쑥도 캐야해서 백두대간을 잠시 잊고 있었다
팔꿈치와 어깨에 희양산 바위가 준 영광의 상처를 일주일째 보듬고
흩날리는 벚꽃잎 아래에서 찰나의 행복을 누리기에 봄날은 너무 짧다
마법이 풀릴때 즈음에는 갈증나는 어느 대간길에서 땀을 흘리고 있을것이다
봄의 꿈
해와 달도 산을 넘고 넘었더니
절벽 아래 얼마나 오묘한지
봄바람 나뭇가지 사이 스쳐
산 진달래 꽃멍울에 모듬은
천지 조화 구경 많은 골짜기
찬란한 빛으로 아롱거리지
아침의 꿈은 봄날 이슬처럼 사라져
바람만 불어도 청춘은 저무는데
왜 푸른색이 무서운지,
바위길 솔가지 하나
가난한 삶이 허락한 곳
솔향기가 숨터라지
바위위에 걸친 뜬 구름속으로
봄바람 싣고 내 꿈도 날아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