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0. 13. 15:16ㆍ백두대간
일시-2016년 10월 10일 24시~10월12일 화요일 흐리고 수요일 맑음
장소-백두대간 지리산 구간 남진
코스-성삼재(1090m)-중석대-노고단 대피소-노고단 고개-돼지령-피아골 삼거리-노루목-반야봉(1732m)
-노루목-삼도봉-화개재-토끼봉-연하천 대피소-벽소령 대피소-영신봉-세석 대피소에서 일박
-촛대봉-장터목 대피소-천왕봉(1915m)-법계사-로타리 대피소-중산리 탐방지원센터
-중산리 버스주차장
백두대간 첫날 26.1km 11시간30분 걸림+둘째날 5.1km+접속구간 6.9km 6시간 20분걸림
=38.1km 총17시간50분걸림
한발짝 발걸음은 위대했다
국화꽃 향기가 가을 바람을 타고 오는 시월
어느덧 남한의 뼈대를 이루는 산줄기인 설악산 태백산 속리산 덕유산에 이어
백두대간 남진의 끝자락인 지리산을 미리 밟는다
지리산은 영남과 호남의 팔백여리에 뻗쳐 있으며 속한 행정구역만 해도
경남의 함양과 하동 산청 전남의 구례 전북의 남원등 다섯개의 시 군에 두루 걸쳐
1915m의 천왕봉 1732m의 반야봉 1507m의 노고단 봉우리를 비롯 25.5km 주능선에
해발 천미터 넘는 준봉들을 연이어 거느리고 있다
봉우리마다 칠선계곡 한신계곡 뱀사골 피아골 대성골 대원계곡을 품고 주능선을 중심으로
각각 남북으로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과 섬진강의 큰강이 흐른다
지리산을 에워싼 섬진강과 남강을 중심으로 영호남이 활발이 어울렸다
이들 강으로 화개천 연곡천 경호강 덕천강등 하천이 흘러 맑은물과 경치로
지리산 십이동천을 이루고 있다
화엄사 연곡사 천은사 쌍계사 실상사 대원사 법계사등 유서깊은 사찰들이 많고
하동의 녹차 시배지와 산천의 면화 시배지도 있다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하여 智異山이라 하고
멀리 백두대간의 맥이 흘러왔다하여 頭流山으로도 불린다
옛부터 금강산과 한라산과 더불어 신선이 내려와 살았다는 삼신산의 하나로
方丈山이라고도 일컬어왔다
방장이란 중국에서 신선이 살고 불로초가 많다고 전해지는
봉래 방장 영주의 삼신산의 이름을 따온것으로 불가에서는 깨달음을 얻은
큰 스님의 처소를 일컫는다
또 이성계에게 복종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불복산이라 부르는 이도 있고
남명 조식이 지리산에 은거함으로 후학들이 존경의 뜻으로 덕산이라 하는이도 있다
통일신라의 오악중 남악으로 국민태안을 기원하는 제례를 지낸산으로
임진왜란을 겪은뒤에는 지리산 어딘가에 무릉도원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어
지금도 민족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삼신봉 남쪽 청학동에 마을을 이룩하여 모여산다
육이오 한국전쟁을 치른 현대에 이르기까지 빨치산의 마지막 거점으로 이용되는등
깊은골 만큼 시대의 아픔을 간직한 역사의 현장을 지켜온 산이 바탕이 되어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박경리의 토지 최명희의 혼불 이병주의 지리산을 낳았다
'토지'에서 김개주로 변신한 역사적 인물인 김개남이 하동까지 들어와 악양벌을 피로
물들여 하동에서 쇠잔한 동학세력이 숨을 곳을 지리산뿐이었다
'태백산맥'에서 실존 역사 인물인 이현상을 비롯한 빨치산세력이 숨을곳도 지리산뿐이여서
지리산은 유토피아이고 피신처였다
1967년12월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우리나라 산으로는 넓이와 깊이로
제일 큰산이고 한라산에 이어 남한에서 두번째로 높은 산이다
민족의 영산인 어머니의 산인 지리산에 가기 위한 다짐과 설렘은 커서
찰밥과 찰떡 라면 빵과 비상 간식거리와 방풍 보온자켓과 갈아입을 옷에
해드랜턴과 비옷까지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남들 자는 시간에
희미하게 떠오른 달맞이를 하며 집을 나섰다
사년전 연두빛 나뭇잎이 싱그럽게 빛나던 오월 아들은 사천에서 군복무 중이었다
공군부대에서 마련한 부모님 초대의날이 되어 배낭매고 환영식장에 들어섰다
정장과 원피스로 쪽쪽 빼입고 멋부린 부모들과 달리 알록달록 등산복 차림으로
산이라고는 남산이 주 무대이고 둘레길이나 다니던 내가 산꾼 남편덕에
전문 산악인양 나타나자 모두들 의아해 하던 기억이 난다
한나절 군시설을 둘러보고 삼박사일 휴가 얻은 아들과 셋이서 택시를 타고
중산리에서 내려
지리산 국립공원 팻말이 보이고 두류교 아래 어마어마하게 큰 바위와
세찬 물줄기에 놀라고 말로만 들었던 지리산의 둥그런 산줄기가 하늘높아
겁부터 났었다
산행 초입 칼바위에서 넘어지고 숨이 차서 헉헉대며 돌덩이가 징글질글 미워질때쯤 도착한
로타리 대피소에서 덜덜 떨며 고기를 먹는둥 마는둥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천왕봉 찍고
백무동으로 내려 왔던것이 내 생애 최초의 지리산이었다
번뇌와 망상을 떨구는 해우소는 깜깜한 시멘트에 구멍만 뚫린 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오줌이 멀리 메아리로 들렸다
내가 떨어져 죽을거 같은 무섬증이 도진
밤중에 화장실은 최악이었다
그뒤로 지리산은 잊었다
자정이 지나고 버스는 불야성을 이루는 서울을 빠져 칠흙같은 고속도로를 빠르게 달렸다
한밤중에 무슨 볼일로 고속도로 위를 달리는 차들이 이리 많은지 쌩쌩 바뀌 굴러가는 소리와
엔진소리가 유난히 귀에 거슬린다
염증이 생길려나 까끌거리는 눈에 안약을 넣고 비몽사몽 서너시간이 지났다
고불고불 버스는 돌고돌아 해발 고도 1090m의 성삼재에 다달았다
성삼재는 구례 천은사를 거쳐 뱀사골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861번 지방도로가 지나가고
남서쪽은 구례 천은사 방향으로 북동쪽은 뱀사골과 정령치로
남동쪽은 노고단 정상으로 가는 도로이다
서산대사의 '황령암기'의하면
기원전 84년 삼한시대에 마한군에 밀리던 진한왕이 전란을 피해 지리산 심산유곡으로 찾아들어
달궁계곡에 왕궁을 세웠다
북쪽 능선은 여덟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지켰다고 하여 팔랑재라 하고
서쪽 능선은 정장군으로 하여금 지키게 하여 정령치라고도 하는 정령재
그리고 황장군이 지켰다는 동쪽의 황령재는 현재는 위치를 확실이 몰라 황나드리라는곳으로 추정된다
가장 중요한 남쪽에는 성이 다른 세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방어하게 하므로 성삼재라 부르게 되었다
버스에서 내려오니 밤이 얼마나 지났을까 주변은 암흑 천지였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더 빛나서 하늘에는 뭇별들이 반짝이고
땅에서는 해드랜턴 불빛만이 반짝거릴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깊은산 지리산 새벽 찬바람이 쌩 얼굴을 스치고 코끝이 맵게 추위가 밀려온다
추위에는 심장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서서히 움직여줘야 한다
탐방 지원센터를 지나 드디어 지리 종주길에 들어섰다
해발 1380m의 노고단 대피소까지는 지도상 거리는 2.7km로
산행 난이도는 하등급 수준으로 걷기 편하게 오르다보니 서서히 몸에 열기가 올라
추위는 가시고 오히려 배낭맨 등짝에 땀이 밴다
노고단 대피소에서 찰밥과 꿀차로 새벽밥을 든든히 먹었다
대피소에서 노고단 고개로 가는길은 잘 정비된 돌멩이 길이다
이십여분 올라서자 노고단 고개길이 나온다
아직 껌껌한 하늘은 지리산의 서늘한 공기만 줄뿐 장엄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노고단 고개에서 정상까지는 불과 오백미터 떨어진곳에 있다
노고단은 천왕봉 반야봉에 이어 지리산 삼대 봉우리중의 하나로
정상 오름길은 나무 데크길로 잘 만들어진 길이다
예전에는 정해진 인원만 해설사가 이끌고 올랐던 곳이라는데 지금은 개방되어 있었다
노고단은 선도성묘를 국모로 모시고 제사를 올리던 신단이 있던곳이란 뜻으로
신라시대에는 우물가의 알에서 태어난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를 수호신으로 모셔
매년 봄 가을 제사를 올렸고 신라 화랑들이 심신수련장으로 삼기도 했다
이십세기 초반 외국 선교사들이 별장을 짓고 서늘한 여름을 지냈는데
1948년 여순사건 이후 반란군들의 거점이 되는것을 두려워한 국군 토벌대가
불태워 버려 없어졌다
전설에 나오는 지천 할미의 제단이 있는 1507m의 노고단 정상 입장은
새벽 다섯시에서 시작하여 오후 네시반이면 통제된다
정상석 옆으로 해드랜턴 불빛에 영롱이 보이는 불뚝 튀어나온 꼭지가 있는 돌탑이
인상 깊었다
무사 안전한 지리 종주를 기원하며 발길을 돌려 다시 노고단 고개로 내려와
임걸령을 향해 노고단 고개문을 통과했다
천왕봉까지는 25.5km이고 오늘의 여정은 세석 대피소까지이다
돼지령까지는 흙길과 돌길을 오르내리며 넓었다 좁은 오솔길로 이어진다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고 지리산의 산세가 흐리게 드러내자
랜턴이 거추장스런 물건이 되어 배낭으로 들어갔다
돼지령에서 조금 가다보면 파아골 삼거리가 나오는데
우측으로 가면 피아골로 가는길이다
피아골 삼거리에서 0.6km 떨어진 임걸령에는 봄에는 진달래가 많은 지역으로
지금은 가을빛으로 점점 물들어 가고 있었다
임걸령은 조선 명종때 도적이었던 임걸년의 활동무대로 이곳에 진을 치고 말을 길렀던 곳이다
우뚝 솟은 반야봉이 북풍을 막아주고 노고단 능선이 동남풍을 막아주어 천혜의 요지였다
길 안쪽으로 자리잡은 임걸령 샘터에서 물이 펑펑 쏟아졌다
시원하게 목을 축이고 노루목까지는 오르막이다
해발 1498m의 노루목는 반야봉으로 올라가는 삼거리이다
반야봉은 대간길에서 벗어나 있는 봉우리로 노루목에서 일킬로
가까운 거리이나 그때까지는 험한길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왕지사 지리산에 왔는데 백대명산도 찍을겸
반야와 마고가 만나도록 역활을 한다는 운무도 볼겸
아들과 둘이서 반야봉 봉우리로 길을 돌렸다
이백여미터를 가니 일행들의 배낭이 모여있고 이미 오르고 내려온 일행은
삼도봉으로 가려는 채비를 하고 있었다
바위길과 깍아지른듯 높이 솟은 철계단을 올라서 반야봉 봉우리에 섰다
1732m의 반야봉 정상에서 동쪽으로 조금 가면 절벽 아래에 옛부터
불도들이 수도하는 묘향대가 있다
정상은 약 육백미터 거리를 두고 남봉과 북봉으로 나뉘어졌는데
북봉은 아름드리 구상나무 상록원시림을 이루고 남봉주변에는
월귤 만병초들의 고산식물이 자라며 봄이면 철쭉과 야생화가 많이 핀다
반야는 불교의 반야심경에 나오는 지혜를 뜻하는 말로 지리와 이언동의로
상통하는 명칭에서 유래되었다
멀리서 보면 여자의 젖무덤 같은 모습으로 또는 엉덩이의 모습을 띄고
가까이에 다가가면 빨치산들이 요새로 삼을만치 깊고 험하다
빨치산은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남쪽으로 내려왔다가 미처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 정규병력이다
기존의 지리산 일대 빨치산 대열에 합류하면서 남한에서 지리산을 정점으로
북한이 존재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전북 순창의 화문산에 집결한 빨치산은 화문산의 마지막 보루인 장군봉이 군경에 넘어간후
팔공산을 거쳐 백두대간의 백운산과 덕유산을 맴돌다 지리산으로 내려온다
남한 내부의 좌익의 뿌리가 그곳에 내려졌기 때문에 토벌하기가 쉽지 않았다
남로당 당수인 박헌영과 월북한뒤 다시 지리산에 들어와 빨치산 역활을 한
남부군 총사령관인 이현상은 지리산에서 반야봉과 뱀사골을 요새로 삼았다
"이현상의 토벌없이 지리산의 안정없고 지리산의 안정없이 대한민국 안정 없다"며
이승만은 골머리를 앓았다
군경 토벌대에 쫓기던 이현상은 1953년 9월 빗점골에서 최후를 맞이했고
이후 선녀굴에서 숨어살던 빨치산들은
"태백산맥에 눈 날린다 총을 메어라 출진이다
눈보라는 밀림에 우나 가슴속에 피끓는다"라고 노래 부르며 높은 산을 넘었다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이 1963년 11월 생포됨으로
굶어 죽고 얼어 죽고 총 맞아 세번 죽는다는 그들의 역사는 끝이났다
이현상은 지리산에서 조선 인민 유격대를 지휘하며
"지리산에 풍운 일어 기러기떼 흩어지니
남쪽으로 천리길 검을 품고 달려왔네
오직 한뜻 한시도 조국을 잊은적 없고
가슴에는 철의 각오 마음속엔 끓는 피 있네"라고 지었다
여순사건을 축으로 한과 이데올로기의 세계를 형상화한 대하소설'태백산맥'은
새벽 미명아래 술도가 아들 정하섭은 무녀 소화의 집에 숨어들어
빨치산 정하섭의 다급한 부탁을 가만히 들어주면서
시작된다
광복후 여순사건이 반발하면서 여수 순천을 중심으로 빨치산 세력이 일어나
빨치산에게 찍히면 민간인도 가차없이 소화다리에서 총살당했다
실제 소화다리는 인민재판이 빈번했던곳이다
지리산에서 이해룡과 김범준이 폭격 당하고 무너진 빨치산 대장인 염상진은
마지막 남은 수류탄 핀을 뽑아 자살을 한다
지주의 부당에 반발해 소작권을 따낸 하판석의 아들
땅딸보 빨치산 하대치는 끝까지 살아 남아 그의 동료들과 어둠 저편으로 사라져
사회주의를 넘어 인간 다운 세상의 숙제를 남긴 소설이다
한때 이적성 논란에 휩싸여 검찰 수사까지 받았던 소설을
"안방에서 어머니가 읽으면 교양서가 되고 건너방에서 대학생이 읽으면 이적 표현물이 된다"고
작가는 비꼬았다
당시 빨치산은 멧돼지이고 군인은 노란개 전투복을 입은 경찰은 검은개라
서로를 칭했다고 한다
지금도 사람을 개와 돼지로 전락 시키는것도 사람이다
흐릿한 하늘에 지리산 줄기만 낭창거릴뿐 운무는 없었다
반야봉을 뒤로하고 다시 내려서 삼도봉으로 내려왔다
삼도봉은 정상에 넓은 바위암봉으로 경남과 전남 전북의 삼도를 경계짓는 곳으로
봉우리는 삼각뿔의 청동 조형물로 되어 있다
삼도봉의 바위모양이 낫날같이 생겼다 하여 낫날봉이라고 하던것이 와전되어
날라리봉으로도 불린다
영동 삼도봉과 거창 삼도봉을 거쳐 지리 삼도봉까지 세개의 삼도봉을 모두 찍었다
삼도봉 아래로 뱀사골은 지척이다
삼도봉에서 화개재로 내려가는길에는 오백오십개의 나무계단이 나온다
길고 지루한 계단옆으로 노랗고 빨갛게 익어가는 가을이 내려가고 있다
무릎과 종아리가 힘이 가고 발바닥이 뻣뻣해질즈음 화개재는 나온다
옛날 화개 사람들의 물물 교환시장이 열렸다는 곳이다
넓은 초원이 장터가 열릴만하다
화개재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뱀사골이 나온다
다시 오르막을 올라 1533.7m의 토끼봉에 도달한다
토끼봉은 토끼가 있는 봉우리가 아니라 반야봉을 기점으로 동쪽 스물네방위의 정동에 해당되는
卯方이라서 토끼봉으로 불린다
정상이 밋밋한 초원지대와 구상나무 상록수림지대로 정원같은 느낌이다
서쪽으로 반야봉이 우뚝 솟고 북쪽으로는 뱀사골이 동남쪽으로는 화개골로 이어지는
전망이 좋은곳이다
노루목에서 헤어졌던 가족 상봉을 하고 아래로 내렸다 올라 명선봉 봉우리를 넘고
나무 계단을 내려와 사백 미터 앞에있는 연하천 대피소로 향했다
연하천은 명선봉의 북쪽 가슴턱에 위치하고 있으며 높은 고산지대임에도
숲속을 누비며 흐르는 개울의 물줄기가 구름속에서 흐르고 있다하여
연하천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름말마따나
두개의 수도꼭지와 개울가에서 맑은물이 펑펑 쏟아지고 흘렀다
라면을 끓이고 밥말이를 하여 점심을 해결했다
평일날이라 몇몇 등산객으로 주변은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가을 오수를 즐기기에는
더 이상 바랄게 없겠으나 너무 쉬면 안그래도 꼴찌딱지를 달고 다니면서
한가한 소리는 금물이라 서둘러 챙겨 떠나려하니 늦게 들어온 산우들도
먼저 가버리고 안보인다
언제나 그랬듯이 길고 긴 백두대간 산행길에는 함께 시작해도
나 홀로 걷는것이 정답이다
연하천 대피소를 나와 산죽밭과 주목 군란지를 벗어나 삼각고지에 다달으면
고사목이 하나둘 보인다
삼각고지 사면의 암봉구간을 내려서다보면
거대한 암봉 두개가 끊어질듯 이어질듯 위태롭게 서있는
형제봉이 나온다
두형제가 산의 요정인 지리 산녀의 유혹을 경계하며 서로 등을 맞대고
불도를 닦다가 그대로 굳어 돌이 되었다는 형제봉은 하동군 악양면에 속한다
다시 밧줄타기와 암벽을 오르고 내려서 벽소령 대피소에 도달했다
벽소령은 노고단에서 천왕봉 종주 등반코스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도가 가장 낮은 산령으로 예로부터 화개골과 마천골을 연결하는 산령이다
화개에서 마천까지 38km의 지리산 중앙과 북쪽을 연결하는 횡단도로로
북쪽의 음정과 남쪽의 의신에서 올라오는 등산객들에게 교두보 역활을 한다
광대한 지리산 중심부의 허리처럼 잘룩한 벽소령에서 바라보니
높고 푸른 능선이 능선을 거느리고 겹친 지리산의 풍광이 기막히다
달빛이 희고 맑아 푸른빛으로 보인다는 벽소명월로 달빛이 지리 십경에 들어가는
절경을 자랑하는 벽소령 대피소에는 오후가 되어서도 햇살은 나올 기미가 없고
바람은 찼다
세석대피소까지 남은 거리 6.3km 부지런을 떨어야 저녁만찬을 즐길수 있다
대피소 의자에 앉은 몸이 무겁고 지쳐 오래 쉬었다간 더 이상 가고 싶지 않을것이다
그래도 가야 한다
가다보면 끝이 보이기 때문이다
오뚝이 마냥 앉았다가도 금방 일어서야 오늘 일정을 마칠수 있기에 인절미 한팩으로
간식을 마무리 하고 일어섰다
대피소를 빠져나와 넓은 임도를 올라서 1435봉을 우회하고 공터가 있는 마른재에서
덕평봉을 향한다
덕평봉 아래에 선비샘이 있다
신분 갈등으로 한을 품은 천민을 위로하기 위해 그 이름이 지어졌다는 선비샘은
항상 풍부한 수량으로 등산객의 물통이 채워져 지리산에 오를때는 많은 물을
가져올 필요가 없다
선비샘에는 물이 시원하고 맛이 좋았다
산의 사면을 휘감아 오른 암릉길을 밀어 올려 1576m의 망바위을 지나고 다시 오르면
일곱개의 각기 다른 암봉들이 일곱선녀들의 노는 모습같다고 하는 칠선봉이 나온다
다시 바위길로 오르고 전망을 바라볼수 있는 봉우리들이 줄을 선다
1556봉을 지나고 1651m의 영신봉에 다달은다
영신봉은 하동 화개면과 함양 마천면 산청 시천면의 경계에 있다
천왕봉에서 제석 연하 칠선으로 이어지고 주능선에 위치하여
낙남정맥의 분기점이기도 하다
정상부에서 우회하여 내려가면 드디어 너른 세석 고원이 내려다 보이는
세석 대피소가 나온다
모두 잠들어 있는 새벽녘에 길을 나선 대간길은 걷기 시작한지 열한시간이 지나고
오후 네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시시각각으로 변한다는 지리산의 날씨는 하루종일 희끄무레 흐리고
서늘하게 바람 불어 오히려 산행하기는 더 없이 좋았다
흐린 하늘에 진한 산그림자가 내려오고 어둠이 대피소 앞마당까지 왔다
돼지고기와 김치를 볶고 가져간 흰밥으로 죽을 끓여 허기진 배를 채웠다
대피소에서는 긴장된 근육과 탈수된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도록 에너지를 보충하는 수준이면
성찬이고 감사할 따름이지 오대 영양소를 챙기는 우아한 식사는 사치에 불과하다
여유롭게 일인용 나무침대였던 덕유산 삿갓재 대피소와 달리
다닥다닥 번호 매겨진 비좁은 나무 마루바닥에서
옴짝달싹 움직일수 없는 하룻밤 시체놀이로 잠을 청해야 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대피소의 밤은 길었다
지리산
깊고 맑은
지리산에 물이 드네
불어오는 바람처럼 태어난 어머니의 산에
어머니의 강이 흐르는 생명의 요람에서
춤을 추는 은빛 억새 벽소명월 버금가네
하늘을 가로지르는 까마귀 한마리
임걸샘과 선비샘에 머무를 곳 없이
반야봉 아래로 짧은 가을 따라가고 있네
하늘 향해 솟은 바위 사이로 가을이 깃들어
섬진강에 황혼이 내려앉고
전라도에서 하루밤 경상도에서 하루밤
지리산은 가을 침묵으로 영원을 살고
나와 당신도 물들어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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