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6. 15. 09:43ㆍ백두대간
밤이 새도록 머리가 깨어 있었다
피로하면 찾아오는 지끈거리던 두통은 없어 머리는 개운한데
아무리 눈은 감고 자려고 시체처럼 누워 있어도
종아리 알은 모두 부풀어 올라 욱씬욱씬 소리가 나는거 같고
심장은 아직도 걸어갈 길이 남았다고 두근두근 소리가 들린다
진통제 한알을 삼켜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샤워하지 못해 끈적거리는 몸에 담요까지 깔고 덮으려니
뒤척뒤척 불편하기가 그지 없다
마루바닥에 맨 몸을 대고 누우면 그나마 나을성 싶어 바지도 벗어버린채 속옷 차림으로
바닥과 한몸 되었더니 이제는 허리가 끊어질듯 아프다
그나마 가지 말라는 향적봉까지 올라갔던 산우 세명이 늦은 밤까지 돌아오지 않아
수군 수군 걱정하는 소리에 나도 향적봉 가다가 바람 맞아 비틀거리는 상상을 해본다
새벽 네시에 담요를 걷어차고 밖으로 나오니
폐부로 들어간 써늘한 새벽 공기가 상쾌하다
전날 먹었던 돼지고기 냄새를 말끔히 지워내고
개운한 흰 쌀밥으로 요기를 하고 삿갓재 대피소를 빠져 나왔다
쟁반 같이 둥글었던 달은 밤새 비에 젖었나 그새 많이 쫄아 들었다
여명이 트기전 푸르스름한 하늘에 졸고 있는 달빛을 받으며
남들보다 이른 새벽에 길을 나섰다
이슬먹은 풀잎들이 바지 아랫단에 부딪쳐 밤새 뜨거웠던 종아리가 시원하고
꽃봉오리가 앙증맞은 순백의 함박꽃이 이른 아침 정신을 깨운다
거미줄이 얼굴에 달라 붙어 근질 거린다
죽을 각오로 이리뛰고 저리 뛰어 한개의 보금자리를 만들었을텐데
내 길 가자고 그들의 집을 망가뜨렸으니
다시 지어야 할것이다
거미들은 거미줄로 먹이를 포획하고 거미줄을 튕겨 춤을 추며 사랑도 하는
과학적 머리가 뛰어난 곤충이다
삿갓봉에 올랐다
이미 해는 산등성이 위로 떠올라 눈이 부시다
어제 걸은 산마루금이 출렁출렁 많이도 걸어왔다
오늘 가야할 뾰족한 남덕유산과 그너머 할미봉까지 초록 바다속으로 풍덩 빠질 준비를 하고
삿갓봉을 내려섰다
전망바위를 지나고 월성재에서 한숨 돌리고 숨가픈 오르막으로 남덕유산을 향한다
남덕유산 정상은 대간길에서는 약간 비껴 있지만 워낙 조망이 멋져
그냥 지날칠수 없는 봉우리이다
작년 가을 아들과 셋이 섰던 그자리에서 인증샷을 하고 흰 구름속에서 꿈틀거리는 산너울에
한참동안 눈길을 빼앗기다 오싹 추위가 몰려와 꼭대기를 벗어났다
장수군에 있다하여 장수 덕유산이라고도 불리는 서봉과 할미봉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아직인걸 오전햇살이 점점 열을 품어댈 기세다
산에 사는 생물들은 다시 살아나 길섶에 작은 들풀도 생기가 돋는데
나는 벌써 배도 고프고 기운도 떨어졌다
산새들이 유난히 짖어댄다
찌르찌르 꾸루꾸룩 째재짹 짹짹 무슨새인지 알수가 없다
얼마나 많은사람이 대간길을 뻔질나게 왔다갔다 했는지
오르고 내리막에 걸쳐진 나무뿌리와 줄기들이 사람 손때로 반질거리고
매끈거리는 길바닥이 많다
바위 암벽에 가파른 철계단이 공중에 떠있는듯 높다
좋은 풍광을 거저 주질 않았다
서봉 봉우리에 섰다
산에서 폭죽이라도 터트린양 여기저기에 바위가 서 있고 사방 팔방 어디를 둘러봐도
막힘이 없다
"아름다움은 단 한순간도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눈을 감고 있을뿐이다
감았던 눈을 뜨기만 하면 세상의 아름다움이 온통 소나기처럼 쏟아질것이다"
헤르만헤세의 말이다
이 순간 쏟아지는 아름다움을 보고 침묵으로 답할것이다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농아 한분은 백대명산 완주기념 뺏지가 다닥다닥 붙은 수건을 꺼내들고
인증샷을 한다
천둥치고 벼락 떨어지는 소리는 듣지 못하겠지,
눈과 온 몸으로 웅장한 산의 울림을 들을것이다
산에서 내가 제일 부러워하는 산새 소리를 듣지 못하는게 안타까운 일이지만
듣지 못하고 말을 할수 없다는것만 빼면 나보다도 산행 경력과 능력은 탁월해
보였다
바위에 달린 밧줄도 모자라 나무 사다리 계단을 올라서야 비로소
이름도 이상하고 촌스럽게 빨간 글씨로 적힌 할미봉을 만날수 있다
무슨놈의 할미가 이렇게 하늘 가까이 높은곳까지 오른다니,
아마도 여기 올라온 할미는 없을것이라 여겼는데
요새는 하도 할미들이 젊어서 수십번도 오르락 거리는 할미들도 많겠다
할미가 아니어도 각오 없이는 힘들다
오르막에서만 숨차고 허벅지가 땡기는게 아니라
할미봉을 내려서는 내리막은 더 죽겠다
밧줄 잡기를 여러번 대간길이 파여 나무 뿌리가 솟아 오르고
푹 파인 길은 미끌거려 앞으로 뒤로 두번을 넘어지면서
26번 도로가 지나는 육십령으로 내려왔다
두배로 챙겨야 하는 배낭 무게로 등짝이 무겁다던 남편은
덕유산 구간을 무사히 마쳤다며 한시름 놓는다
이틀간에 걸쳐 32km를 16시간 걸렸다
덕유산
덕유평전에서
바람 불어 한 순간 먹구름 휘몰아치면
길섶에서 숨소리 들리는 꽃과
비밀스런 기억을 간직한 나무들은
추억이 빗물로 젖어 흐느낀다
서봉에서
산등성이로 붉은 태양이 떠오르면
깊숙한 나무 뿌리에서 물 오르는 소리와
바위 밑으로 생명을 빨아들이는
달콤한 숨결이 웅성거린다
할미봉에서
한낮에 뜨거운 태양만큼
따뜻하게 데워진 영혼은
초록 물결따라 산 능선을 내려와
생각 어디쯤 있나,
천천히 멈춘다
감사의 글
남 앞에 나서는것도 싫고 이름 내세우지 않고 조용히 살다
조용히 사라지고 싶었던 내가 나와 어울리지 않은 책을 출판했다
등산 다니면 더 늙어 앉은뱅이 된다고 등산도 조심하라 말리는 가족들은
아직 책을 만들었는지도 모르는데
초보 산꾼 딱지 떼기도 전에 초보 글쟁이가 되어
여기저기서 출판기념을 하자고 하는 통에
요즘 내가 나인가 두렵기까지 하다
비매품이라 기념회 같은거는 모른다고 하자
초등 머시매들은 내가 초록색을 좋아할것 같은지
산에 가면 실컨 보는 풀을 사들고 집앞으로 달려오질 않나
산악회에서는 산 밑으로 케잌을 배달 시킬지 않나
남산걷기 여고팀은 옛맛을 지닌 태극당 케잌으로 축하를 하질 않나
생각지도 않은 과분한 사랑으로 배가 터질 지경이다
이제 예전의 나로 무심히 대해 주면 고맙겠다
올 삼월 생일을 맞이해서 모인 자식들이 갑자기 의기 투합하여
퇴근후 새벽 두시까지 두달 넘게 서로 각자 집에서 인터넷으로 연락하며
딸은 편집 아들은 디자인 내가 글 교정과 사진 선택 작업을 하게 되었다
대간길에서 찍사였던 남편은 지도 작업을 부탁받고 마감 직전에 완성했다
전문 산악인들은 세끼 밥 먹듯이 쉽게 할수 있는 길일지 몰라도
난 갈때마다 죽을 만치 힘들게 다녀와서 매번 죽겠다는 말만 쓴거 같은데
엮다 보니 두꺼운 책이 되었다
처음에는 환갑기념으로 생각했던것을 흥분과 즐거운 고통의 잔상이 사라지기전에
미리 받는 환갑선물이 되었다
울트라 갈때보다 날 데리고 다닐때가 더 힘들다던 남편은
요즘 독자들에게 무거운 책 배달일까지 해야 한다
그러게 왜 책을 만들었는지,
안해도 되는 고생을 사서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얇팍한 지식과 부족한 필력으로 독자로 만든 모든 분들께
감사하단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내 몸뚱아리도 무거워 카메라 들고 대간길 걷는일은 엄두도 못내다
오랜만에 역활을 바꿔 전용 장남감 된 카메라로 내 맘대로 찍어본
숨소리 들렸던 꽃과
비밀을 간직한 나무들
그리고 풍광 사진을 올립니다
207년 6월18일 이 정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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