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8. 30. 10:25ㆍ백두대간
일시-2017년 8월29일 화요일 맑고 바람 쌩쌩
장소-백두대간 윤지미산 구간 북진
코스-지기재(260m)-신의터재-329.6봉-무지개산 갈림길-윤지미산(538m)-화령재(320m)
16km를 5시간 걸림
다시 백두대간 가는날이다
지기재에서 화령재까지는 대간 타는 사람들 하는말로 너무 쉬워
달린다는 보너스 구간이다
하늘은 파랗고 공기는 맑았다
푸른산 마루금이 따뜻한 태양볕에 빛나고 있었다
얇게 드리운 흰구름이 빠르게 움직인다
비가 많았던 팔월을 빠르게 보내고 싶은지
바람도 세찼다
백두대간길에 얹혀 나도 백두대간이 되기에 안성마춤인 날씨다
중화지구대인 이 지역은 당도가 높은 과수농업이 발달 한다더니
지기재에는 포도밭에 포도와 사과밭에 사과가 주렁주렁 달리고
복숭아밭은 벌써 수확이 끝났다
과수밭을 지나면 마을 진입로의 논두렁길이 나온다
시작부터 마을길과 농로로 헷갈리니 선답자들의 띠지를 보고
따라가야 된다
금은골 동네에 못미쳐 대간길은 숲으로 들어가 자유롭게 흔들리는
나무 이파리 사이를 헤집고 완만한 오르막을 올랐다 내려선다
안쑥밭골 논길을 통과한후 대간길은 완만한 능선길로 올라서
신의터재에 닿는다
지난주 울대고개에서 우이령까지 가느라고 산모기에게 열방도 더 물려
아직까지도 여기저기가 가려워 미칠 지경이다
둘이 가도 나만 물려 오는걸 보면 지방기 많은 우유맛이 더 고소하듯
미물들도 기름기 많은 피가 더 맛있다는걸 아는 모양이다
쾌청한 바람 부니 무엇보다 산모기가 달라들지 않아 살것 같다
예전에는 어산재라고 했던 신의터재는 신의티라고도 불린다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 표지판과 함께 표지석이 세개나 있는 신의터재는
임진왜란때 김준신이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운 곳이다
의병들이 상주성에서 왜적을 많이 죽이자 이를 보복하려고 왜군이 판곡리에 침입했다
그의 가족들과 부녀자들은 스스로 죽을지언정 왜군의 손에 죽을수 없다며
인근 낙화담에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신의터재에도
이고장 먹거리인 포도를 자랑하는 커다란 표지판이 도로가에 서있다
전기줄은 땅으로 밀어 넣을수는 없는건가
파란 하늘만 올려다 보고 싶은데 검게 밑줄들을 긋고 눈앞에서 알짱거렸다
신의 터재에서 도로를 건너 농로를 따라 십여미터를 가면
하동과 상주의 갈림길인 작은 표지목이 나온다
상주인 오른쪽 능선으로 올라서 무지개산 방향으로 들어선다
329.6봉을 지나고 무지개산 갈림길까지 길은 폭신하고
뜨거운 태양볕은 나무그늘에 가려져 걷기 편하다
등에 밴 땀에 솔솔 부는 바람이 금세 마르고 얼굴도 시원했다
등산화에 바뀌를 달은듯 선두는 보이지 않고
이제 점심때인데 나도 벌써 오늘 일정의 반이나 왔다
백두대간길에서 비켜있는 무지개산은 오르지 않고 윤지미산으로
방향을 틀었다
오르락 내리락 오늘의 최고봉인 윤지미산 가는길도
급한 오르막 경사가 있는것도 아니고 내리막도 부드러운 비단길이다
길이 부드러워 등산화를 질질 끌지 않고 불평 한마디 없이 잘 따라 갔더니
씽씽 앞서가는 남편은 점점 더 빨라진다
나도 정신없이 서두르다 그만 나무뿌리에 걸려 두손 두발 쫙 벌리고 앞으로 넘어졌다
일명 깨구락지 낙법으로 넘어져서 무릎과 팔굼치에 흙범벅이 되었다
왼쪽 무릎만 조금 까지고 뼈는 이상 없는거 같다
그러게 쉽다고 서두르면 꼭 사단이 생기는게 백두대간길이다
식용과 건축자재로 쓰이는 잣나무 조림지를 지나고
최고봉이라고 해봐야 538m에 불과한 윤지미산은 무덤처럼
돌무더기를 쌓아올린 표지석이 기다린다
윤지미산 정상을 뒤로 하고 내려오는길은 밧줄구간이다
급경사의 밧줄을 잡고 내려오면 다시 완만한 능선길과 농로가 나온다
농로를 따라 걷다 오른쪽 능선으로 붙는다
차량 지나는 소리가 마치 쇠를 갈아내듯 시끄럽게 들리고
드디어 25번 국도가 지나는 날머리 화령재가 나온다
오후 햇살이 날카롭게 눈을 찌르고 너무 이른 시각이다
주어진 시간보다 두시간이나 빠르다
일찍 내려온 산우들은 후덕지근한 버스속을 피해
정자에 앉아 하산주를 하고 있었다
대충 옷을 갈아입고 정자위로 올라가보니 바람이 지나는곳인가
시원하다 못해 그늘은 춥다
삼국시대부터 임진왜란과 육이오 전쟁까지 역사적인 전투가 있을때마다
싸움터가 되었던 천혜의 요새인 화령재에서 오늘의 대간길은 마친다
삼백의 고장 상주에서 서울로 귀경은 후미대열의 빠른 하산으로
오후 햇살을 받으며 버스는 움직였다
산악회 규칙은 하산후 식사 자리없이 곧장 서울로 돌아오는것이다
식사와 술은 너무 친근하여 술 한모금 못하는 나같은 사람은
술 마시고 객기와 허세 떠는것을 지켜보는것만도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래서 회사 방침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이년간의 긴 여정속에 이어나갈 백두대간길은 팀웍이 중요하다
앞에서 이끌어 주고 중간에서 서로 격려하고 뒤에서 밀어줘야
무탈하게 완주할수 있기 때문이다
하산후 대원들끼리 한자리에서 밥을 먹는다는것은
밥 먹는 것이 단지 배를 채우는것이 아님을 알기에
너무 힘들어서 밥알이 목구멍으로 안 넘어가고 국물만 들이켜도
그동안 하산후 식사자리가 있으면 꼭 참석했다
먹으면서 정들고 먹으면서 신뢰가 생기는 밥먹는 자리는
이제 없다
초짜 글쟁이인 나도 글로 풀어내지 않으면 심장 멎어 죽을지 모른다
이십팔인승으로 이동할때나 삼십육인승으로 이동할때도
통로를 사이에 두고 매번 옆자리에 앉았던 산우가
절이 싫어서 중이 떠난다고 하더니 진짜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갔다
앞전 전 전의 기수에게 일어난 일이다
회사에서 하지 말라는 식사 하느라 늦었다는 이유로 산우들은 나둔채 짐들만 싣고
얼마쯤 갔다가 돌아와 사람을 싣고 귀경한 버스사건으로 한동안 시끄러웠다
그일로 고인은 막상 그날 산행도 하지 않아 직접 겪은일도 아닌것을
운전기사와 회사대표에게 남들보다 몇배로 섭섭해하며
분노를 참지 못했다
직언 쓰는 란에 싫은소리 쓴 또 다른 산우는 글이 삭제당하고
강퇴당하는 일도 있었다
그뒤 그 기수는 백두대간 종착점을 얼마 안남기고 다른 산악회로 옮겨
진행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직언은 옳고 그름을 기탄없이 바로 말하는 것이다
어느곳이든 칭찬일색인 글만 싣는다면 전체주의 사회나 다름 없을것이다
성숙한 사람이라면 남의 말과 글에 귀 기울여야 한다
내 글도 삭제 당하고 강퇴 당할수도 있다
어떤어떤 산악회가 무슨 대수란 말인가
한번 인연은 함부로 끊어내지 못하는 단점이 있는 나지만
나처럼 산악회 이름과는 상관없이 인연맺은 사람들과
무탈하게 산행할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 많을것이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가 생각난다
2016년 6월14일 화령재에서 고인은 바닥에 양반다리로 앉은 산우입니다
2016년 6월28일 신의터재에서 고인은 앞자리 가운데 앉은 산우입니다
어찌 되었든 산우는 사과없는 산악회에서 공지하는 산행은
더 이상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하고 일주일만에 고인이 되어 버렸다
평소에 지병이 있었다기로서니 나보다 몇 살이라도 많다면 모를까
육십고개도 안넘은 사람이 죽다니 실감이 나질 않는다
유난히 정이 많고 불의를 못 참고 모든일에 솔선수범 하고자해서
매번 선두에서 깔지를 깔아놓고 띠지를 나뭇가지에 달아
뒤에 오는 산우들을 챙겼다
곁에서 보면 산을 다람쥐 마냥 타고 스틱없이도 쉭쉭 앞장서 갔다가
날머리에서 "형수님 오늘도 수고했습니다"라고 말을 건내 주더니
오늘은 화령재가 텅 비었다
작년 늦가을 진눈깨비 날리던날 고인와 함께 등산했던 화채능선 기억이 새롭다
남설악 지킴이로 활동했었던 산우는 대원들은 이끌고 비경으로 들어갔다
오색에서 올라 대청봉을 찍고 화채봉에서 칠선봉으로 거쳐 숙자바위를 통과하고
소토왕굴에서 비룡교로 내려오는 코스였다
삼각형 바위 두개가 엇갈린 화채봉 봉우리에서 인증사진 찍기도 달달 떨리고
천불동 계곡으로 떨어져 뼈도 못추릴까봐 어찌나 발바닥에 힘을 주었던지
땅으로 내려와선 저절로 다리심이 풀려 주저 앉았었다
머리털 나고 무시무시한 모험은 처음이라 다시는 꼬시지 말라고 당부했었는데
지나간 추억이 되었다
차고 걸고 매달아 특전사 복장으로 산악 전투사처럼 보이지 말고
툭하면 넘어지고 비실대는 나처럼 약한척이나 한번 하지
에고, 한방에 훅 가버린 산우 때문에 파란 하늘에 흰구름이 먹구름되어
먹물이 흘러내린다
같은 기수의 일원으로 그동안 함께한 산우들과 십시일반 조의를 표하고 싶었다
먹고 마실때는 너도나도 열던 지갑들은 어디가고
이런저런 말들이 많은 판국에 돈을 각출하면 뒷말이 오간다는 이유로
내 의견은 회원들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대장선에서 묵살되었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고 정승이 죽으면 개 한마리 얼씬거리지 않는게
세상 이치라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우울했다
우울한 내 심정을 알아차린 남편이 대신 조의를 표했다
지난 유월 산에서 직접 캐다 담갔다고 선물한 천삼주는 아직 혀끝에 대지도 않았는데
가버리다니 한동안 술병을 건드리지 못할거 같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입구에서 사온 장미꽃을 병에 꽂으며
멀쩡하게 살아서 슬픔과 기쁨을 아는 지금이 최고라고 여겨진다
차라리 빳빳한 지폐로 주고말지 꽃 선물 같은거는 간질거려서 못한다는 남편이
결혼 삼십사년만에 처음으로 산 앙증맞은 장미 꽃다발이
삼십송이에 오천원 싸기도 싸다
하산후 언제나 흐리멍텅한 머리속이 오늘처럼 맑아 본건 처음이다
요즘 산야처럼 진한 녹색 옷만 입고 다닌 옛산우는 이제 진짜 푸른산이 되었다
설악이 된 너
너가 발인하는날 나는 길위에 섰다
잡풀속에 달개비꽃와 고개마다 무궁화꽃이 만발하고
이제 막 핀 구절초가 꽃길로 인도 하더군
오늘은 슬픈날 지난 추억이 되살아난다
남쪽 설악이 좋아 닉네임도 남설악이더니
뭐가 급해 흰눈도 없는날 설악으로 떠났냐
여름과 가을사이 바람이 쌩쌩 분다
텅빈 하늘에 흰구름이 미친듯이 지나가고
너의 영혼은 설악으로 날라가더군
머지않아 산새되어 설악의 불 단풍속에서
흰눈 덮힌 설악을 기다리겠지
설악골은 원없이 구경하시게나
작년에 걸었던 길위에 서보니
초록이 무성한 지금이
죽음앞에 절정이더군
2017년 9월1일 씀
글,사진-이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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