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 2
영남 제일관을 통과하여 조곡관으로 향해 가는길중에는
설화와 민요등 과거가 잔존하는양,볼만한것들이 많다.
지름틀 바우가 이끼옷을 입은채 길가에 앉았다.
지름을 짜는 도구인 기름틀을 앎아 붙여진 이름으로
지름은 기름의 경상도 사투리이다.
참깨,들개 콩등을 볶아 보자기에 싼 떡밥을 지렛대의 힘으로 눌러서 짠다.
받침틀위에 볶은깨를 올려놓고 누름틀을 덮어 누르면 기름이 흐르는데
이름이 붙여진 바위란다.
그밖에 등룡정이라는터가 남아있다.
등룡정은 현 서울시 종로구 옥인동에 있었던
사정(활을 쏘는곳,사장)이라고도 하고
삼청동의 운룡정,사직동의 대송정,누상동의 풍소정,필운동의 동과정과
더불어 서촌 오사정으로 불리어졌다.
이순신의 장인이며 스승이었던
방진이 후학을 양성하던곳으로 임진왜란 당시
명재상이었던 서애 유성룡과 최고 맹장이었던
원균이 함께 무예를 익힌곳이기도 하단다.
정자를 지어 불멸의 이순신을 찍었던 자리이다.
올림픽에서 금을 싹쓸이 하는걸 봐도
우리 민족은 궁의 민족이기도 하는게 틀림없단걸 안다.
활쏘기를 즐겼던 민족에게 일제강점기때
지들은 조총으로 무장하고 우리는 활쏘기를 금지 시켰다.
나무다리위에 천진난만한 소년이 놀고있다.
가뭄탓에 간신히 바닦만 가린 물속에도
송사리같은 갈겨니와 버들치가 살고 있었다.
생명이란 누가 덧없다 했던가,
악착같이 살고자 헤엄치는 작은 물고기떼가 숭고하다.
고려와 조선조 공용으로 출장하는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던 조령원터가 그대로 남아있다.
전체 면적이 600평이나 되었다는 조령원터에는 사방 돌담과
귀신영화 촬영지로 쓰였다는 초가집이 있었다.
달없는 밤에 사방 팔방에서 들리는 짐승소리가 가세하면
귀신도 나올만하게 생겼다
.
누구든지 올라서면 주인이 되는 넓은 바위가 무주암이다.
바위 아래에 무인 주점이 있어 술과 안주를 맘대로 먹고
길손들이 바위위에 앉아 맞은편 조령산 경치를 구경하다
갈때는 마신대로 주대를 놓고 갔다는
넉넉한 시골 인심이 바위에도 있단다.
트럼펫 소리가 울려펴져 자연스레 발길이 닿으니
그곳에도 과거길로 온 나그네를 모으는 주점이다.
막걸리 한잔으로 목을 축이고 옛노래에 빠진 그네들이
연주가 끝나자 박수로 화답한다.
아직 2관도 통과못한 나는 앉아 박수칠시간도 없다.
대형 관광버스도 지나가게 뻥뚫린 새재길은 관광길이 되어
흙으로 다져진 길이 맨들맨들 아스팔트길 같아
주위 경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에
옛과거길로 체험하는길이 군데군데 뚫려 있어
나는 그길을 선택했다.
일주일전쯤이 가장 붉었음직한 단풍이
지 아무리 붉게 오래 견디고 싶어도
보름을 못견디가 떨어진다는 이파리가 아직도 아름답다.
주막터에선 고소한 냄새가 나고
나무망치로 쳐서 손으로 만들어 인절미를 팔고 있었다.
나도 입구에서 애기 머리만한 홍시를 사서 들고온것을 꺼내
남편과 사이좋게 나눠먹고 또 길을 걸어야 한다.
쉴수도 없는게 단냄새를 맛고 달려드는 벌떼들에게
잘못하다가는 벌에 쐬여 현재로 빠져나가기도 전에
과거길에서 죽게 생겼다.
교귀정.
교귀정은 새롭게 도임하는 신임 감사와 업무를 마치고
이임하여 돌아가는 감사가 관인을 인수인계하던 곳으로
문경새재 용추폭포 옆에 위치한다.
문경 현감 신승명이 1400년대 후반(1466-1488)에
세웠다고 전한다.
구한말 불에타서 없어진것을 199년 중창하였다.
경상감사 도임행차하는 조선시대 "미암일기초"와
"탐라순력도"를 기초로 재현하였다고 한다.
무거운 돌담위에 세워진 교귀정위에 서니
지나는 사람들이 내발 아래 있다.
젊은 연인에게 그자리를 이임하고 나는 돌아섰다.
용이 꿈뜰거리어 소용돌이 헤치니
잠긴 하늘에 밝은 해가 새롭다.
갠 날 우뢰소리에 흰 무지개 뻗치니
황홀하구나, 누가 그 신비를 알리
조선 세종때 명신인 면곡 어변갑의 시구가 새겨진
화강암 비석이 눈에 띈다.
용추는 본래 팔왕폭포라고도 하는데
하늘과 땅의 팔왕과 선녀들이 놀았다고 전해진다.
"동국여지승람"문경편에는
사면과 밑이 모두 돌이고 그 깊이를 알수없으며
용이 오른곳이라고 전한다.라고 쓰였다.
용추(龍湫)라고 바위에 적혀있고 乙卯具志禎書라는 글씨는
숙종25년(1699)구지정이 음각으로 새긴거란다.
큰바위 힘이 넘치고 그름은 도도히 흐르는데
산속의 물 내달아 흰무지개 이루었네
성난듯 낭떠러지 입구따라 떨어져 웅덩이 되더니
그아래엔 먼 옛적부터 이무기 숨어있네
푸르고 푸른 노목들 하늘의 해를 가리었는데
나그네는 유월에도 얼음이며 눈을 밟는다네.
깊은 웅덩이 곁에는 국도가 서울로 달리고 있어
날마다 수레먀 말발굽이 끊이지 않는다네
즐거웠던 일이 그 몇번이며 괴로웠던 일이 또 몇번인가,
하늘땅 웃고 어루만지며 예와 오늘 곁눈질하네
큰 글자 무르녹은듯 바위에 쓰여져 있으니
다음날 밤에는 응당 바람비 내리리라.
이황이 이곳을 지나다 쓴시이다.
폭포라고 하기엔 너무나 찔끔거리는 물도 가뭄탓인가,
맑은 물이 흘러 시인이나 묵객들이 즐겨찾던
바로옆 넓적한 바위가 태조 왕건에서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여
인생이 찰나와 같은걸 알면서도
왜 그리 욕심을 부렸을꼬,
허허허 이렇게 덧없이 가는것을..
궁예가 목이 잘려 쓰러져가는 마지막 촬영지란다.
외눈밖이 궁예역은 명연기였다.
또 다른 바위에는
커다란 꾸꾸리가 살고 있어
물속의 꾸꾸리가 움직이면 바위가 움직였다고 전한다.
아가씨나 새댁이 지나가면 희롱하고
소원을 빌면 한가지는 들어줬다는 전설의 바위도 있다.
조곡폭포 아래 수직에 음각으로 새겨진
현감 벼슬아치들의 선정비군이 있다.
여러 바위와 조곡폭포를 지나서
드디어 제2관문인 조곡관에 도착했다.
선조27년(1594)충주인 신충원이 축성한곳으로 중성이라고도 한다.
숙종조에 관방을 설치할때 옛성을 개축했다.
관은 1,3관에만 설치 하고
이곳에는 조동문 또는 주서문을 설치
1907년 훼손되어 1975년에 복원한다.
복원한후 옛이름인 조동문이라 않고 조곡관이라 하였다.
조곡관을 통과해 바라보는 영남제2관의 경관이 빼어나다.
자연석을 맞추어 쌓은 돌담성벽이 운치를 더한다.
먹이를 노리는 매와 유사한 음암(매바위)와 소나무가 어우러져
여태 오면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같아 관광객은
위아래로 뒤로 돌아 사진찍기에 여념없다.
왜란당시 충주를 지키는 일은 오직 새재 중에도
가장 험하고 좁은 응암에 성을 쌓아야 한다 해서
이곳에 신충원이 성을 축조하였다.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께 방망이로 다 나가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홍두께 방망이는 팔자 좋아
큰아기 손질에 놀아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문경새재 넘어를 갈 제
굽이야 굽이야 눈물 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새재길 반쯤이나 자났나,
걸음이 팍팍할때쯤이면
문경새재 시무푸리 나무
도리께 놀이로 다 나가네,
문경새재 아리랑 노래 가락에 맞춰 걸어야
오르막이 계속되는 길이 지루하지 않을것이다.
오르면 내려가야 이치거늘 아직까지는 계속 오른다.
바위굴속의 기도터와 귀틀집을 지나면
임란전쟁시 제2진 본부를 설치했던 이진터가 나온다.
송림 신립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 수변사로 임명되어
선조가 친히 칼을 하사하여 격려받고
문경새재를 넘으려는 왜군을 막고자
이곳에 진을 친다.
험준한 산세가 뒤로 하고 있기 때문에 조령에 진지를 구축하자는
백전노장인 김여물 부장의 말을 거역한다.
한편 그가 인솔했던 충청도 출신 장병들은
산악전에 익숙치 않고 사기가 저하되어 있어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충주 달천강가에 배수진을 쳐서
죽음을 맞고 왜군들은 허수아비 머리위에 앉은 까마귀를 보고
새재를 넘었다는 이진터 주변에는 소나무향이 진동했다.
현위치는 동화원 해발 523m이다.
동화원은 높은곳에서보면 해가 뜨는것이 보이고
산에 꽃이 많이 피어 화려하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곳으로
70년대까지는 화전민들이 거주하다
현재는 한가만이 산장을 운영하고 있다.
길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고 쉬어가는 곳이다
제 1관문에서부터 5,3km를 걸었고
앞으로 1,2km만 걸으면 제3관문이 나오고
그뒤로는오던길로 돌아와야 할지
고사리 주차장으로 가야할지 나도 모른다.
시간은 벌써 4시를 넘어가고 주위는 어둑어둑해지는것 같고
내려오는사람만 많지 올라가는 사람은 문경에서 하루밤 묵어갈 산꾼으로 보인다.
30분만 가면 된다고 앞장서다 뒤돌아보는 남편이 원망스럽다.
바쁘다 보니 이길로 가면 장원급제길 인것을
장원급제는 고사하고 참가하는것으로 위로를 삼아야 할판이다.
무려 4시간을 걸어 도착한 제3관문은 높았다.
걸어온길을 뒤돌아보니 옷을 벗어가는 나무들과
소나무가 서있는 이길은 눈오는 겨울이 더 어울리는길이다.
조령관,
새재 정상에 위치하고 북쪽적을 막기위해 선조초에 쌓고
숙종34년(1708)에 중창했다.
1907년에 불타 훼손된것을 1976년 홍예문및 석성 135m와 누각을 복원하였다.
드디어 조령관을 빠져나와보니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길은
남쪽의 추풍령과 북쪽의 죽령 그리고 가운데 새재길이 있었는데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같이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미끄러져 영남의 선비들이
과거 급제를 위해서는 이길을 넘어야 한다며
청운의 꿈을 꾸고 과거보러가는
영남선비상이 우뚝 서있다.
백두대간의 조령산과 마패봉이 넘는 고개이기도 한다는
이곳은 산으로 둘러친 높은 곳이다.
고사리 주차장으로 내려가면 5시15분에 충주로 떠나는 막차를 탈수있고
아니면 왔던길로 돌아내려가 문경으로 나가는길 두가지가 있어
내걸음으로는 도저히 시간을 맞추기가 어렵다고 하면서도
왔던길 7km보다 2km인 길로 내려가기로 하였다.
오르기가 힘들지 내려가는것은 자신있어 뛰다시피 내려오다
아이하나 딸린 젊은 부부가 타고 있는 차를 세워 얻어타고 주차장에 다달았다.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넘어선 고사리 주차장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충청북도 괴산군이다.
고사리주차장에서 3문까지 올라가 2문1문으로 내려오는길로
새재를 넘었다면 좀더 쉬었을것을,살던대로 살아야지
과거로 돌아가는것이 오히려 어렵다는걸 알았다.
어사또도 쉬어간다는 수옥폭포 선전문구가 보이고
수안보 온천이 가까이 있어 산좋고 물좋은 곳에서
길손들의 휴식처로 안성마춤인것을,
막차인 버스를 타고 요금을 물어보니
한사람에 3400원이라 한다.
둘이면 6800원이니 거스름돈으로 3200원만 받으면 될것인데
잔돈이 없다는 기사의 떨떠름한 태도와 퉁명스런 말투는
내돈 내고 타도 그런데 돈없이 무임승차했다간 빰때기 얻어맞을 기세다.
동네 사람 몇몇이 탈뿐 버스는 수안보에 도착했다.
남편은 여기서 내려 서울가는 버스로 갈아탈까 말까 망설이다
뒷자석에 탄 아주머니"서울로 갈라면 수안보 보다는 충주가 낫시요."
하는 바람에 도로 의자에 앉아 기사의 눈치만 살피고 있는데
거스름돈 주려고 받은 돈을 돈통에 넣었다고 이랬다 저랬다 한다고 또 야단을 친다.
문경에서 새재까지 가는 버스 기사님도 어찌나 무서운지
서울로 올라가는 막차가 몇시인지 물어보고 싶어도 꾹 참았는데
경상도 남자가 무뚝뚝 하기로서니 내가 탄 버스 기사님처럼 퉁명스러울까
사울과는 다르게 거리마다 다르게 매겨지는 요금때문에
버스에 오르는 사람마다 어디까지 가는지를 물어 돈을 받으니 신경질도 날만하다.
시내로 나오면서는 교통카드도 사용하던데 아마도 그지역에서만 가능한것 같다.
궁금한것은 많아도 타고 내리는 무표정한 사람 구경하는걸로 만족하기로 하고
이십년은 전라도에서 살다 삼십삼년째 서울에서 살고 있는
내가 지금은 다정다감한 전라도 남자와 살지만 다음생은 경상도 남자와 살아볼라 했더만,
밥묵자,치워라,자자만 할까 무서워 그런 꿈은 접어야겠다.
긴장된 한시간이 흘러 충주로 나와
서울로 돌아왔다.
주말 막힌 고속도로를 뚫고 드디어 한강의 불빛이 보이자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과거길도 좋지만 산속에 갇힌것 같고 답답한 사람들이 무서워 환한 서울에서 살란다.
험한길 벗어나니 해가 이우는데
산자락 주점은 길조차 가물가물
산새는 바람피해 숲으로 찾아들고
아이는 눈 밟으며 나무지고 돌아간다
야윈 말은 구유에서 마른 풀 씹고
피곤한 몸종은 차가운 옷 다린다
잠못드는 긴 밤 적막은 깊은데
싸늘한 달빛만 사립짝에 얼비치네
새재에서 묵다,율곡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