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2013. 3. 9. 14:23일반산행

 

일시-2013년 3월 8일 오후 2시

장소-남산

만난곳-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 6번출구

일정-장충단공원(14:00))-국립 극장-남산 둘레길-안중근의사 기념관(16:00)

       저녁식사(남산 돈카스,18:00)-차한잔후 귀가(20:00)

참가자-박정근,손진,이윤정,제성숙,한인숙(이상5명,가나다순)

 

 

 

안개낀 장충단 공원 누구를 찾아왔나~

배호의 안개낀 장충단 노래가 생각나는 장충단 공원에

따스한 봄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남산의 항일정신이 이어지는 장충단 공원은

동국대와 신라호텔 사이에서 지금은 좀 초라해 보이지만

을미사변에서 희생된 영혼들을 추모했던 바로 그곳으로

민족의 아픔을 함께한 공원을 통과해 계단길로 올라가면

남산 꼭대기 봉수대와 타워가 금방인걸

다리심 길르러 나온 아줌씨들은  애써 빙둘러

국립극장으로 돌아 남산에 들어섰다.

 

1630년경에 창정된 유서깊은 국궁 도장인 석호정에서

기다리는 여인과 합류하여 봄을 알리는 새소리와

코끝에 전해지는 흙냄새를 맡으며 걷는 걸음이

부지런한 아줌마는 식솔들 아침 챙겨 먹이고 설거지 하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개운한 맘으로,

게으른 아줌마는 느러지게 한잠 자고 와서 그런지,

이른 봄날 오후 산책길은 가벼웠다.

 

 

 

 

 

공원에는 청계천을 가로질러 쌓은 돌다리로 물의 수위를 측량하던

관측기구인 수표교가 놓여있고 장충단비가 세워져 있다.

장충단비는

을미사변때 희생당한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한 비석이다.

1895년(고종32) 을미사변때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궁내부대신 이경직과 시위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많은 병사들이

일본군에 대항하다 죽었다.

고종황제는 1900년(광무4)에 이들을 위한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도록 장충단을 세웠는데 이때 비석도 함께 세웠다.

1910년 한일합방과 함께 장충단은 폐지되고 비석도 뽑혔다.

1920년대 후반에는 이곳에 벚나무를 심어 공원을 조성하고

이곳을 장충단 공원이라 하였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장충단비를 다시 찾아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에 세웠고 1969년에 이곳으로 옮겨겼다.

비석의 앞면에 새겨진 장충단(奬忠壇)은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황제가 쓴글씨다.

당시 육군부장이었던 민영환이 뒤비석을 쓰고 그내용은

장충단을 세우게 된 내력과 의미를 기리는것 이란다.

 

사명대사 동상도 높은곳에 있다.

대사는 조선의 승려로 1592(선조25)임진왜란때

의병을 모집해 의병활동을 한 승려이고

임란후 1604에는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강화를 맺고

포로가 되어갔던 3천5백명을 우리나라로 데리고 온 승려이다

 

이준열사(1859-1907)동상도 볼수있다.

함경북도 북청사람인 그는 초시에 합격해

1907년 고종의 밀명을 받고 4월22일 서울을 출발해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전 의정부 참찬인 이상설과

페테르브르크에서 주 러시아 공사 참서관 이위종과

합류하여 헤이그에 도착한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개장일 6월5일 의장을 방문하고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전했으나 일본의 반대로

참석할 자격을 얻지 못하자 울분을 참지못하고

곡기를 끊어 자연사로 헹간에 나도는 활복자살이 아니고

나라를 위하는 죽음이어 순국으로 전해진다

또,그의 죽음이 일본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설도 전해진다.

 

생사관(生死關)은 열사의시 중에서도 아주 유명하다.

인생이 죽는다는것은 무엇이며

인생이 산다는것이 무엇이냐

죽어도 죽잖은 것이 있고

살아도 살지 않은것이 있나니

그릇 살면 차라리 죽음만도 못하고

제대로 죽으면 되려 영생하는니

살고 죽는게 모두 제게 달렸다면

모름지기 죽고 삶을 바르게 힘쓰라.

지금은 만남의 장소로 많이 이용하는 장충단 공원에

들어서면 어떻게 살다가 죽어야하는 가르침을

이준열사를 보고 배우게 될것이다.

 

 

 

 

우리가 오늘 산책하는 남산은

해발 262m로 본래 이름이 인경산(仁慶山)이다.

종남산,열경산,마뫼등으로 불리던 인경산이 남산으로 불리기 시작한것은

조선태조 이성계가 1394년 풍수지리에 따라 개성에서 서울로

수도를 옮긴 다음부터다.

천도 당시부터 신성한 산으로 여겨진 남산은 백악산 낙산,인왕산과 더불어

한양의 내사산을 이루었고 서울성곽이 바로 이들 산능선을 따라 이어졌다.

 

남산의 또다른 이름은 목멱산인데

이는 한양천도후 남산꼭대기에 목멱대왕 산신을 모시는

목멱신사를 짓고 나라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지낸데서 유래한다.

그러나 지금은 남산에 목멱신사가 없다.

일제가 황국 신민화 교육을 위해 남산에 신사와 신궁을 세우고

신사참배를 강요하게 되면서 목멱신사는 제자리와 제기능을 잃었다.

현재 인왕산 선바위 아래에 있는 국사당이 바로 옛날의 목멱신사다.

 

목멱산 봉수대터는 서울에 있다하여 경봉수라고도 불렀었는데

전국의 봉수가 집결되었던곳이다.

봉수 제도는 신호체계에 따라 연기나 불을 피워서

변방의 긴급 사정을 중앙까지 전달하여 알리며

해당 주민들에게도 알려 빨리 대처하도록하는 일종의 통신수단이었다.

멀리 바라보기 좋은 높은 곳에 봉수대를 설치하여 불을 피워서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알아볼수있게 하였다.

 

전국각지에서 오는 봉수는 남산에서 집결하였고 남산봉수대는

제1봉수에서 제5봉수까지 다섯곳의 봉수대가 있다.

남산 꼭대기에 올라가면 볼수있는 봉수대는

1993년 김정호의 (청구도)등의 관련자료를 참고해서

남산의 다섯 봉수대중 한곳을 복원한곳 이란다.

 

 

 

 

 

 

 

 

  

남산이 시민공원으로 개발된지가 백년이 넘어

남산타워와 케이블카는 남산의 상징이 되었다.

완만한 북측 산책로,남측산책로와 가파른 계단산책로로

잠두봉 포토 아일랜드과 N타워까지 오를수 있다.

 

남산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연인들 데이트 장소로 인기가 많다.

세월이 흐르는게 자연의 이치이듯,나이들면 사랑도 변하고 미움도 변해

이세상에 변하지 않는것은 아무것도 없다는걸 알겠지만,

너는 내것이고 나는 니것이라고 사랑의 자물쇠를 꽁꽁 묶어 놓은걸보면

역시 청춘의 사랑은 유치하고 뜨겁다.

더 늙기전에 질투나는 사랑한번 해보고 싶은 아줌마는

벚꽃 피는 봄밤,서울의 야경이 반짝거리는 남산에 오르면

이루어 질수도 있다.

새로 단장한 화장실이 어찌나 크고 이쁘던지 살림을 차려도 될듯하다

 

 

 

 

남산에 있었던 일본신궁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모셔

조선 민족 정신을 바꾸려 했던곳이다.

메이지 천황 1925년에 창건 되었던 신궁은

1945년 일본을 패망과 함께 모두 철거되고

신궁이 있었던 본점자리는 과거 남산식물원이었으나

2006년 소나무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그리고 과학관 앞뜰에는 이또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함을 보거든 목숨을 주라.

 

 

여기서 구한말 우리는,

1876년 강화도조약에서 1905년 을사늑약까지

30년간 조선은 국난의 위기를 겪어야했다.

임오군변(1882)갑신정변(1884)동학농민전쟁(1894)

일전쟁(1894)을미사변(1895)러일전쟁(1904)등의

격변을 거치면서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해갔다.

 

강화도 조약은

1876년(고종 13)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 조약으로

공식 명칭은 조일 수호조약이며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한다.

 

임오군란은

1882년(고종19)강화도 조약 체결후 일본을 후원으로 조직된

신식 군대인 별기군과 차별대우, 봉급미 연체와 불량미 지급에 대한 불만으로

훈련도감 소속 구식군인들의 항쟁이다.

처음에는 우발적이었으나 나중에는 대원군의 지시를 받아 민씨 정권에 대항하며

일본의 배척운동으로 확대 되었다.

 

갑신정변은

1884년 (고종21) 김옥균,박영효,홍영식등 개화당이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는 정변이다

 

청일전쟁은

1894년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벌였던 전쟁이다.

청일전쟁 강화로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된다(1895,4,17)

시모노세키조약이 이또 히로부미 머리에서 나왔다니,

안의사가 안죽였으면 염병이라도 걸려 죽일놈이 죽을짓을 했다.

일본은 청국으로 하여금 조선을 독립시켜준다는 명분아래

만주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속셈으로 일차 관문인 한국을 정복하려했다.

 

을미사변은

1895년 고종32년 10월8일 조선주재 일본공사

미우라고로우의 현지 지휘하에 일본군 수비대와 낭인들이 경복궁을 습격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운 야만적 사건이다.

청일전쟁 종결후 일본과 러시아 갈등이 조선을 무대로 폭발하여

조선궁정내 반일세력의 핵심인 왕비를 희생시켰다.

 

러일전쟁은

1904년 조선반도를 보호하고 일본을 방어한 자위전쟁이었다고

일본 스스로 평가하는 전쟁에서 이기자 국민군국주의에 빠진 일본은

한국침략과 태평양 전쟁으로 이어지는 인류사적 죄악을 저지른다.

젊은 일본인들은 야스쿠니에서 만나자고 약속하며 전쟁터로 떠나

지금은 이백사십여만명의 위패가 있다한다.

사람을 파리잡듯 죽인 일본놈들은 죽일 놈들이다.

전쟁의 결과 일본은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조선과 중국은 자주적 개혁이 죄절되고

일본및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대상이 되어갔다.

 

 을사늑약은

1905년 11월17일 덕수궁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을 반대하는

참정대신 한규설을 다락방에 가둔채 이루어졌다.

구국을 위한 계몽운동과 의병투쟁에도 불구하고

외세에 기대 왕조를 지키려던 대한제국 황제는

국권을 빼앗기는 슬픈역사를 만들어 사실상 식민지 상태에 놓이고 말았다.

 

 

 

 

 

 

 

안중근 의사는 구한말 나라가 열강의 침략으로 소용돌이칠때

1879년 9월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어릴때 이름은 응칠이었고 그는 서당에서 한문 공부와 무술을 익혔다.

16세 나이에 결혼하여 슬하에 2남1녀가 두게된다.

그는 천주교에 입교하여 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고

빌렘 신부와 함께 교리를 전파한다.

 러일전쟁과 을사늑약으로 안의사의 삶에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

나라를 구하겠다는 구국일념으로 망명하여 교육과 의병활동을 한다.

 

안의사는 엔치아 카리마을에서 동지들과 단지 동맹을 맺고

왼손가락 무명지를 끊어 태극기에 대한 독립 넉자를 혈서로 써넣고

나라를 위해 이한몸 던지기로 결의를 다진다.

 

서른 한살이던 1909년 10월26일 대한의군 참모중장자격으로

하얼빈역에서 68세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코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 삼창하고 체포된다.

그는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저술한다.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화해와 민족공존과 나아가

동북 아시아의 연대와 세계 평화로 승화되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1910년 3월26일 그는 어머니가 손수 지은 무명 한복을 입고

뤼순 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된다.

 

우리에게는 원수지만 일본에서는 영웅이라는 이또히로부미는

1841년 지금의 야마구치현에서 하급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변변치 않은 신분이었지만 타고난 지략과 노력으로

메이지 헌법의 초안을 만들고 메이지시대를 주름잡는 대정치가로

45세에 총리에 오르면서 네번의 총리를 지낸자다.

헌법의 아버지라 부를만큼 일본에서는 위인으로 존경 받는단다.

기념관에는 하얼빈역에서 저격당시와 뤼순 감옥과

재판과정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남산에서 운동하고 꽃구경만 하지말고 한번쯤 안의사 기념관에

들어가보면 애국이 무엇인지,독립이 무엇인지 생각이 달라진다.

조국의 이름으로 살다가 조국의 이름으로 죽어간 안의사에

경의를 표한다.

안의사 그대는 진정한 민족의 영웅이다.

 

그나저나 어서 안의사의 유언대로 그의 시신을 찾아

가묘가 안장된 효창공원으로 와야할텐데,

후손에게 꿈에라도 나타나서 어디있다 말하지

혼령은 뭐하나 모르겠다.

 

 

 

 

유난히 긴겨울을 뚫고 찾아온 봄날,

집구석에 처박혀 세월간다 한탄만 하지말고

섬진강변 매화밭에서 그윽한 향기에 취하든지

아님 가까운 남산이라도 걸어서 짧은 봄을 만끽하자.

2013년3월11일 씀

 글 -李 貞

사진-孫 眞

참고-서울 여행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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