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인릉

2013. 5. 8. 20:53일반산행

재경 107회 웰빙 걷기

 

장소-헌인릉(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일시-2013년 5월8일 오전11:50

만난곳-지하철 3호선 수서역 6번 출구

일정-수서역(11:50)-헌인릉 정문(자가용 이용)-익릉-헌릉-점심(13:30,조선면옥에서 냉면)

      -상록수아파트-대모산-정상(293m)-수서역에서 귀가(16:00)

참가자-김선희,손진,이윤정(가나다순)

 

지하 수서역사를 빠져 나와 땅위에 오르니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게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것이라는 시인의 말마따나

이제 갓 새이파리가 파릇파릇 흔들리고 있는 판에

금세 매미라도 울어제칠 기세로 태양은 작렬하고

내일 비가 오려나 봄볕은 후덕지근하였다.

갑자기 번개 소집된 모임은 김씨녀와 손씨녀 그리고 이씨녀

삼인방으로 구성되었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지기는  커녕 금간 접시도 찰싹 달라 붙게

조근조근 말소리 발소리도 조용한 그녀들과 헌인릉 걷기는

짹짹거리는 새소리가 더 요란했다.

170m되는 제법 가파른 코스는 산책하며 땀나는 운동이 되겠는데

오르막은 숨차서 힘들다는 그녀덕에 한낮에 헉헉 거릴일은 피하고

매표소 입구쪽에 있는 인릉부터 탐방 하였다.

 

조선 왕릉은

세계 문화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519년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의 이념으로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로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하여 42개능중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완전하게  보존되었다.

42개 릉중 개성에 있는 태조원비 신의왕후능인 제릉과

정종과 정인왕후능인 후릉을 제외한 40개가 남한에

온전히 보존되어있다.

 

인릉은

조선의 23대 순조(1790-1834)와 순원왕후(1789-1857)의

능이다.

본래 파주 장릉(16대 인조)옆에 안장되었으나 1856년(철종7년)에

풍수지리 이유를 들어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한다.

이듬해 순원왕후가 숨지고 합장되었다.

인릉의 제향일은 매년 양력 10월20일이다

지금으로부터 백오십여년전 밖에 안된 인릉은 헌릉에 비해

문인석과 무인석 네개가 각기 다른 생김새로 능을 지키며

젊고 단순하고 깔끔하게 정돈 되어 있었다.

 

풍수에서 산을 용으로 보는데 용이 아홉번 꿈틀거리고 뻗어나간 자리에

명당이 있다한다.

왕능을 택지 할때는 사초지'강'과 봉분이 있는'혈'그리고 곡장뒤의'잉'을

중요시 한단다.

인릉의 잉 부분은 용이 꿈틀거림을 멈추고 생기를 모아 놓은듯

향하고 있다.

인릉을 감싸는 소나무가 모두 능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걸 볼수있다.

계단을 올라 능침 가까이 가보면 능 아래 확트인 초록숲 사이

현대식 건물의 지붕이 눈에 거슬린다.

보일락 말락 건물의 이름은 국정원 이름하여 국가 정보원이란다.

신분은 물론 숨길수 있는건 꽁꽁 숨겨야 제대로된 일을

수행하는 무시무시한 곳이다.

 

순조는

1800년 6월 정조가 승하하고 11세에 왕에 올라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는다.

어린나이에 시집와 왕실의 온갖 풍파를 지켜본 권력의 화신인

정순왕후는 명분에 따른 권력을 행사한 여장부로 왕의 나이 열다섯이 되자

바로 권력을 내려 놓는다.

이시기는 화폐경제의 발달로 농업층의 사회의식이 성장하고

세도정치 폐단으로 각종 비리와 참설이 유행 했다

벽파인 정순왕후는 정적인 시파와 남인을 치기 위해 천주교를 박해한

신유박해 을유박해로 인해 수많은 목숨을 빼았는다

수렴청정을 내려놓은지 얼마되지 않아 정순왕후가 죽자

순조의 장인인 김조준은 어린 왕을 모시면서 세도정치의 장을 연다.

안동김씨 세도 정권은 결국 여러 민란으로 이어져 이중 비록 성공치 못했지만

홍경래의 난은 농민층의 자각을 가져왔고 양반 사회인

조선의 붕괴 서막을 알린다.

 

 "이 아이가 타고난 운은 나에게 견줄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며

기뻐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을 기억하는 정조의 바램대로

순조는 정조의 빛나는 업적을 잇기 위해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백성에 귀를 기울이고 왕권 강화노력을 하였으나

백성의 탄식과 아픔은 실로 컸다.

이공(순조)는 집권초기에는 정순왕후 경주김씨 그후로는

김조준 안동김씨 두김씨 왕비 집안의 권력다툼 득살에

왕의 의지가 꺽이고 그의 뒤를 이를 효명세자가 일찍 죽고

건강도 좋지 못해 34년 재위기간의 정치 기강은 서서히 무너진다.

순조는 부인 2명에 1남 5녀를 두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돌 던지면 김씨 이씨는 꼭 맞는다는데

김씨와 이씨 사이좋게 살았음 좋겠다.

 

 

 

 

 

 

 

 

 

 

 

 

한낮의 곧은 햇살에 활짝 피어난 빨강 노랑꽃들을 지나쳐

오리나무 숲길 산책로를 따라가면 헌릉에 다달은다.

 

헌릉은

조선 3대 태종(1367-1422)와 그의 비 원경왕후(1365-1420)의 능으로

인릉과 함께 사적 194로 지정돼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다음으로

오래된 쌍능이다.

능 주변에 석물들이 많다.

망주석,혼유석,장명이 한쌍이고 석양,석호은 각 네쌍

문무인과 석마는 각 두쌍씩 배치되어 조선에서 가장 웅장한 능이란다.

 

태종은

태조의 자식들간 왕위 싸움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인물로

왕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두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왕위에 오른다.

신하가 개인적으로 병사를 거느리는 사병을 혁파하고

육조직계제를 통하여 왕권을 강화한다.

1405년 개경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옮겨 국방을 다지고

지금의 주민등록같은 호페법등록을 실시한다.

국가 전반에 걸친 개혁을 단행하여 거북선 개발과 신문고를 설치하여

조선의 기틀을 창립한 왕이다.

그의 부인은 여흥 부원군 민제의 딸로 1382년 이방원과 혼인하여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1400년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정비로 진봉되어

조선이 가장 위대한 왕으로 추대받는 세종을 낳았다.

 

상왕으로 물러 나기전인 1418년 태종이 방탕을 일삼는 장자인

양녕을 세자에서 패하고 충녕을 세자로 삼는다.

양녕은 정종의 애첩 또 매형의 애첩과 통정하는등,

특히 사극에서 많이 다룬 애첩 어리문제로 태종과는 극단에 처한다.

실록에는 마지막까지도 양녕에 대한 기대의 끈을 놓지못해 근심하다

통곡으로 세자를 패했다 전해진다.

상왕이 되어서도 1422년 56세 일기로 생을 마칠때까지

세종의 왕권 안정을 위해 노력을 했다.

홍살문에서 바라본 부부의 능침이 다정스럽다.

태종는 부인 10명에 12남 17녀를 두었다.

지금 세상에 조선의 윗전 남자처럼 부인 열명은

꿈에서도 맞아 죽을 일이다.

 

 

 

 

 

 

 

 

늦봄 아름들이 큰나무에 하얀꽃을 달고 줄줄이 줄기가 휘어진 나무는

북한에서는 구름나무라 불리어지고 우리는 귀룽나무라 한단다.

여름에는 까만 벗지가 달리므로 벚나무와 먼 친척뻘이고

가지를 꺽거나 껍질을 벗기면 냄새가 지독하여

옛날에는 파리를 쫓는데 이용하기도 했다는데

나무 주변에 맴도는 여름 날파리들이 많았다.

아우성거리는 오리나무 숲속의 소슬바람은 분명 봄비 기다림이 맞다.

태종의 기일인 5월10일을 전후하여 비가 오면

능침 앞에 놓여진 혼유석밑 네모난 홈속에 고인비를

백성들은 태종우라 한단다.

 

 

 

 

 

 

 

 

산벚나무 꽃잎이 떨어진 자리마다 연두빛 이파리 돋아나고

나무기둥에서 파란잎들이 자라난다는 오리나무는

녹음 그늘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무덤가를 걷다보면 지나간 역사의 비정함이나 준엄함은

온데간데 찾을길 없고 길건너 넘치고 들끓는 세상과는 다르게

맑은 공기와 계절이 바뀌어도 늘푸른 노송이 한가롭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역사는 학대 받은자의 승리를 참을성있게 기다리고 있다"는

타고르의 말대로 수백년전에 잠든 죽음의 흔적을 보면

백년이나 살까말까하는 인생 참아내지 못할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왕이나 되니 봉분 만들지 현충원도 만원이고 교회나 절이나 성당 종교단체에서

만들어대는 무덤땜에 삼천리강산이 무덤으로 변하면 큰일이라

요즘은 화장이 대세이다.

뜨끈한 장작불에 바싹 꼬실라 가루내서 훨훨 뿌리면 공기가 오염이라니

왕이 잠든 수목원 나무 거름으로 쓰면 최고지 더이상 바랄게 없다. 

 

점심시간 막간을 이용해서 헌인릉 걷기에 참가한 그녀와

차량 운전을 취미삼고 걷기를 특기삼은 그녀와

시원한 냉면으로 더위를 식혔다

그리고 남은 그녀와 둘이서 대모산 정상(293m)을 찍고 내려와

향수냄새와 땀냄새 풍기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지하철로 들어섰다.

 

 

 

 

 

 

오월의 산봉우리 가득찬 꽃 가지야,

봄 바람 매양 불어 적막한 언덕에 뿌려 주라.

 

연분홍 진분홍 그늘 사이로 날아든 새야,

봄 비 맞아 툭툭 털어낸 솔향기 날려 주라.

 

2013년 5월10일 씀

참고-박영규의 조선 왕조실록

       조선 왕릉 문화재청

글-李 貞

사진-孫 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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