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31. 19:42ㆍ여행
오늘이 백호해의 첫달을 보내는 마지막인걸 아는양 찌뿌등한 하늘은 온통 심술을 부린다.
뿌연 연무에 어쩌다 한번 들이미는 태양도 도망가버리고
아침 먹고 동물농장 끝나고 한숨자고, 점심먹고 나서도 아직 하루가 한참이다.
바람이나 쏘일겸,지난해 여름부터 개장된 광화문 광장에 나들이 삼아 마실을 갔다.
5호선 광화문역에서 하차하여 제일먼저 화장실부터 찾았다.
추워서라기보다 언제부터인가 담아두지 못하고 자꾸 배설을 하는횟수가 느는게
어쩔수 없이 나도 할매 되는 길을가고 있는가보다.
지상으로 나오는 입구에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는 신기한 동물이 양쪽에서
시민들을 쳐다보며 빙그레 미소를 띈채 유리창에 갇혀 바라본다.
살아있는 동물은 홀로 감금하면 눈물을 흘리는데 다행이다.
대한민국의 심장인 서울의 한복판 광화문은 조선의 얼이 깃든 궁으로 향하는문이다.
그문을 진즉부터 이순신장군이 지키고 있다.
그곳에 항상 서있던 사람처럼 대수롭게 여긴 장군은
무려 1968년부터 지금껏 눈을 부릅뜨고 조선의 정궁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지나는 시민을 바라본다.
내시경으로 본 장군도 여기저기 병들어가고 있다는데,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면 피가 강산을 물들이는 큰 칼을 차고
온갇 세상 풍파에 비바람과 눈보라를 맞은 세월이 40년인데 당연지사,
걸레질로 겉치레만 하지말고 속병을 고쳐 든든한 장군으로 거듭나길 바랜다.
충무공 이순신.
을사사화가 일어난해에 서울에서 태어난 순신은
할아버지 백록은 기묘사화에 연루되고
아버지는 벼슬하지 않아 생활고에 시달리다 외가인 아산으로 이사해 자란다.
공의 나이 서른둘에 식년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국경수비 야전에서 청춘 시절을 보내며
"함경도 일기"를 남긴다.
서른여섯나이에 전라도 고흥 발포진 수군 만호로 부임했다
병술년 공의 나이 마흔둘에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전근한다.
이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큐슈의 시마즈 일가를 타도하고 히데요시 1인권력자가 된다.
마흔일곱에 전라 죄수사로 부임하고 히데요시 조선 출병의 기미가 있고
다음해인 1592년 임진년 4월 12일에 여수 좌수영에서 거북선에 올라 총통을 시험발사한다.
전쟁은 시작되어 4월30일 임금은 의주로 피날길을 향하고 서울은 함락된다.
옥포만전투는 임진왜란 최초의 해전으로 승전한다.
그후 임금의 환도는 의주에서 서울까지 10개월이나 걸렸다.
2차 출정때 는 사천,당포,당황포,율포에서 적선 70여척을 부수었다.
장군도 어깨에 적탄을 맞아 피가 발꿈치까지 흘러내렸다고 전해진다.
3차 출정은 한산도앞바다 대첩이다.
남해안의 두물목에서 벌어졌던 국지전으로
수세와 공세,유인과섬멸,도주와역공,포위와 역포위에 대첩의 비밀이 있다.
적들의 피가 포구에 가득차 얼마를 죽였는지 헤아리지 못한다는 장계를 보내고
괴로운 밤을 보낸다.
싸움의 공로로 정헌대부로 승격한다.
1593년 삼도 수군통제사로 임명되어 최고 사령관에 오르나
전쟁은 소강상태에 이르고 흉년이 되어 군량미가 바닥나고 군량은 오지 않는다.
5년간 끌어온 전쟁에 굶어죽는 백성들이 넘쳐난다.
1597년
군공을 날조해 임금을 기만하고 가토의 머리를 가져오라는명령을 어긴죄목으로
장군은 서울로 압송되고 한달만에 출옥되어 백의종군한다.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지휘하였지만 참패하고
다시 이순신은 삼도수군사로 임명되어
9월 전선 12척으로 명량에서 크게 이긴다.
"필사즉생 필생즉사"
반드시 죽으려는 자는 살고, 반드시 살려는 자는 죽는다 는 말로 장졸들의 사기를 일으킨다.
장군은 백의종군길에 모친이 돌아가시고, 세째아들 이면은 정유재란때 마을을 지키다 죽는다.
임진왜란중에 남긴 "난중일기"를 보면 그의 기록정신은 특별하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몸이여,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니,
오사카의 영화여, 꿈속에 몸이로다."라는 유언시를 남기고 죽자 일본군은 철수를 서두른다.
그해 11월19일 노량의 물결이 사나운밤,
노량진 잎바다에서 싸우다 전사한다.
전투가 끝난뒤 그의 죽음은 알려졌다.
세종
이름은 이도, 자는 원정 으로
1397년 봄볕 가득한 오월에 아버지 태종 이방원과 어머니 원경왕후 민씨 사이에서 태어난다.
1418년 6월 태종의 셋째아들 충녕은 폐위된 양녕 대신에 왕세자에 책봉되고
그해 8월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한다.
그가 곧 조선의 4대 세종이다.
조선역사상 가장 훌륭한 유교정치와 찬란한 민족 문화를 꽃피워
후대에 모범이 되는 성군으로 기록된다.
태종이 이룩해놓은 왕권을 바탕으로 정치 문화 사회전반에 기틀을 확립한 시기이고
집현전을 통해 많은 인재를 배출한다.
조선의 재상으로 가장 오래 살았던 황희를 비롯하여
소를 타고 다니기를 좋아했던 맹사성, 최윤덕 신개등 의정부대신들의 보좌가
왕도정치에 커다란 보탬이 되었다고 할수있다.
관노신분인 장영실은 해시계인 앙부일구와 물세계인 자격루와옥루,천쳬관측기인 혼천의,
강우량 계측기인 측우기을 만들었다.
실로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했던 과학혁명이었다.
또한,조선통보라는 화폐를 주조했고 편경을 제작하여 국악의 기초를 확립하고,
로켓 화기인 신기전을 제작하였다.
김종서를 보내 두만강에 육진 압록강 방면에 사군을 설치하여
두만강과 압록강 이남을 조선의 영토로 편입하는 대업을 이루고,
이종두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해 왜구의 노략질을 일소시켰다.
후대의 학자들은 세종은 이지적이며 실리주의을 택하였고 때로는 과감한 결단력을 발휘하였다고 한다.
대왕의 가치관은 오직 백성임에 틀림없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만 나라가 평안하게 된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백성을 위한 그의 정치활동중 가장 큰 업적은 한글창제이다.
"어리석은 백성이 이루고자 할바 있어도 이르지 못하는경우가 많아
그런 백성을 편안하기 위함으로.."라고 훈민정음창제 이유를 밝히고 나라글을 만들었다.
천부적인 재능과 뛰어난 인성을 지닌 인간 세종도 당뇨로 고생을 많이 하다
1450년 2월 54세 일기로 세상을 뜬다.
왕의 능은 영릉으로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에 있다.
세종대왕 동상 후면 연결통로나 세종로 지하차도 이구로 진입하면
세종 이야기 전시관이 설치되어있다.
그곳에선 세종의 연혁에 맞추어 업적을 기리고
오늘의 시대정신으로 되살리는 소통의 공간으로 만들어져있다.
디지털로 체험할수있는 곳이 있어 아이들의 학습장으로도 제격이고
나이든 아줌씨와 아저씨들은 영어를 굳이 하지 않아도 이렇게 잘 통하는 우리글이있어 우리나라가참 좋다고 느낀다.
광화문 광장에 광화문은 복원중이라 가림막에 가려있고
시민을 위한다는 광장은 아이리스 촬영장으로,스노보드 대회장으로,
지금은 스케이트장으로 만들어져 아이나 어른도 썰매와 스케이트를 즐긴다.
세계속에 서울을 알린다는 목적이 굳이 놀이장소로 탈바꿈되어서야 되는가 하는 의구심들이 나오자
이달이 지나면 새로이 국제적 위상에 걸맞은 대안을 내놓는다고 한다.
광장은 이름답게 광장이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고 박남준 설치 미술가의 거북선 모형이
다 낡아빠진 테레비와 전축들을 한데 모아 만들어져 전시한다.
충무공의거북선은,
앞에는 용머리를 붙여 그입으로 대포를 쏘게 하고 등에는 쇠못을 꽃았다.
안에서는 밖을 내다볼수있어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수없다.
비록 적이 수백척이라해도 쉽게 돌진해서 포를 쏘게 되어있다.
광화문 광장을 빠져나와서 이십칠년전 쓴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맞선을 봤던 코리아나를 지나
낙엽지면 더 아름다운 돌담길까지 왔다.
우중충한 하늘과 거리가 오히려 한산한 겨울을 느낀다.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왜 헤어진다는 말이 있는지
아마도,수많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그길을 걸으며 꿈길로 향해서인가,
기울어져 가는 마지막 왕조의 궁을 둘러싼 정동길은
서양문물이 들어온 구한말 사교와 외교의길로도 유명했다.
대한문으로 입장하는일은 다음으로 미루고 청계천변으로 발길을 돌린다.
궁궐안, 앙상한 나무가지에 까치집이
그옛날,시골집 우리동네 고샅에서 보았던 그집이
그곳에도 있었다.
참고,박영규의 조선왕조실록.
김훈의 칼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