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6. 23. 18:21ㆍ여행
호국 보훈의달 유월엔 추운 봄날을 지나가고
유난히 시끄러운 여름을 맞이한다.
서해안에서 천안함이 침몰되어 46명 장병들이 희생되고
그들을 수색한다고 또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유가족 슬픔을 아는지 아파트 사이로 수줍게 내민
목련과 철쭉도 황망히 떨어져 버렸다.
침몰 원인과 결과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들이대도 나 몰라라 하는 그들이다.
아웅산 사태.kAL기 폭파,연평해전등
수없이 많은 일들을 벌여놓고도 모른체 했으니 세삼스러울것도 없다.
60년전에도 김일성과 박헌영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든든한 뒷 백을 믿고 저지른 일 아니던가,
그뒤 박헌영에겐 패전 책임을 물어 사형이 집행되었지만,
중국은 남한과 경제적 관계를 가지면서 정치적으론 북한을 지원한다.
안보리 결의냐 의장성명이냐를 두고도 의뭉하게 침묵하고
그때나 지금이나 북한을 잃으면 중국 안위에 도움이 안되니
"내가 이긴것은 이긴것이고 내가 진것도 진것이 아니다"라는 민족성을 지니고,
실사구시를 내세우는 중국은 한반도 안전을 파괴하는 어떤 행위도 규탄하고
반대한다는 원론적 입장만 고집한다.
미국입장에서도 이란과 아프가니스탄보다 천안함이 더 중요할리가 없다.
중국 러시아 미국 모두 60년전 과 같이 자기의 전략적 이익을 위해 행동할것이다.
내집은 내가 지켜야지 누구를 탓하면 안된다.
후일 역사는 진실을 말하리라.
한국전이 난지 60주년이라고 방송과 신문에선
연이은 특집이 쏟아져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고 있어
나라 위해 바친 넋들이 숨쉬는 현충원에 들러보기로 하였다.
1950.6.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이 남북 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에 결쳐 불법 남침
1950.6.27일 대한민국 임시수도 대전으로 이전
1950.6.28일 북한군 서울 점령
1950.7.7일 16개국 유엔연합군 결성
1950.7.8일 대한민국 임시수도 대구으로 이전
1950.7.19일 북한군 대전 점령
1950.8.18일 대한민국 임시수도 부산으로 이전
1950.8.31일 북한군 낙동강 전선까지 진출
1950.9.15일 맥아더 인천상륙작전
1950.9.28일 연합군 서울 수복
1950.10.19일 연합군 평양 탈환
1950.12.14일 중공군 참전으로 연합군 평양 철수
1951.1.14일 연합군 서울에서 후퇴
1951.3.14일 서울 다시 수복 이후 소련이 북측에 가담
1951.7월 정전회담 개시
1953.3월 스탈린 사망후 전쟁중단 선언
1953.7.27일 휴전협정 체결로 현재까지 지속
이상은 6.25의 정석으로 교과서에도 나오는 한국전 역사이다.
60주년 6.25를 기념한다는 말이 맞는지 모르지만
잊고 싶은 과거 전쟁의 참상을 방송과 언론은 연이어 보도하고 있다.
전쟁세대는 이미 죽거나 늙고 병들었고
전후세대는 언제 그런일들이 있었는지,남침인지 북침인지
관심도 없는사람이 태반이다.
남북을 갈라론 철조망과 끊겨버린 철로를 바라본 후에야
비로소 우리가 분단된 나라임을 실감한다.
나라위해 목숨 바친 혼령들이 잠든 현충원에 가보면
전쟁이 남겨준 선물은 죽음뿐이라는걸 안다.
지하철 동작역에 내려 현충원 후문 방향으로 나오면 계단이 있다.
집으로 돌아오는길에 알았지만 정문으로 향하는 방향으로 나가면
쉽게 현충원 안으로 들어갈수가 있다.
앞문으로 안들어가고 뒷문으로 나를 안내한 남편의 의도는
어떻게든 등산을 시키고자 했던게 분명하다.
국립묘지를 빙 둘러 울타리친 철조망을 오른쪽으로 끼고 오른다.
가슴 답답한날 내가 사는 14층 아파트까지 걸어오르는 연습을 했어도
아침나절 계단 오르기는 힘에 겨웠다.
동네 마실 나오듯이 오르는 아줌마들은 아마도 이 동네사람 인가보다.
헐레벌떡 숨차는 나보고 277계단 밖에는 안된다며 웃는다.
유골을 누가 헤손이라도 하는양
높은 벽돌 담에 철조망까지 무시무시하고
산책로는 많은 발길이 지나다녀 매끌매끌 윤이 난다.
흰꽃이 떨어져버린 아카시아 나무잎만 그늘을 주고
발길 닫는 군데군데 어릴적 공동묘지에 놀러갔다 맛있게 따 먹었던
뱀딸기가 있어 맛을 보니 세월따라 입맛이 변했나 아무 맛댕거리가 없다.
내가 그때 이름으로 국민학교 다녀와 책가방 팽개쳐두고
늘 쑥 깨고 토끼풀 뜯으러 다녔던 공동묘지는
지금은 우석대학교 건물이 수많은 해골을 밟고 있다.
밤이면 혼령들이 뛰쳐나와 학교 교정을 운동삼아 거닌다는 믿거나 말거나설이 있다.
정확히 몇사람의 넋을 보관했는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수만개의 비석들이 즐비했다.
사망한 장소와 날짜 발견된 날짜가 기록되어 줄 맞춰 선 장병들은
노란꽃과 빨간꽃중 하나를 지급받았다.
죽어서도 차별은 있어 대장에겐 높은 자리에
비석과 꽃도 졸병보단 좀더 큰것이 놓여져 있었다.
작년 뜨거운 팔월에 돌아가신 고 김대중 대통령 묘는
우리 민주주의 초석을 쌓은 업적에 비해 화려하지 않게 정비돼 있었고
봉분위에 잔디는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한체 군데군데 얼룩이 있다.
유골 헤손 위험이 있다하여 옆에는 경비 초소가 있어 묘역을 지키고 있었다.
군사 독재시대에 받은 고문으로 줄곧 다리를 절며 한평생을 살다 간 분이다.
눈덮인 들판을 걸어가는데
발걸음 하나도 어지러이 마라
오늘 내가 걸어가는 발자취는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것이니.
이상은 김구 선생의 글귀로 그의 좌우명이었다.
1961.5.16 쿠테타 성공으로 18년간 권좌에 올라
대한민국 산업화의 결정적인 역활을 한
고 박정희 대통령 부부 묘는 화려한 돌침대위에 있었다.
아마도 국립묘지 중에 제일 명당자리임에 틀림없다.
햇볓 잘든 높은 언덕위에 앞에는 한강이 내려다 보이고
뒤에는 나즈막한 산으로 병풍을 친 소나무가 많다.
전쟁뒤에 페허가 된 나라를 일으키고
거지 같은 국민들을 먹여 살렸다.
그 시대의 새마을 운동이 후진국에선 본보기로 여겨진다 하여
다시금 그를 생각하는사람들이 있다하나
잊을수없는 장기집권에 유신독재는
공산국가가 아니어도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민주와 평화를 추구했던 대통령과
어쩔수없는 독재와 반공을 추구했던 대통령은
낮은곳과 높은곳에 따로따로 누워있었다.
젊은날부터 티격태격 싸우시던 두분
혼령이 되어서도 술한잔씩 하며 나라 걱정을 하지 않을까싶다.
우측으로 오르는 언덕위에는 1948년 초대 대통령
고 이승만 대통령부부 묘소가 있다.
스물네살 젊은 나이에 고종황제를 폐위시키고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려는
쿠테타 음모에 가담한 혐으로 한성감옥에 투옥된 그는
종신징역선고를 받고 5년7개월 감옥생활을 하기도 한다.
1904년 민영환과 한규설이 그를 밀사로 발탁해
미국에서 학사 석사 박사를 거치며 독립외교를 한다.
한국전이 발발되고 휴전협정이 진행되자 끝까지 북진통일을 주장했던 그가
27000명이나 되는 반공포로를 석방하며 행동으로 옮겼으나
유엔군에 의해 931명이 재 수감되는사건도 있었다.
아이젠하워는 우방대신 적을 하나얻었다고 하고
처어칠은 이승만을 배신자라고하였다.
로버트 특사가 파견되어 상호보호조약과 경제 협조를 지원받기로 하고 휴전에 동의했다.
어떻게든 통일을 해보려고 했던게 반세기가 넘는 갈라진 조국은 아직이다.
3.15부정선거를 치른 이승만은 1960년 4.19의거로 인해
그해 4.26일 오후 1시에 하야 담화 방송을 하고
이틀뒤 사저인 이화장으로 돌아온다.
외국인 아내와 나란히 누운 묘소엔 들르지 않고 내려왔다.
청보라 작은 구슬모양을 한 나무가 아름답다.
장군들의 묘역을 가운데 두고 쫙 피어있는 꽃나무는
보기와는 다르게 별 향기는 없다.
장군 유가족이 쉬어갈수 있도록 마련한 쉼터에서 잠시 앉아 쉬면 좋으련만
내가 잠시 목을 축이고 의자에 앉아 쉬는 동안에도
남편은 서서 안개낀 산들을 바라본다.
오르락 내리락 산책길을 세시간은 걸은것 같은데
앉아 쉬는 나까지 불안하게 굵은 다리로 서 있다.
국립현충원 묘지에는 얼마나 많은 이름들이 있는지
부르다가 죽을 이름들이 그곳엔 참 많았다.
그의 영구차가 방풍 방습된 집에 고이 모셔져 있는걸보니
아마도 국립묘소는 고 박정희 대통령을 위한 장소로 보인다.
대통령 또는 국회의원 나라의 고위층이 큰일을 도모하고자 할때
돌아가신 호국영령 들에게 찾아가
묵념을 하고 자신의 신념을 공고히 하는 장소이다.
현충탑 양측에는 늠름한 군인들의 동상이 있어
이곳에 오는 사람들의 옷매무새를 만지게 된다.
엄숙한 현충원에 등장한 신랑신부와 함께 현충문앞에 섰다.
봄 가을 주말에 공연되는 육해공 삼군과 해병대 포함
모든 국군을 대표하는 시험묘기와 조선의 전통 무술을 연기하는 날이었다.
관악대 음악에 맞춰 절도있는 움직임이 박수를 많이 받았다.
사십여분이나 이어지는 청년들의 늠름한 모습에 눈이 즐겁고
총,칼,창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지만 잘도 돌리고 던지고 난리도 아니다.
싸움 구경이 제일 재미있다더만 오늘 공짜 구경한번 늑신나게 잘했다.
장마철 후덕지근한 날씨에도 장정들의 힘찬 묘기구경에
흐뭇한 시간이 지나가고,
현충원 문밖으로 걸어나오는 내내
내아들은 어떤 군대를 가야할지가 걱정이 된다.
엊그제 기저귀 찻던놈이 벌써 커서 군대 걱정을 하다니 세월 참 빠르다.
정문을 통과하기전 "시원한 물 한잔 줄까?"하며
남편은 아직도 얼음이 녹지 않은 물을 준다.
찌그락 짜그락 하며 다녀도 우리 부부가 남들 눈에는 부러운지
문을 지키던 경비가 "두분 참 좋아 보이네요"라고 말을 건넨다.
점심으로 사온 찰쌉떡과 까배기 외엔 먹을게 없어 애꿎은 물만 들이켜서
서너시간 동안 물배만 찬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