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1. 13. 22:51ㆍ여행
상큼한 공기가 이제야 진정한 가을 날씨가 된듯
가로수 은행잎들도 무더기로 노란색이다.
한번도 가본적 없는 문경새재길을 가고자 길을 나섰다.
전라도가 고향인 내가 영남의 과거 선비길을 밟는것이다.
놀러 다니는것도 체력이 있어야 하지,
시월 한달 무리한탓에 문경에 다녀온 며칠째 아직도 제자리를 못찾고 있다.
4시간 걷기위해 왕복 8시간차를 탔으니 피곤도 할만하다고 하니
투덜댈거면 발이라도 빨라야지 혼자가는것보다
그런 나를 데리고 다니기가 더 피곤하다고 남편이 한술더 뜬다.
제일 먼저 눈이 풀리고 시고 따끔거려 컴퓨터와 신문 글씨도 흐리다.
자가용을 타고 다니면 편하게 구경을 할텐데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진정한 여행이라며 버스를 미리 예매해서 물릴수도 없단다.
동서울터미널 9시 20분에 출발해서 낮 12시면 도착한다는 버스는
오늘이 또 노는 토요일이라 오후 1시가 되어서야 목적지에 다달았다.
초라한 문경터미널에 도착해보니 백두대간으로 연결되는 주흘산과 조령산으로
둘러쌓여 있는 조용한 곳이었다.
1500원버스를 타고 10분만에 도착한 주차장엔
관광버스와 자가용으로 만원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이제는 과거길도 식후경이다.
문경새재 아리랑이 적혀있는 식당에 들어가니
벌써 청국장 먹을 시기가 다가왔나 청국장 냄새가 구수하다.
일인분에 팔천원이면 다소 비싸편이나 자반 고등어 한마리가 구워져 나와
방금 퍼온 뜨거운 쌀밥에 청국장을 비벼 고등어 반찬을 곁들여 맛있게 먹었다.
서울에서 먹던 심심한 청국장보다는 청량고추를 넣어 매꼼하고
그래도 전라도 청국장맛이 제일인거 같다.
인심좋은 약돌돼지 삼겹살에 호사춘 한잔하라며
길가에서 구워대는 돼지고기 냄새가 과거길로 가기도전에 코를 진동한다.
문경새재 초입에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이라는 명패와 함께
갓쓰고 도포입은 선비상이 서있다.
전통사회의 구심점을 이루었던 지성과 인격의 상징일뿐아니라
우리 역사의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끊임없이 미래를 창조하는
아름다운 한국인을 상징한다고 선비상을 성명하고 있다.
유교의정신을 이어받은 영남 선비들의 과거길을
가을의 단풍의 절정에 나는 진입하려한다.
조선 태종 14년(1414)년 개통된 관도 벼슬길로 조선시대 옛길을 대표한다.
삼국과 고려때는 문경 관음리에서 충북 중원군의 수안보로 통하는 큰길인
하늘재가 있었고 문경 각서리에서 괴산군 연풍으로 통하는 소로인
이화령이 1925년 신작로로 개척되어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가장 큰길이 되었다.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상에 가장 높고 험한고개이다.
새재는,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또는 억새,풀이 우거진 고개이다.
한양에서 충청도 동북부 지방을 거쳐 경상도의 동래까지 뻗은 길이
남로 또는 영남대로이며 부산도가 그 종점이었다.
조선 태종때 조령로가 개척되고
선조 27년(1594)에 제2관문인 조곡관 설관
숙종 34년(1708)에 제1관문인 주흘관과 제3관문인 조령관이 설관되었다.
조선후기에 산불됴심비 건립과 조령산성 개축되었다.
연남의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을 오가던 유서깊은 문경새재
조상의 애환과 정취가 깃들고
숱한 유래와 전설을 간직한 조령계곡
이라 적힌 새재비가 방문객을 맞이한다.
남쪽의 적을 막기 위해 세워진 주흘관이 멀리보인다.
정면3칸과 측면2칸으로 팔각지붕으로 만들어진 주흘관이
영남제일관이란다.
좌우로 길게 연결시킨 성벽이 파란하늘과 단풍산이 어우러져
과연 이곳 문경새재가 천연의 요새임에 틀림없는것 같다.
이 천연의 요새를 이용하지 못하고
달래강에 배수진을 친 신립장군의 애환이 서려
이중 삼중으로 둘러친 산새가 달라 보인다.
과거로 들어가고 나오는 사람들 옷매무새는 왈록달록하고
바로 엊그제까지 치뤄진 사과축제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다.
조선의 옷으로 갈아입고 이길로 드러야 제격인걸,
생각만 가지고 떠나는 과거길이 될것이다.
폐가에서 초가 기와 양반 그리고 대궐까지
그대로 조선을 옮겨다 놓은것같은 이곳은
KBS촬영장으로 2000년 2월23일에 완성되어
태조왕건, 제국의 아침, 무인시대, 대조영등이 촬영되었고
2008년 4,16일 과거 고려시대 배경을 허물고 조선시대 모습으로 준공하여
광화문,경복궁,동궁,서운각과 궐내각사등
지나다니는 사람만 빼고는 겉으로보면 영락없는 조선이다.
대왕 세종과 천추태후,김만덕,그리고 제중원 내가 봤던 사극이
모두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한다.
시공을 잃어버린채 잠시나마 집중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진즉에 거실에서 쫓겨나와 안방에 하나밖에 없는 지맘대로 칼라 테레비는
거의 흑백으로 투영되어 사극에는 완성마춤이다.
20인치 상자속으로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고 울고 웃고 하는 바보가 되기도 한다.
요즘엔 아침마당과 자이언트 그리고 새로 시작된 근초고왕을 볼뿐
아줌마들이 많이보고 공감한다는 주말드라마는 남편몫이 되었다.
왕자의난 실패로 유배온 왕족의 막내딸 옹주는
팔다리 튼튼한 남편을 맞이하여 봄에는 씨앗뿌려 농사짓고
가을에는 온갖 가을걷이로 풍성한 밥상을 차려
아들딸 셋이나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전설은
여기 초가쯤이 잘어울릴것 같다.
마당 한가운데 걸어놓은 가마솥에 불을 짚히면
금방이라도 옥수수와 감자가 쪄진다.
산수유와 오미자를 따서 음료를 만들고
칡이랑 달래 머루로는 술을 담글것이다.
문경 박달나무 향을 넣은 지지미를 붙여내면
선비님네 발걸음이 가벼운 과거길이 될것이다.
제중원에서 역관의 딸과 백정의 아들이
사랑을 꿈꾸며 자전거도 타고 인력거도 타고,
손을 잡고 걸었던 그길이다.
초가집서도 살아봤으니 한번쯤 이런 기와집에서도
살아 대청과 마루 안방을 버선발로 다녀야 되지 않겠나,
낮은 흙담이 얼마나 운치가 있는지,
평창동 높은 콘트리트벽 주인은 직접 봐야 한다.
그놈 무슨죄를 저질러 주리를 트는 자리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곤장대와 춘향이갓인듯 고문시 사용했던 기구가 실제 나무이다.
일회용이 아닌 석재와 나무로 만들어진 궁과 집들이
지금 살아도 손색이 없을것 같다.
등산객보다 관광객이 많아서 돈벌이가 되도록 만들어진 촬영장이다.
제법 그럴싸하게 설치되어 있어 정신없이 구경하다가
이러다 어느세월에 저높은 조령관까지 올라가나 하고 돌아서니
벌써 내려오는 사람들이 더 많다.
깃발과 명패를 베낭에 메고 내려오는 사람들은
모두 화난사람 모양 무뚝뚝한 표정에 발길질을 해대듯 씩씩하게 걷는다.
산악회에서 단체로 온 등산객들은
새벽부터 산을 한바뀌 돌고 내려오는 자들이란다.
슬슬 양반님네 과거길이나 구경 나온 나하고는 다른 사람들이다.
꼭 저러면서 살아야되나 의구심이 들라치면
나이 많은 늙은 할머니와 꼬마들도 올라간다고
빨리 걸어가지고 재촉을 해댄다.
아무튼 가긴가야지,오늘 중에는 가겄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