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1. 28. 14:28ㆍ일반산행
마른잎 떨어지고 바람부는 토요일 주말 오후
세번째가 되는 남산 방문은 점심을 든든히 챙겨먹고 시작했다.
서울역 11번출구로 나와 시작한 걷기는 대우과 힐튼호텔이 우뚝한 빌딩을 왼편에 두고
후암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남산에 오르는길이다.
휙휙 바꿔가는 전자제품에서 건전지를 꼽아야 찍어지는 내 디카는 이제는 고물신세이다.
건전지를 사서 들고 남산입구를 알리는 표지판을 따라가니
새로 장단한 성벽이 너무 깨끗해 오히려 낫설은 서울성곽이 나온다,
해발 243m인 남산은 본래 이름이 인경산(仁慶山)이다.종남산,열경산,마뫼등으로 불리던 인경산이 남산으로 불리기 시작한것은 조선태조 이성계가 1394년 풍수지리에 따라 개성에서 서울로 수도를 옮긴다음부터다.천도 당시부터 신성한 산으로 여겨진 남산은 백악산 낙산,인왕산과 더불어 한양의 내사산을 이루었고 서울성곽이 바로 이들 산능선을 따라 이어졌다.
이성곽은 사적 재10호로 1396년(태조5)에 쌓아서 만든것으로 조선시대의 수도인 한양을 에워싼 도성이다.
1422년(세종4)에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바꾸고 여장을 쌓은 성벽을 터 높게 만드는 보수공사를 하였다.
1704년(숙종30)에는 취약한 부분을 튼튼하게 고쳤고 영조때에는 동쪽 성곽에 적을 쉽게 방어하고 감ㅁ시할수있는 치성을 쌓았다.
성곽 둘레는 약 18km에 높이는 대략 12m가량으로 한양을 둘러선 북악산, 인왕산,삼각산,낙산의능선을 이었다.
북류칙한 지형때문에 약간씩 틀어졌지만 사방에 대문을 내고 그사이에 소문을 열었다.
4대문은 동쪽 흥인지문,서쪽 돈의문,남쪽 숭례문,북쪽은 나중에 숙정문으로개칭
4소문은 동북 홍화문(뒤에 혜화문으로개칭) 동남 광희문,서북 창의문 서남 소덕문(뒤에 서덕문으로 개칭)
흥인지문 앞에만 옹성을 두었다.
세종과 숙종때 쌓은 성벽은 그것을 만든 방법과 돌모양이 모두 달라 시대 변화를 알수있다.일제 강점기에 근대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성벽과 성문은 훼되고 일부만 남았으나 해방이후 현재까지 제모습을 찾으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초기에 쌓은 성벽은 막돌을 이용하여 성벽밑에서부터 위로갈수록 크기를 줄이는 방식을 이용했다.
세종 연간에는
다듬은 화강암을 사용하여 면석은 위아래를 달리하여 위로갈수록 작고 네모난 모양으로 가공하고
아래는 큰돌을 장방향및 방형으로 치석하였다.
면석과 면석이 맞닿는 부분을 가능한 빈틈이 생기지 않도록 밀착시켰다.
숙종 연간에는
정방향으로 다듬은 면석을 써서 바른층으로 성벽을 쌓았는데 성돌의 규격은 거의 비슷하다.
지반의 높낮이가 달라지는 지점에서는 성돌을 턱물림하고 맞댄면을 치밀하게 조치하여 구조 안정성을 높였다.
이끼의 색깔과 두께로 보아 몇백년은 더 지난 세월을 두께를 볼수있다.
김유신장군 동상을 지나쳐
김구동상이 있는 공원까지 성벽을 따라 걸어야 나온다.
공원은 새로 조성하느라 출입금지였고
김구 동상만이 오른손을 들어 유세장의 고 김대중 대통령이 자주 사용하던 포지션으로 서있다.
김구 선생은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부친 김순영과 .곽낙원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동학에 입도하여 1894년 9월 탐관오리의 척결과 척양척왜를 외치며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공략하였으며
1896년 3월에는 변복한 일본인 중위를 살해하여 사형을 언도받았으나 광무황제의 특명으로 목숨을 건질수 있었다.
이후 1907년 독립지사들의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3,1만세 시위로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더욱 심해지자 상하이로 망명하여 한인애국단등을 조직하고
이봉창,윤봉길등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임시정부의 주석을 역임한후 광복후에는 임시정부요인들과 귀국하여 모스크바에서 열린 3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사반대운동을 추진하였다.
1948년4월19일 남북협상차 평양을 다녀오는등 민족통일 을 염원하던 선생은
1949년 6월26일 경교장에서 통일을 반대하던 세력의 사주를 받은 안두희의 흉탄에 맞아 서거한다.
선생의 유해는 온국민의 애도속에 7월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으며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위해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김구 동상앞에서 잠시 머문뒤
길건너 계단을 오르면 예전엔 어린이회관으로 남산에 오르는사람마다 그건물앞이 사진찍는 장소였던
서울시 과학 교육관이 나온다.
조선의 신궁에 오를때도 돌계단이 있었을터,가파른계단이다.
조선의 신궁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모셔 조선 민족 정신을 바꾸려 했던곳이다.
메이지 천황 1925년에 창건 되었던 신궁은 1945년 일본을 패망과 함께 모두 철거되고
신궁이 있었던 본점자리는 과거 남산식물원이었으나
2006년 소나무공원으로 조성되었다.
과학관 앞뜰에는 이또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그의 최후의 유언은
하얼빈공원곁에 뼈를 묻었다가 훗날 조국으로 반장해달라고 했는데
아직도 우리는 그의 뼈를 찾지 못하는 신세다.
일일불독서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 口중生荊棘)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아니하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
1908년 6월두만강 전투때
우리들의 소원을 단 한번에 성공하지 못하면 두번 세번 열번 백번 이라도해보고
올해 안에 안되면 내년에 해보고 십년 백년이 걸려도 좋다.
우리대에 안되면 아들대 또 손자대까지 가서라도
독립을 되찾고야 말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결의에 찬 말들이 공원을 가득 메운다.
안의사 공원에
고 박정희 대통령의 민족정기의 전당이라는 글씨가 있다.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함을 보거든 목숨을 주라
1876년 강화도조약에서 1905년 을사늑약까지 30년간 조선은 국난의 위기를 겪어야했다.
임오군변(1882)갑신정변(1884)동학농민전쟁(1894)청일전쟁(1894)을미사변(1896)러일전쟁(1904)등의 격변을 거치면서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해갔다.구국을 위한 계몽운동과 의병투쟁에도 불구하고 1905년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강제되면서 한국은 사실상 식민지 상태에 놓이고 말았다.
안중근의사는 이러한 소용돌이 와중에 1879년 9월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어릴때 이름은 응칠이었고 그는 서당에서 한문공부와 무술을 익혔다.
임오군란(壬午軍亂)은 1882년(고종 19년; 임오년) 음력 8월에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일본의 후원으로 조직한 신식군대인 별기군과 차별 대우, 봉급미 연체와 불량미 지급에 대한 불만 및 분노로 옛 훈련도감 소속의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병란 및 항쟁이다. 처음에는 우발적이었으나, 나중에는 흥선대원군의 지시를 받아 민씨 정권에 대항하면서 일본 세력에 대한 배척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갑신정변(甲申政變)은 1884년 12월 4일(고종 21년 음력 10월 17일)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 개화당이 청나라에 의존하려는 척족 중심의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정권을 수립하려 한 정변이다
청일전쟁은
을미사변(乙未事變)은 1895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일본 제국이 조선을 침략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인 명성황후 민씨가 경복궁(景福宮)에서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지휘하는 일본 낭인 등에게 시해된 사건이다. 명성황후 시해참변 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라고도 부르며, 당시에는 을미년의 변(乙未之變) 또는 을미년 팔월의 변(乙未八月之變)[1]이라고 불렀다. 러일전쟁은
1876년(고종 13)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조약. 공식 명칭은 조일수호조약이며,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한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일본은 이미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프랑스·미국 등에 왕정복고를 통고하는 한편, 대마도주 무세[宗義達]를 외국사무국보(外國事務局輔)로 임명하여 조선에 대한 국교의 재개를 요청하는 국서를 보내왔으나 조선은 서식과 직함이 다르다 하여 국서의 접수를 거부했다. 그러나 일본은 메이지 유신 과정에서 생겨난 사족(士族)들의 불만을 밖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고, 또 구미 제국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다른 나라의 문호를 개방시키려 했으며 조선을 그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한편 국내에서도 개화세력들에 의한 문호개방의식이 자라고 있었고 민씨정권으로서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국과의 분쟁을 피하고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청국도 조선에 미국·프랑스와의 국교수립을 권고하고 일본의 대만정벌 소식을 접하고는 조선의 대일본정책의 전환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세에 편승한 일본은 부산항에서 함포시위를 벌여 조야에 충격을 준 후, 강화도에서 운요호사건을 유발함으로써 마침내 1876년 2월 27일 전권대신 신헌(申櫶)과 특명전권판리대신 구로다 기요다카[黑田淸隆] 사이에 12개조로 된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제5조, 조선은 부산 이외의 두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하여 통상을 허용한다. 제7조, 조선은 일본의 해안측량을 허용한다. 제10조, 개항장에서 일어난 양국인 사이의 범죄사건은 속인주의에 입각하여 자국의 법에 의하여 처리한다. 영·일조약(1858)을 모방한 이 조약의 체결로 조선은 일본에 부산·원산·인천의 3개 항구를 개방하고(제5조) 치외법권을 인정했으며(제10조), 일본화폐의 통용과 무관세 무역을 인정했다(통상장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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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의사가 31세 노령 카리에서 결사동지(독립운동비밀결사동지)11명과 함께 모여
손가락을 끊어 태극기에 대한독립 넉자를 혈서로 써넣었다.
흰 두루마리를 입고 앉은 안의사 뒤에는 태극기가 걸어있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하얼빈에서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적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그는 옥중이서 동양평화론을 저술한다.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화해와 민족공존과 나아가
동북아시아의 연대와 세계 평화로 승화돠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일제의 만행과 울분을 꾸역꾸역 삼키며
남산 분수대로 발길을 옮기니
분수대의 물은 온데 간데 없고 덩그러니 쇠 수도꼭지만 춤을 춘다.
멀리 보이는 타워까지 갈려면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포토 아일랜드라는 서울전망과 사진찍기에 완성마춤인 장소에는
황사바람 부는 주말인데도 안개낀 도시 빌딩을 배경으로 너도 나도 사진을 찍어댄다.
마른잎은 굴러가고 바라불어 또 어디로든 기어가고 돌계단에서 나부낀다.
남산의 또다른 이름은 목멱산인데 이는 한양천도후 남산꼭대기에 목멱대왕 산신을 모시는 목멱신사를 짓고
나라의 평안을 비는 제사를 지낸데서 유래한다.
그러나 지금은 남산에 목멱신사가 없다.
일제가 황국신민화 교육을 위해 남산에 신사와 신궁을 세우고 신사참배를 강요하게 되면서
목멱신사는 제자리와 제기능을 잃었다.현재 인왕산 선바위아래에 있는 국사당이 바로 옛날의 목멱신사다.
목멱산 봉수대터는 서울에 있다하여 경봉수라고도 불렀었는데 전국의 봉수가 집결되었던곳이다.
봉수 제도는 신호체계에 따라 연기나 불을 피워서 변방의 긴급 사정을 중앙까지 전달하여 알리며
해당주민들에게도 알려 빨리 대처하도록하는 일종의 통신수단이었다.
멀리 바라보기 좋은 높은 곳에 봉수대를 설치하여 불을 피워서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알아볼수있게 하였다.
전국각지에서 오는 봉수는 남산에서 집결하였고 남산봉수대는 제1봉수에서 제5봉수까지 다섯곳의 봉수대가 있다.
제2봉수대는 함경도-강원도-양주-아차산,제2봉수대는 경상도-충청도-광주-천마산
제3봉수대는 평안도-강계-황해도-한성 무악 등봉 제4봉수대는 평안도 의주-황해도 해안-한성 무악 서봉
제5봉수대는 전라도-충청도-양천 개화산에 이르는 봉수를 받았다.
이곳은 1993년 김정호의 (청구도)등의 관련자료를 참고해서 남산의 다섯 봉수대중 한곳을 복원한곳이다.
국사당이 있던 곳에는 팔각정이 들어섰다.
서울의 상징으로 하늘을 찌를듯한 N타워는 1975년 완공되어 공사가 끝난뒤
한참후인 1981년 10월15일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그나마 3층가지만 공개되었지만 서울의 관광명소로 떠올랐다.
그뒤 2000년 YTN에서 인수해 전면 개설공사를 한끝에 2005년 N서울타워로 재개장하였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서울은 물론 멀리 서해 앞바다와 북한의 송악산까지 보인다는
타워는 낮보다는 야경을 보러오는 관광객과
사랑의 자물쇠를 채우려는 연인들이 많이 들르는곳이다.
석호정 국궁
우리 민족을 동이(東夷)라 불렀던것도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의 주몽이라는 이름도 활과 깊은관련이 있다.
우리네 민족성과 무관하지 않은 양궁은 올림픽에서는 항상 금메달이다.
양국이 탄소 섬유나 카폰소재로 만드는것과 달리 국궁은 물소뿔에 대나무와 소 힘줄을 덧대어 만든다
양궁은 종목에 따라 사대에서 과녁까지 거리가 30-90m로 다양하지만 국궁은 145m로 고정되어있다.
또 양궁은 과녁에 색깔에 따라 1점부터10점까지 점수를 매기는것에 반해
국궁은 2m크기의 과녁을 맞히느것만으로도 관중으로 인정한다.국궁을 체험할수있는 활터를 사정이라하는데
서울에는 석호정과 황학정을 포함해 9곳의 활터가 있다.
사직동의 황학정은 조선시대 왕과 문무백관을 위한활터이고 석호정은 민간인을 위한 활터이다.
1898(광무2)고종의 어명으로 세워진 황학정과 석호정은1630년경 인조때 창정된유서깊은곳이다.
6,25전쟁때 소실된 석호정을 지금은 노인정을 보수해 지은것이다.
장충공원쪽으로 방향을 틀어 계단을 내려오면 새로 지어 깨끗한 기와집이 나온다.
분위기가 좋은 한옥에는 간단한 식사와 죽 차를 파는곳이다.
따뜻하고 분위기 좋은 음식점에 손님은 썰렁 빈테이블이 많다.
정갈하게 담아내온 호박죽 한그릇을 먹었다.
남산을 산책하고 꽃 비빔밥 한그릇을 먹으면 딱 좋을것같은 조용한 곳이다.
수표교
이다리는 청계천을 가로질러 쌓은 돌다리로 물의 수위를 측량하던 관측기구인 수표를 세우면서 수표교라 하였다.
한양도심을 흐르는 개천 지금의 청계천의 다리는 조선초에 토교(土橋)나 목교(木橋)로 지었다
태종 연간부터 석교로 교체했는데 수표교도 태종~세종 재위기간에 돌로 개조했다.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면서 철거하여 처음으로 옮겼다가 1965년 이곳으로 옮겨세웠다.
다리 길이는 27,5m폭7,5m높이4m이며 재료는화강암이다.
교각하부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꼴로 만들었다.
1441년 (세종23)에 다리서쪽에 나무로 만든 측우기를 설치하였다가 성종때 돌로 교체하였다.
1760년(영조36)에는 교각에 경진지평(庚辰地坪)이란글자를 새겨 네단계로 물높이를측정함으로
다리자체가 수량을 측정하는 수중주석표로 발전하였다
수표교와 함께 있던 수표(보물838)는 장충단까지 왔다가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졌다.
장충단비
을미사변때 희생당한 영령들을 위로하기위한 비석이다.
1895년(고종32)을미사변때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궁내부대신 이경직과 시위대장 홍계훈을 비롯한 많은 병사들이 일본군에 대항하다 죽었다.
고종황제는 1900년(광무4)에 이들을 위한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도록 장충단을 세웠는데 이때 비석도 함께 세웠다.
1910년 한일합방과 함께 장충단은 폐지되고 비석도 뽑혔다.1920년대 후반에는 이곳에벚나무를 심어 공원을 조성하고 이곳을 장충단공원이라하였다.1945년광복과 함께 장충단비를 다시 찾아 지금의 신라호텔자리에 세웠고 1969년에 이곳으로 옮겼다.비석의 앞면에 새겨진 장충단(奬忠壇)은 당시 황태자였던순종황제가 쓴글씨다.당시 육군부장이었던 민영환이 뒤비석을 쓰고 그내용은 장충단을 세우게 된 내력과 의미를 기리는것이다.
사명대사 동상이 초저녁인데 벌써 칠흙같은 어둠이 더 무섭게 서있다.
사명대사는 조선의 승려로 1592(선조25)임진왜란때 의병을 모집해 의병활동을 한 승려이고
임란후 1604에는 일본에 건너가 도쿠가와이에야스와 강화를 맺고 포로가 되어갔던 3천5백명을 우리나라로 데리고 온 승려이다.
어둠을 뚫고 공원을 나서자 곧 바로 동대역 지하철이 나온다.
화려한 불빛과 쌩쌩달리는 차들이 주말 서울거리는 항상 바쁘다.
이준열사91859-1907)
항일정신이 깃든 남산과 장충단 공원의 산책은 단순한 건강을 위한 산책만이 아니라
역사 유적지를 탐방하는 마음으로 걸어야 한다.
함경북도 북청사람인 그는 초시에 합격해 고종 31년에 함흥 순릉 참보이 된다.
1907년 고종의 밀명을 받고 4월22일 서울을 출발해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전 의정부 참찬인 이상설과
페테르브르크에서 주 러시아 공사 참서관 이위종과 합류 헤이그에 도착한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개장일 6월5일 의장을 방문하고 고종의친서와 신임장을 전했으나 일본의 반대로 참석할 자격을 얻지못하자
울분을 참지못하고 곡기를 끊어 헹간에 나도는 활복자살이 아니고 자연사를 나라를 위하는 죽음이어 순국으로 전해진다 한다.
생사관(生死關)
인생이 죽는다는것은 무엇이며
인생이 산다는것이 무엇이냐
죽어도 죽잖은 것이 있고
살아도 살지않은것이 있나니
그릇살면 차라리 죽음만도 못하고
제대로 죽으면 되려 영생하는니
살고 죽는게 모두 제게 달렸다면
모른지기 죽고 삶을 바르게 힘쓰라
중구 신당동 지하철2호선 6,7번출구로 올라오면 매웁기가 하늘을 찌른다는 떡볶이 타운골목이 나온다.
떡볶이는 원래 궁중음식이었는데 잡채와 더불어 조선시대 궁궐에서 임금님 수라상에 오르던 정월 음식중의 하나였다.
당시의 떡볶이는 괵와 채소를 듬뿍넣고 고추장대신에 간장으로 양념을 했다.
1950년대부터 한두 집 생기기 시작하던것이
1970년대 임국희의 여성살롱이라는 테레비 프로그램에서
이골못을 소개하면서부터 사람들이 찾기 시작했다한다.
마복림 할머니집이 아주 유명하다고 해서 남산에서 가까운 이곳에 들러 재료만 사가지고가서 애들하고 먹을려고 들른것이다.
길양쪽이 모두 떡볶이 집으로 손남을 호객행위하는게 술집에서나 가능한일이 아니었다.
건장한 청년들이 자기집이 제일 맛있고 양도 많이 준다고 소리를 지르고 잡아챌것같아 빨리 그자리를 벗어나고 심정이다.
00여m밖에 안되는 골목끝까지 같다가 뒤돌아서 적당한 가게에 들러 만원워치만 포장을 해달라니
1초도 기다릴게 없이 바로 검정봉지를 준다.2인분에 만원이란다.
떡보다는 부재료가 많은듯 부피가 상당한 봉지를 들고 열어보니 삶은계란과 어묵 라면사리도 있었다.
오늘 저녁은 이것으로 한끼 때우기로 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