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1. 10. 20:22ㆍ일반산행
남한산성 후기
일시-2011년 11월10일 목요일
코스-남문(지화문)-영춘정-수어장대-서문(우익문)-연주봉옹성-북장대-북문(전승문)-동장대터-장경사지옹성-동문(좌익문)
참가인원-강효선,김미희,김순옥,노혜경,손진,이윤정,전송이,제성숙 (가나다순)
가을 햇살에 나풀거리던 억새꽃도 사그라져 가고
가을 그리움에 핏빛으로 물들었던 단풍도 떨어져 가는
晩秋
눈부신 하루가 시작 되었다.
소리 없이 이별하는 눈물 떨구듯 간밤에 비 내렸나,
촉촉한 땅을 밟으며 집을 나서 바람 처럼 빠른 가을날의 속도로
지하철 8호선은 달려 산성역에 도착했다.
약속 시간 보다 먼저와 기다린 성숙이와 9번 버스로
오늘 산행 출발점인 남문 주차장에서 낭군님이 대려다준 진이와 만났다.
잿빛 먹구름이 다가와도 흰구름으로 만들어 버릴것같은 카페에서 만났던
호탕한 미희가 오늘 우리와 함께 산행하러 오고 있다 한다.
남한산성이 어떤 곳인가,
세계적 유산으로 유네스코에 잠정 목록에 등재 신청 되었고
산성을 읍성으로 삼은 한국인 정신과 무엇보다 씻을수 없는 치욕의 역사흔적이 있던 곳에는
언제부터 인지,주말의 남한산성에서는 먹고 마시고 놀자판 산행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평일날은 제법 한가로워 오히려 한국을 배우려는 외국인 관광객이 많은편이다.
남여 각각 한칸 밖에 없는 화장실에서 남성칸은 텅비어 있어도,
메뉴얼에 죽고 메뉴얼에 산다는 이웃나라 일본인들은
치마입은 그림앞에서 나래비로 줄을 서있다.
용변이 급한 남자가 있으면 당연히 문을 열어 봐서는 안되지만,
소피 마려운 여자는 비어있는 공간을 이용한다고 야단칠 사람 없을것 같아
문짝에 바지그림 있는곳에서 오줌을 쌌다.
오늘 나는 바지를 입었고 무늬만 여자인지도 몇년째인데
뭐,그까이거 잡아가서 벌금내라면 내면 될것이다.
소심한 내가 이렇게 변할수도 있다니
세월 참, 야속하다.
기다리는 아침 여유로운 시간에 진이가 지리산 둘레길 갔다가 뜯어왔다는
정기서린 쑥떡을 하나씩 먹고 국화차도 마셨다.
삼십여분이 지나 새로운 친구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눈뒤
인조가 들어온 남문으로 올랐다.
산성의 정문인 남문은 정조3년(1779) 개축하면서
'至和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성곽길 등산에 앞서 안부와 준비체조를 마치고
자 이제부터 시작이다,
요똥....
그러나 빠르지 않게 숨차지 않게 생각보다 힘든길이 될수 있으니
하지만 지아무리 힘들어도 그해 겨울 언땅위에 눈을 밟으며
피눈물을 삼켰던 어가행렬 보다야는 나을것이다.
애매하면 애정여더러 물어봄서나 가자고,하하..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멀리 일산에서 온 효선이와
이틀전에도 남한산성에 왔다 갔다는 순옥이는 가파른 계단길에서
선두로 영춘정에 도착하였다.
처음이라 걱정했던 나의 생각은 괜한 기우가 되어가고 있었다.
두툼한 입술이면 남한산성길은 잘걷게 된단다.
어쩐지, 연필로 그려야 입술인지 얼굴인지 분간되는 입술인 내가 더 숨이 차는걸보니
그말은 참말인가 보다.
오늘 하루는 입술 두툼한 여자 뒤꽁무늬만 따라가면 안심이다.
청량산 정상(482,6m)에 위치한 수어장대까지 왔으니
여기서 증명사진도 박고 머리를 쓸겸 공부좀 해보면,
남한산성은
백제의 시조인 온조의 왕성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신라 문무왕12년(672)에 한산주에 쌓은
'주장성'이라는 기록도 있다.
조선 인조 4년(1626)에 중앙부의 본성이 완성되었고
병자호란이후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동쪽의 봉암성,한봉성등을 증축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인조 14년에 청나라가 침략해오자 왕은 이곳으로 피신하여 47일이나
항전했던곳으로 더 유명하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주봉인 청량산 정상에 있는 수어사의 지휘본부이며 관측소로
남한산성에 있던 5개 누각중 유일하게 남았다.
처음 지을때는 단층이었으나 영조2년에 이층 누각으로 증축하고
서장대이던 이름을 '守禦將臺' 라고 바꾸었다.
그 겨울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군졸들은 동상과 싸우다 손가락 발가락이 잘려나갔다.
추위에 비라도 오는밤이면 솜옷이 어찌 되었을지,
누굴 위해 사는 목숨인지,
예조판서 김상헌은 서장대에 올라 찬 겨울빗물에 뜨거운 눈물로
군졸들을 바라보았다.
수어장대 앞마당에는 커다란 바위덩어리가 놓여있다.
매바위에서 그녀들의 포즈는,
동남쪽 성벽 축조를 맡은 이회가 완벽함과 경비부족으로
공사를 기일내에 완공하지 못하자 주색잡기에 빠졌다는 소문으로
그는 끝내 참수형을 받는다.
"내가 죽은뒤 이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죄가 있는 것이다."라며
그가 절명하는 순간에 하늘에서 매한마리가 날아와 슬피 울다 날아가
매 발자국 흔적이 남았다는 전설의 바위에 두손바닥을 대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믿거나 말거나 바위에
김문수 지사가 와서 소원을 빌고 당선되었다는
안내의 말이다.
니 둘은 무슨소원을 빌었다냐,
수어장대에서 서문으로 내려 오는 성밖은 가파르나
성안길은 완만하다.
소나무 숲이 서늘하고 작은 물줄기들이 많아 자급자족했던 성안의 백성들도
안과 밖이 막혔던 병자년 겨울과 정축년 새해에 지옥속 생활을 했을 것이고
외침으로 또는 세월의 두께로 부서진 성벽들은 보수작업이 여전하고
앞으로도 이어질것이다.
어느덧,누렇게 변해버린 잎들은 낙엽되어 쌓이고
우리는 그길을 걸었다.
서문(右翼門)에 도착했다.
산성의 서쪽 사면은 경사가 가파라 우마차는 다닐수 없지만
송파,거여,마천,광진 방면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인조15년(1637)1월30일 아침에 임금과 세자와 신료들이
삼전도로 가기위해 나왔던 문이다.
청의 용골대도 가파른 절벽으로 힘들어했던
서문밖으로 나가니 아직도 공사중이라 다시 안으로 이어가다
암문으로 통과하였다.
남한산성에는 적의 눈에 띄지 않게 성벽에 감추어놓은 16개의 암문이 있어
4대문이 아니어도 안과 밖이 소통할수 있었다.
본성은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5개의 옹성중에
서문과 북문사이에 있는 연주봉옹성이 새로 단장되어
하얗게 회칠되었다.
하늘높은 산줄기를 따라 길게 늘어진 모습만해도
군사행렬같다.
서울, 성남,광주,하남 4개도시와 접경을 이루고 있는 남한산성은
화려한 야경장소이기도 하나, 붙잡고 싶어도 간다는 늦은 가을 한낮에
연주 봉옹성 봉우리에서 바라다보이는 서울과 하남의 경관은
왠지 서글프다.
자연의 선물인 흙을 밟을 온 땅덩어리가 닭장같은 아파트로
변할까봐 슬프고,
태백의 검룡소에서 출발한 맑은 물이 양수리를 거쳐 한강으로 흐르다
썩을까봐 슬프다.
지랄같이 쓰잘때기 없는 센치는 문밖에 도착하고 있다는
시린 겨울날 때문 일게다.
연주봉옹성에서 북문까지는 금방이다.
인조14년(1636)때 명에서 청으로 이동하던 대륙은 누루하치의 아들 홍타이지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용골대가 청의 사신으로 조선에 왔으나
조선은 국서를 접수하지 않았다.
청군이 칩입 하여 오자 병자년 12월 14일날 임금은 남한산성에 들어와
다음날 강화도로 피하려다 다시 돌아와 갇혀 곤룡포에 면류관을 쓰고 가죽신을 신고도
무명 바지 저고리에 짚신 신은 백성만도 못한 자유는
살아 있어도 죽은 목숨 이었을테고,
지금의 위정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행태의 쌈박질과 별반 다를게 없이
죽음은 견딜수 없고 치욕은 견딜수 있다는 이판 최명길의 주화파와
싸우고 지켜야 화친할 길도 열릴것 이라며 싸우기를 주장했던
예판 김상헌의 척화파가 시간만 보낼때
고달프고 힘들었던 이들은 끼니를 지니지 못한채
멀건 죽 한그릇을 마셨던 군병들 뿐아니라
영문도 모른채 성안에 갇혀버린 민초와 생명 달린
모든것 이었다.
임금이 성안으로 쫓겨왔으니 적병들이 애워 쌀것도 알고
머지않아 임금이 성밖으로 나갈것도 아는게 성안의 백성이니
가장 영리하고 또,질긴게 민초의 삶이다.
그 겨울에 임금은 남한산성 행궁에서 숨죽여 울었다.
북문(全勝門)은 12월29일 조선군이 성문을 열고 나간 싸운 유일한 전투로
김류가 지휘하는 정예병 삼백명이 북문으로 출병하여 진을 쳤는데
적은 싸우지 않다 날이 저물자 엄습하여 별장 신성립등 많은 사상자를 냈다.
성문을 열고 나간 유일한 용기없는 싸움에 승전은 없었던 북문을 지났다.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고,오죽했으면 먹고 죽은 귀신은 땟깔도 좋고
자알 썩는다더라 하는 말이 있는데 굶어가며 싸우다 참패를 했던 곳에서
두시간의 산행을 마치고 꿀맛같은 점심을 먹었다.
제법 크게 만들어진 이 암문으로 나가 평지로 이십여분을 걸으면
청의 용골대가 올라가 임금이 거처한 행궁 안마당에 홍이포를 쏘아댔다는 벌봉이 나오고
그길로 곧장가면 하남 방향인데 오늘 산행에서는 뺐다.
낙엽을 밟고 싶다는 진이를 봐서라도 진아, 너는 좋으냐,낙엽 밟는 소리가,
하면서 그길을 걸을걸 그랬나,
누구의 팔뚝이나 바지가랑이라도 잡지 않으면
뒷머리카락이 쭈빗거릴 정도로 호젓한 이런길이 있을줄은 몰랐다는
탄성이 나올텐데 아쉽다.
북문에서 왼쪽으로 하남을 바라보고 동장대터까지 오르막이
오늘 산행에서 남문에서 영춘정에 오르는 계단과 두군데 중에 가장 힘든 코스이다.
골고루 점심을 먹은 우리 일행은 든든한 배로 밀고 올라가지만
숨은 엄청나게 찼다.
얼추 세시간의 산행에 컨디션 조절에 나선 효선이와 순옥이는 하산길로 향하고
그뒤를 미희가 따라 두팀으로 나뉘어졌다.
이제는 내려 갈일만 남은 코스에 다섯명이 함께하고 있었다.
장경사 신지옹성에는
올봄 그토록 푸르렀던 초록색 나무는 잎사귀 없는 나무가 되고
마른풀들만 무성했다.
가지사이로 지나가는 늦가을 바람과 햇빛이 부드러워
망중한을 즐기기에 완성맞춤이다.
지금부터는 헐떡거리고 올라갈길은 없고 내려갈길만 남은 우리 일행은
한결 여유로웠다.
각양각색으로 폼잡던 가을꽃들과 잎들이 다떨어지는 십일월
부서진 성곽위로 노랑색 꽃잎이 위태하다.
입동도 지났으니 아마도 찬서리 맞으면
버려야 할때도 알게 될것이다.
마른 낙엽위로 내리는 늦가을 햇살 받으며 내려오다 보면
성벽 바깥쪽으로 큰바위가 하나 붙어 있다.
이름하여 '松岩亭터'우리말로 솔바위정자 라고 한다.
옛날 황진이가 금강산에서 수도를 하고 하산하여 이곳을 지나는데
남자 여럿이 기생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단다.
그중 한남자가 황진이에게 희롱 하려 하자 황진이는 개의치 않고
오히려 불법을 설파하였는데 그모습에 감명받은 기생 하나가 절벽으로 뛰어내려
그후 달밝은 밤에는 이곳에서 노래소리와 통곡소리가 들렸다 한다.
바위위에 서있는 소나무는 정조가 여주 능행길에 '대부'라는 벼슬을 내려
'대부송'이라고 부르는 소나무란다.
그러고보니 오늘이 시월 보름인데,흑흑~하며 머리푼 여자가 나오기전에 내려가자.
드디어 동문(左翼門),
동문인 이곳에서 처음 산행을 시작했던 남문까지, 대략 한시간의 거리를 뺀
오늘 우리가 계획했던 동서남북 4대문은 다 보았다.
인조15년(1637)1월18일 청병이 동문으로 몰려와
"투항하든지 나와서 싸우든지 결판을 내자."며 협박했던 곳이나
조정은 응답하지 않았고,구한말에 천주교인들이 동문밖에서
처형되기도 했다.
동문으로 내려오면 시원한 아스팔트 도로가 뚫려 산성로타리로 쉽게 갈수있고
왼편으로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개울물을 가두고 정자를 짓고
고관들이 낚시를 즐겼던 '지수당(池水堂)'이라는 연못이 있고
그옆에 부서진 묘비와 멀쩡한 묘비 두개가 서있다.
병자호란당시 수훈을 세웠던 서흔남의 묘비이다.
김훈의 소설에서는 삼남(충청,전라,경상도)과 양서지방(황해도,평안도)에 격서를 들고
수문을 빠져 나왔던 서날쇠로 묘사 되어있다.
관료들은 삼남의 관군과 창의(의병)를 시급히 불러 들이자고 말하고는
막상 목숨이 두려워 나설자가 없자.김상헌이 서날쇠를 보낸다하니
대장장이에게 조정의 막중대사를 맡길수 없다며 입만 살은 대신들의 싸움에
예나 지금이나 꼼수는 있고 진정 애국하는자는 따로 있는것 같다.
실제 서흔남은
수어청 병사의 노비였고 청이 산성을 포위하여 외부와 연락이 끊기자
거지,병자로 변장하여 연락업무를 자원했다.
때론 청군으로 변장하여 청군진영을 세번이나 왕복하여
노비 신분이 면천되고 당상관이 되고 후에 종2품 동중추부사까지 되었다.
중부면 검복리에 있던 묘비를 후에 이곳에 옮겼다한다.
먼저 하산한 세동무의 행동이 궁금하던 차에
지름길로 내려오다 보니 아스팔트 도로로 질주하여
다시 현절사로 올랐갔다 내려왔다 한다.
현절사라 하면,
병자호란때 항복을 끝까지 반대하다 청에 강제로 끌려가 곤욕끝에 참형을 당한
홍익한,윤집,오달제 삼학사의 우국충절을 기리기위해 세운 사당이다.
후에 김상헌,정온의 위패도 모셨다.
싸움을 두고도,칸에 보낼 국서를 두고도 서로 역적이라 했던
척화신 김상헌은 인조(19년)심양에 끌려가 투옥되고
다음해에 주화파 최명길도 심양으로 끌려가 투옥되는 수모를 겪는다.
대륙에서 보는 그들 모두 조선사람이다.
임금을 비롯한 대다수 신료들은 전쟁이 터지면 강화도로 도망갈 궁리만하고
방어를 소홀히 했으니 나라꼴은 말이 아니고 한심한건 당연하다.
1637년 1월30일 삼전도에서 임금은 세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번 조아리는 예를 행하여
해질무렵 비로소 창경궁 양화당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칸이 삼전도에서 철군하는 2월2일 전곶장에 나가 전송하는 수모를 겪고도 모자라
소현세자,빈궁,봉림대군,인평대군들을 볼모로 삼고
척화론자들을 심양으로 끌고갔다.
삼전도비는 현재 잠실 호수공원옆에 서있다.
삼전도비의 공식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이다
청일전쟁후 청의 세력이 약해지자 1895년 고종35년에 강물속으로 쓰러뜨렸다.
하지만,일제 강점기인 1913년 다시 세웠다가 1956년 아예 땅에 묻었던것이
1963년 홍수로 모습을 들어내게되어 다시 세웠다한다.
감출내야 감출수없는게 역사인게다.
만주, 몽골,한자 세가지 언어로 청에게 항복하게 된 경위와
청태종의 침략행위를 공덕으로 찬미한 내용의 비문은 거의 지워져 있고
하늘아래 대국은 청이고 그아래 속국은 우리라고 일깨우는
"大淸皇帝功德碑"라고 적혀있다.
롯데월드 놀이공원이나 백화점에 들러 희희낙낙 놀면서 쇼핑만 하지말고 한번쯤 돌아보면,
청에 끌려가 환향녀로 돌아 오게된 50만명의 조선여자 팔자가 기구해
많은 생각이 들것이다.
비극의 환향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여자이기 때문에 참아야 한다는 노래는 후에 불리워 졌지만
지금은 남자이기 때문에 참아야 하는일이 더 많아지는 세상으로 변하는것 같아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어차피 인생의 塞翁之馬라고 했으니 사는동안은 착하게 살다 가는게 맞는거 같다.
병자호란은 당시 집권당인 서인과 인조의 대명 사대주의가
국제 정세를 제대로 보지 못한 근본 원인으로
굴욕적인 역사이지만 교훈으로 삼아야 할것이다.
푸르른 오월 어느날에 삼전도비,그곳에서 찍은 사진이다.
치욕스럽지만 잊지 말아야할 역사의 흔적을 견학하듯 떠난 산행을 무사히 끝내
무지 기쁘고 기꺼이 동행해준 동창들을 만나 더 기뻤다.
효선,미희,순옥,혜경,진,송이,성숙
늦가을 추억으로 남을 남한산성의 인연이
소중하고 황홀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하는것 보다 못하는게 더 많고,먹는거 보다 안먹는게 더 많아
커피와 동동주 대신에 우유와 맹물로도 분위기에 취할수있는
까탈스런 나도 때론,
하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물론,
바다와 구름과 달과 음악을 좋아하고
사랑은 가슴을 때리고, 우정은 金蘭之交를 좋아하여
가을같은 괜찮은 여자란다.
친구들아,
남 부끄럽지 않게 사는것 보다는
나 부끄럽지 않게 살다가
그리워, 울컥하면
또, 보자.
2011년 11월13일 씀.
참고:조선왕조 인조실록(박영규)
남한산성(김훈)
글 : 李 貞
사진: 孫 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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