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5. 5. 20:54ㆍ일반산행
북한산 원효봉 산행 후기
일시-2012년 5월 5일 토요일
코스-고양시 효자동 마을 회관-시구문-원효암-원효봉(505m)-북문-보리사-북한산 탐방 지원센터
참가자-손진,이윤정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청명풍(淸明風)이 분다는 입하(立夏)날인 오월 어린이날이다.
계절은 분명 꽃향기 바람에 날리는 봄날이건만,며칠전부터 한여름 날씨다.
지난달까지 입었던 내복을 벗고 나니 이제는 냉장고 파자마를 입어야 할 판이다.
봄맞으러 산행에 나서겠다던 계획은 이른 여름 뙤얕볕 쐬러
멀리 그리고,높이 오르는격이 되어 버렸다.
한달전만 해도 추워서 봄꽃들이 꽃망울을 터트릴까 말까 한다더니,
순서도 잊어 버린채 와장창 한꺼번에 피워대고
지하철에서는 한달전에 온풍기가 냉방기로 바꿔 틀어,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그리도 봄이 짧단 말인가,
누가 오월을 싱그런 계절의 여왕이라고 하였던가,
봄은 온데간데 없어져 버린것 같다.
사계절이 두계절이 된다해도 갈테면 가라지,누가 붙들기나 할까봐.
해당화 피기전에 오신다고 약속한 님도 없는 마당에
아, 그래도 복사꽃,살구꽃 피는 봄날이 좋은건 무슨 욕심인가 모르겠다.
애꿎은 날씨탓만 해가며 신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희뿌연 하늘에 붉은기는 오늘 하루도 따습다 못해 따땃한 날이 예감된다.
지하철 3호선은 등산객을 실어나르는 전철이 된게
아마도 가깝게는 인왕산과 북악산과 멀리 북한산과 도봉산,수락산이
거기 있기 때문일것이다.
주말 그것도 청명한 오월의 어린이날은 구파발의 어느 도사님께
파발을 전달하러 떠나는 전사들 모양,땅속에서 땅위로 우르르 몰려 나와
한국인의 위대한 생존극에 끼어 찍사와 글쟁이 단둘이 산행은
고양시 효자동 마을의 어느 집앞에 주저리 주저리 핀 꽃의 환영을 받으며 시작되었다.
사부작 사부작 슬슬 오르니 벌써 2,3km의 산행길에 딱 절반을 들어서는 시구문앞에 섰다.
도성의 사람들이 죽어나면 그 시체를 이문을 통과하여 도성밖으로 보내졌다는 시구문은
오늘 산행길에 나선 우리들이 달고 있는 다리보다 훨씬 더 튼실해 사람들이 위로 올라
앉아 있거나 뛰어도 끄덕없다.
앞으로 갈길은 온전히 돌계단길로 가파라, 숨을 헐떡거릴 자세가 필요한 코스이다.
지난달 답사때도,처음 밟았던 춘삼월에도 그랬고,어떤놈이 계단 만들어 힘들게 한다고
밑에서부터 꼭대기까지 투덜댔던 바로 그곳이다.
내가 만든 계단도 아닌데 동행하는 그녀에게 미안한 생각이 왜 드는지 알수가 없다.
쉼호흡 한번 크게 하고,얼음물로 목 한번 축이고, 침 한번 꼴깍 들이 마시고,
힘든거 잊기위해 옛날 이야기나 하면서 올라가자.
북한산은 대한민국 서울의 수도를 지키고 있는 최적의 산으로
북한산이 떡하니 버티고 있어서 서울이 천혜의 요충지가 되었단다.
서울의 도봉구,성북구,종로구,은평구,경기도 고양시까지 안고 있고
화강암의 준령과 깊고 수려한 계곡이 어우러진 하늘이 내린 요새이다.
1983년 북한산과 도봉산 일대가 북한산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백운대(836,5m),인수봉(810,5m),만경대(799,5m) 암봉 세개가
안정적으로 정립해 있어 삼각산 이라고도 한다.
만경대는 조선의 도읍지로 정할때 무악대사가 올랐다 하여 국망봉이라고도 하고,
백운대,동장대,대동문,보현봉,형제봉,구준봉,북악산,인왕산,무악재,안산까지
북한산신의 관할 구역이란다.
삼국시대의 고구려 백제 신라는 북한산의 서울을 얻으려고 피를 흘렸다.
마지막 북한산의 주인은 신라로 24대 진흥왕은 몸소 북한산을 찾았다 한다.
지금도 북한산의 비봉에는 진흥왕 순수비가 있는데 그곳의 비는 모조품이고
진짜는 중앙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조선에서는 누구보다 선조와 인조 임금이 북한산을 좋아 했단다.
두 왕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겪은 왕으로
북한산에 피신 했었다.
병자호란때는 남한산성에서 인조는 청에 무릎을 꿇은 치욕을 맛보고
당시, 청에 끌려가던 김상헌이 북한산을 향해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라고 읊어
북한산 둘레길에 가다보면 그 시구를 적어놓은 팻말을 만날수 있다.
백운대 꼭대기에 올라가면 좌경천리 입경만리(坐景千里 立景萬里)라고
앉아서 천리를 구경하고 서서 멀리 만리를 구경한다는데
이참에 원효봉 찍고 내처 올라갈까,맘은 굴뚝갔다만
그러다가는 살아 내려오지 못할것 같으니 오늘 해야할 목적을 달성하려면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북한산 골짜기에서 산꼭대기로 불어오는 곡풍(谷風)을 마시며 오르다 보며
가파른 바위옆에 가까스로 붙은 암자를 만난다.
신라의 고승 원효가 정좌 수도한 산신각이 있는 원효암(元曉庵)이다.
번뇌로 흐트러진 마음을 하나로 모아 들어오라는 일주문도 없는 암자는 초라하고
태풍이라도 몰아치면 위태할것 같은데,눈을 부릅뜨고 지키는 사천왕이
안쪽 마당에 있다.
원효대사(元曉大師)617-686는 삼국시대와 신라의 고승으로
원효는 법명이고 속성은 설(薛)씨였다.
그의 어미가 대사를 잉태할때 꿈에 유성이 품에 들어 오는것을 보았다고 한다.
열달이 지나 어미가 마을의 큰 밤나무 아래 이르러 돌연히 산고를 느껴 해산했는데
그때 오색 구름이 땅을 뒤덮고 향기가 진동 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원효는 후에 자기보다 열살 아래인 의상과 함게 중국 유학길을 떠났으나
경주를 떠나 남양 해안에 이르러서 날이 저물자 날은 춥고 소낙비가 쏟아져
어느 움집에 들어가 하룻밤을 지새기로 하였단다.
한밤중에 원효는 심한 갈증으로 주위를 더듬거리다 손끝에 물이 담긴 그릇을 발견하고
황급히 물을 마시고 다음날 날이 밝아 잠에서 깨어나 보니
움집이라 여긴곳은 고총이었고 그릇에 물은 해골에 고인 썩은물 이었단다.
그곳에는 수많은 벌레들이 우굴거리고 있어 전날 먹은 음식을 모조리
토해 버린다.
설상가상으로 비는 그치지 않아 그곳에서 하룻밤을 더 자게 된다.
지난밤은 움집이라 편하게 잤는데 오늘밤은 귀신집이므로 편안치 못함을 확인하고,
고통끝에 진리를 알게된 원효는 기신론(起信論)에서 본 법문이 되살아난다.
"한 생각이 일어나니 갖가지 마음이 일어나고
한생각이 사라지니 갖가지 마음이 사라진다."
움집과 무덤이 둘이 아니고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당에 있는 진리가 신라에는 없겠는가 하고
의상과 헤어져 유학의 꿈을 접고 신라로 돌아온다.
원효는 과부가 되어있는 요석궁의 공주와 짧은 인연으로 설총을 낳고
스스로 승복을 벗어 던진채 자칭 소성거사(小姓居士)라고 칭하며
화엄경의 이치를 쉬운 무애가(無碍歌)라는 노래를 지어
큰 표주박을 두드리며 승려가 아닌 세속의 모습으로
전국 방방 곡곡에 설법을 전했다.
원효대사가 들어 앉아 수도한 한칸규모 방의 산신각(山神閣)에는
한마리의 호랑이가 지켜보고 있고,원효봉과 마주 보고 있는 의상봉(503m)에는
의상대사의 수도지였던 국녕사란 절이 있다.
북한산 여기저기 절들이 수도 없이 많다.
바위 귀퉁이 돌멩이라도 붙들고 기원할일이 그렇게 많은 민족인지
세삼 가이없다.
대사가 지팡이로 뚫어 만들었다는 약수는 암벽 아래 있고
문을 닫아두어 왠만해서는 찾아내기 힘들다.
바가지로 고인물을 퍼서 마시려니 깨림직해 맛만 보았으나
생수도 아닌것이 아리수 수도물도 아닌것이
그냥 바위 속에서 떨어진 물맛이다.
원효암 주지인듯 승복차림의 젊은 남자가 허름한 방안에 앉은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과 있다.
저이들이 신도라면,높은 곳까지 올라와서 기도하는 이절의 신도들은
하나같이 펄펄나는 산꾼이야 할테고,주지 또한 늙은이는 힘들게 아닌가,
그나저나 저렇게 젊은 남자가 스님 한다고 머리깍고 절에만 틀어 앉아,
도 닦을라면 얼마나 많은 인간의 욕심을 버려야 할까 모르겠다.
무엇이든 가지고 있으면 그것에 얽매여 있는 것이고
크게 버려야 크게 얻을수 있다는 것을, 젊어서 부터 깨달은 사람인가, 하다가도
아이고,젊은 사람이 몇백미터만 내려가면 재미진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안됐다는 생각이 드는건,
나는 별수없이 세속물에 찌들어 사는 사람이라서 그런갑다.
중이 젊든 늙었든 무슨 상관 이다냐,
친구야, 어서 어서 고지가 바로 저기인데 올라가야 하겠다.
원효봉 오르는길에 백미라고 할수 있는 반드시 넘고 지나야 하는
바위가 드디어 나왔다.
바위를 깍아 만든 계단을 밟고 굵은 철제 난간을 잡고 올라갔다 내려가는
아찔한 코스이다.
꼭 붙잡으라고 쇠말뚝을 박아놓은 난간을 제 다리심만 믿고 맘대로
오르락 내리락 했다가 깨딱하다가는 떨어져 이세상을 하직할수 있는
바위 덩어리는 오밀조밀 앙증스럽게 붙어있다.
가는날이 장날이라고 이렇게 바람이 거센날에는 필수로 신발은 쫙쫙 달라붙는 릿지화가 좋고
엉덩이를 구부려 바위와 친해지는 포즈가 그만이다.
안떨어지려고 발버둥거리며 바위에 앉아 포즈를 잡고 웃고 있어도 웃는게 아니다.
내 머리털을 바람머리로 만들어 하늘로 다 뽑아내서 나를 끌고 가려는 바람에 야속하지만
겨드랑이에 맺힌 땀과 이태것 더운게 싹 사라져 버리는 통쾌한 순간이다.
드디어 원효봉 정상(505m)에 올라서
뜨거운 날씨만큼이나 해냈다는 뜨거운 가슴이 뭉끌했다.
북한산에서 제일로 높다는 백운대(836,5m)가 바로 코앞에 위풍당당히 들어나고
북한산 봉우리 봉우리들을 한눈에 감상 할수있다.
병자호란의 치욕으로 청으로 잡혀 갔었던 봉림대군이 후에 효종이 되는데
유비무환 적격지로 북한산을 지목했고 계획했던일을 숙종때야
비로소 성을 쌓은게 이른바 북한 산성이다.
원효봉 오르는길에도 무너진 성곽 보수길이 있다.
유사시 산속으로 옮길 한양은 지휘 본부로는 문수봉의 남장대,노적봉의 북장대,대동문의 동장대를 두었고,
산성의 여러 대문중 대동문,대남문 그리고 대서문이 새것 처럼 보수 되어 남아있다.
조선의 한양에 있던 동대문,남대문,서대문의 글자만 바꾸어 지어진 이름이다.
그까이거 문짝 이름짓는거 머리쓰기 싫었던 모양이다.
원효봉에서 지붕이 없는 북문을 통과해서 대서문까지 가기로한 계획을 변경해
북문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였다.
적어도 숨은벽 능선이나 칼바위 능선,아니면 상장 능선이라도 타고 와야
북한산에 다녀왔다는 말을 한다는데 오늘 우리 둘은 북한산 하나의 봉우리에
발두짝 대고 왔다고 하면 맞을것이다.
그래도 원효봉 넓은 바위위에서 갖은 폼을 잡았던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것이다.
오르막은 힘겨웠으나 내리막은 계곡의 물소리와 함께 편안한 편이다.
개연폭포라는 폭포는 지금 가뭄인지 물이 말라 있어 한바탕 소나기라도 퍼부으면 좋겠는데
아직도 햇빛은 쨍쨍하다.
내려오면서 우리가 올랐던 거대한 바위 덩어리를 올려다 보니 아찔하다.
어린이날 답게 계곡길은 어린 아들과 딸,그리고 아가들을 데리고 나온 가족이 많았다.
숲으로 들어가는것은 어린이집에 가는것이라 하듯이 나무와 산새들이 있는 자연에는
어린 아이처럼 본성에 충실하여 그야말로 자연스러워지기 때문일게다.
숨차서 더이상 못가겠다고 땡깡부리는 아들옆에서 어린이날이니
야단도 못치는 아빠의 안타까움이란,젊은 사람들 밥벌이 하는것도 힘들고
그보다 더 힘든것은 아이 키우는 일이다.
남의 손에 안맡기고 심지어 양쪽 부모 도움없이 길러내다 보니 아이들 울음 소리는 물론이고
웃음 소리도 별로였던 내가 서너살배기 아가들이 아장거리는 모습에
자꾸 눈이 가는것은 늙었다는 증조라고 하더만,
생산공장도 페업한 마당에 늦둥이 만드는것은 불가하니
차라리 손주보는 편이 빠른길 같다..하 하..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가정의달은 무슨행사들이 한달에 다 모여있어
가장이나 주부들은 분수만 지키려고 하여도 가지랭이가 찢어질 판국이다.
체면치레 보다 중요한게 부부사랑이 최고라 여겨진다.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이 유배중일때,부인은
"그대와 이별한지 7년,
서로 만날 날 아득하니
살아생전 만나기 어렵겠지."라는 편지와
결혼 30주년을 맞아 장농 속 빛바랜 치마와 함께 보내자
그는 치마자락을 찢어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를 보내왔네,
천리 먼길 애틋한 정을 담았네.
흘러간 세월에 붉은빛 다 바래서
만년에 서글픔을 가눌수 없구나."라고
두 아들에게는 훈계로,딸에게는 두마리의 새와 매화를 그려
하피첩(霞被帖)을 만들어 마음을 일깨우는 글로
어버이 마음을 헤아리도록 했다.
어버이 은혜가 태산보다 높고 큰데,청춘남녀 많다지만 효자효부 안보이네,라는
표어가 딱 들어맞는 요즘, 늙어갈수록 절실한건 내옆구리에 붙어앉은
사람 챙기는 일일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밤 삼겹살에 소주한잔 캬~할까 하다가도
어제 먹다남은 닭죽 먹어 치워야 된께 가볍게 해야 된다..하하..
머리속이 후끈후끈해 물수건을 뒤집어 쓰고 오른 산행은 밥집에 도착하고야
풀어 제쳤다.
추위도 못 견디면 더위나 잘 견딜것이지,추위에는 벌벌 떨고
더위에는 뻘겋게 힘에 부치는 저질 체력은
아마도 올해는 삼개월인 하안거를 길게 잡아야 할 모양이다.
영산홍인지 식당앞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철쭉꽃 인사를 받으며
무사고 산행에 감사 드렸다.
아침에 실어 날랐던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길에
'슬플때에는 마음의 때를 밀어 주세요'라는 표어를 보고는
그래, 마음의 때를 밀어 슬픔을 기쁨으로 승화 시키는데는
자연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고 있는 이밤,삼월 윤달 어제의 보름달이 유난히 밝다.
하루만에 밤공기가 선선한것 보니 역시 만화방창(萬化方暢) 오월은
신록의 계절이 그리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거 같아
조금더,
이팝나무의 고소한 튀밥 향기와 향수보다 진한 라일락 향내를 맘끽하여도 될것같다.
아가들 피부처럼 연한 연두빛 이파리가 자고나면 변하고 또 자고나면 변해가는 계절.
아,
아름다운 오월이 가고 있다.
2012년 5월 6일 씀.
글 -李 貞
사진-孫 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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