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5월24일 토요일 오전

2014. 5. 27. 04:06여행

 

죽은듯이 자고 일어나자 아침 6시반이다.

찬물세수와 썬크림을 바르고 베를린 여행준비를 마치자

아침식사 시간을 알리는 여 사장님의 노크가 들린다.

식당에 나가보니 어제 아침식사를 함께 했던 아가씨는 없고

아직 출장중인 두남자만 보인다.

이틀만에 이런저런 여행 뒷담화를 서스럼없이 나누고

말이 고픈 여사장님은 우리부부와 두남자를 금세 일어나지 못하도록

커피와 수정과를 건내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내밷는다.

고국 떠난지 삼십년 세월이니 나 같아도 한국사람 만나면 붙들고 말을 섞고

싶을거 같다.

나는 결혼한지 삼십년이 갓 넘었는데 외롭지는 안냐는 질문에 삼십년 그거

금세 지나가더라고 답한다.

나보다 한살위의 여 사장은 세계각국의 사람들을 만나 견문이 넓어서 그런지

독일물을 먹어서 그런지 나보다 훨씬 연장자로 보였다.

민박집 경영은 기가 팔팔해야 하지 나같이 약골 기운을 타고난 사람은

할일이 못 되는거 같았다.

신김치 찌게국물에 밥 계란 감자전과 조미김으로 아침을 먹고

남편은 커피 나는 우유 한잔까지 얻어먹고 오전 8시 30분에

집을 나섰다.

수퍼에서 예비 식량인 빵을 사고 10분거리에 있는 Schoneberg역에서

1일 교통권을 사서 S46번 열차 Westend행을 타 6정거장인 

Westkreuz역에서 S5 Spandau행으로 환승했다

3정거장 더 가 Olympia stadion 역에 내렸다.

역에서 내려 Jesse Owens Allee 방면으로 나오면

북쪽으로 경기장이 보인다

 

우리에게 흔한 찔레꽃이 헝가리에서도 베를린 에서도 있었다.

활짝 핀 찔레꽃길을 걸어 경기장 정문으로 걸어가면

넓은 광장에 국기봉들이 보이고 정문이 나온다.

오월 늦은 봄인데 베를린땅의 토끼풀 사이에 억센 줄기로 변한

쑥이 하나 둘 있다.

언땅을 뚫고 제일 먼저 봄을 알리는게 쑥인데 베를린의 봄은

조금 추웠나 보다.

우리 땅에는 지천으로 깔린 나물과 야생초가 다른 땅에서

하나라도 피어나면 눈이 커지는 반가움은 타국에 나오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닌모양이다.

우리땅과 독일땅이 같은 꽃을 피우고 우리의 나물이 독일에서도

자라는것을 보니 분단국가의 설움을 땅도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베를린 올림픽 경기장 입장료는 일인당 7유로였다.

티켓 매매와 기념품 매매를 같이하는 입구를 지나야만

비로소 경기장 안으로 들어갈수가 있다.

잠실 경기장은 공짜로 누구나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바람에

관리가 허술한 반면 비싼 입장료를 지불해야만 안으로 들어갈수 있는

베를린 경기장은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 한점 없고 먹을거라도 떨어지면

주워 먹을수 있을 정도로 깨끗하였다.

또 화장실은 아래 위층 갯수도 많고 얼마나 깔끔한지

그러나 우리에게 익숙한 비데는 없었다.

개인 위생을 신경쓰는 집에서는 사용하겠지만

깔끔 떤다는 유럽에서 비데 구경은 아직 못하고 있어

밖에 나와서는 할수없이 물휴지로 대신하지만

집에서는 똥 누고는 뒷물을 따로 해야 개운하다.

이태리에서 한쪽은 변기 한쪽은 비데로 사용했던 흔적은 보았다.

습관이 무서운거라 비데는 필수로 여겨진다

 

1936년의 베를린 올림픽 게임은 당시 국가 사회주의자

즉 나찌당의 선전 목적이었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고도

고개를 떨구었던 손기정 선수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연도별로 금메달 따낸 이름을 새겨 서있는 탑에 가서

손기정 선수 이름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안보여

그만 포기하고 경기장이나 한바뀌 돌아보자고 도는데

1936년 당시 마라톤 선수들이 들어오던 경기장 입구로 들어서니

MARATHOWLAUF 42195m 손 재팬이라고 적혀있는 벽면이 보인다.

가슴에 일장기를 달고 뛰던 손선수의 심정이 전해오는듯

우승현장은 적막만 감돈다.

쇳물을 녹여만든 당시 올림픽 벨이 땅바닥에 전시되어 있다

 

경기장 안에서는 축구하는 어른과 어린이들이

경기장 밖 수영장에서는 수영과 다이빙 연습하는

선수인지 일반인인지 경기장은 쉬지 않고

잘 운영되고 있었다.

우리의 올림픽 경기장도 입장료를 받아 깔끔하게 운영하고

어린 선수들이 놀이 하듯 운동을 하는 경기장이 되면 좋겠다.

 

 

 

 

 

 

 

 

 

 

 

 

 

 

 

 

 

 

 

 

 

 

 

 

 

 

 

 

 

 

 

 

 

 

 

 

 

 

 

 

 

 

 

 

경기장을 나와 돌아올때는 반대방향에 있는 U5 Olymiastadion역에서

Pankow행 지하철을 탔다.

8정거장인 Zoologis cher Garten역에서 내려 다시 100번 버스를 타고

전쟁의 참혹한 현장인 부서진 상태의 빌헬름 교회를 지나

Victory Column 전승 기념탑 앞에서 내렸다.

 

Siegessaule 승전탑은

버스로 오고 가다 계속 보이는 승리의 여신상을 이고 있다.

에른스트 로이터 광장에서 브란덴 부르크 문에 이르는 6월17일가 중앙에는

'큰 별광장'이라는 뜻의 그롯 스턴 원형광장이 있고

한가운데 높이 67m의 승전탑이 세워져 있다.

8개의 길이 교차하는 로터리로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1864,1866,1871년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세차례 걸친 전쟁에서

승리를 기리기 위해 세운탑으로 원래 라이히스트그 제국의회앞 공화국광장에

있던것을 1938년 나치가 이곳으로 옮겼다.

베를린 시민들이 '황금의 엘사'라 부르는 프리드리히 드라케가 제작한

승리의 여신상이 탑위에 올라있다.

기단부 위와 원형의 열주들을 장식하고 있는 모자이크는

1871년 독일제국의 성립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탑 위로는 입장료를 지불하고 올라갈수 있고 도로에서 탑으로 갈때는 

지하 통로를 이용해야 한다.

 

 

 

 

 

 

 

승전탑 로터리 옆 작은 정원에는 독일 제국

건국의 영웅 세명의 동상이 서 있다.

Moltke몰트케는

프로이센 왕국의 군인 이며 군사학자인 그는 백작이다

육군 참모총장으로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하여 독일 통일에 공헌하였다

 

 

 

Bismarck 비스마르크는

독일 북부의왕국인 프로이센의 재상으로 독일 통일을 이끌었다

"오늘날의 중대한 문제는 연설이나 다수결로 도저히 해결할수 없다

오로지 철과 혈로써는 해결할수 있다"며 무기 전쟁을 선포하여

철혈 재상이라고도 부른다

당시 독일은 39개의 작은 나라들로 쪼개져 있어  영국이나 프랑스 러시아보다

약소국이었다

통일이 되어야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대등해질수 있다고 생각하여

끊임없는 군대를 양성하던 비스마르크는 덴마크 슐레스비히와 홀스타인 지역이

덴마크로부터 독립운동을 일으키자 오스트리아와 함께 이지역의 독립을 지원했다.

3년에 걸친 덴마크 전쟁을 승리로 이끈뒤 이 지역의 처분문제로

다시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일으켰다.

1866년 7주에 걸친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전쟁에 승리한 프로이센은

북 독인 연방을 결성하였다.

프로이센의 움직임에 프랑스는 위기감을 느꼈고

비스마르크도 독일이 서유럽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와

맞부딪칠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 1870년 프랑스와 프로이센 전쟁에서는

나폴레옹 3세를 포로로 잡고 파리를 함락시켰다

전쟁의 승리로 알자스 로렌지방을 차지하고 50억프랑의 전쟁 배상금을 받고

이로써 프로이센은  유럽 신생강국으로 부상하였다.

전쟁중이던 1871년 1월8일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프로이센의

빌헬름1세를 황제로 한 독일 제국을 선포한다.

이것이 최초 독일 통일이다.

그후 독일은 빌헬름 1세가 통일 대관식을 거행하고 독일 제국을 선포했던

프랑스 궁전 베르샤유 겨울방에서 1919년 6월28일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으로 

독일과 연합국 사이에 체결한 조약에 서명한다.이것이 베르샤유 조약이다.

독일은 알자스,로렌을 다시 프랑스로 반환하고 독일 해외 식민지는

영국 프랑스 일본이 나눠가지게 된다.

연합국 대표들은 독일이 도저히 갚아낼수 없는 330억달러의 가혹한 배상금을 요구하고

무슨일이 있어도 배상금 지불을 해야한다 주장했다

이는 독일이 전쟁 복구 대신에 배상금을 포기하고 연합군측에 반발하는 결과를

불러 일으켰다

결국 독일은 1930년경 군국주의로 돌아섰고 히틀러라는 독재자가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앞에서도 언급한 독일 역사를 공부하다 보니 베를린 여행이 언제 끝날지

모르게 생겼다.

 

공사중이라 가림막이 쳐져 있어 비스마르크 동상을 하마트면

지나칠뻔 했다.

 

 

 

Roon론

육군장관이 해군 장관을 겸한 그는 1871년 백작이 되고

1873년 원수가 되었다.

국민들의 반대에도 강제 징병제를 학충하여 1866년 오스트리아 전쟁과

1870년에서1871년 프랑스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

비스마르크 뒤를 이어 프로이센 총리가 되었으나 1873년 건강상 이유로 사임했다

보수적인 국가주의자인  비스마르크와 몰트케 론은 독일제국의 삼걸로 알려져 있다

 

 

 

 

 

승전탑을 보고 Tiergarten 숲속으로 들어가

빵과 물로 점심을 때웠다.

허기지고 피곤한 여행중에 홀로 빵조각을 뜯는다면 슬픔이 몰려와

눈물젖은 빵이 될뻔했는데 동행한 남편과 식사 시간인줄 어느새 알고

날아온 까마귀 부부와 새끼 한마리 덕분에 안은 말랑거리고

겉은 딱딱한 빵을 씹고 있어도 외롭지 않고 시끄러운 자동차 정적 소리대신

새들의 합창소리와 녹음 우거진 베를린 한복판 정원에서 점심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침침한 백열등 밑에서 하는

어느 레스토랑의 식사보다 훌륭한 점심이었다.

베를린 여행중 소위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 한번 안들어가고

사투리로 맨마등게, 빤히 눈에 보이는 치킨집만 두번 들어갔다.

격식있는 음식을 먹을래도 공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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