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곽길 1

2015. 4. 4. 14:38둘레길

 

 

일시-2015년4월3일 금요일 흐린후 갬

장소-서울 성곽길

코스-돈의문터(서대문)강북 삼성병원 경비실에서 스탬프 찍고-경교장-월암 근린공원

      -종로 문화센터-인왕산(339.9m)_-윤동주 시인의 언덕-점심   

      -창의문(북소문)-돌고래 쉼터-백악산(342.5m)-1.21사태 소나무-청운대-나무 계단길   

      -숙정문(북대문)-말바위 안내소에서 스탬프 찍고-보수공사로 삼청공원으로 우회

      -성균관대학교 후문-와룡공원-경신고 성곽 흔적-혜화문(동소문)-낙산(124.4m)-흥인지문(동대문)에서 스탬프 찍고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한양공고-광희문-신당동 주택가-장충 체육관-반얀트리클럽-국립극장-남소문터

      -나무계단길-떡과 두유로 요기-남산 N타워(270.9m)-목멱산 봉수대-안중근 의사 기념관-백범 광장

      -숭례문(남대문)에서 스탬프 찍고-중앙일보 소의문터-배재공원-정동교회-돈의문터(서대문)에 도착

 

총길이 18.627km+우회로 약 2km=20.627km

총 소요 시간 9시간(8시간 걷고 1시간 식사및휴식)

 

 

어제 내린 비로 대지가 촉촉한 아침이다

봄 맞이 하러 걸은 서울 한양 도성에는

이미 봄이 와 있었다.

오전내내 구름에 가리워진 햇빛으로 한양도성 시야가 흐렸어도

먼지가 씻겨내린 상큼한 공기는 코끝에 전해졌다

 

한양 도성은 조선왕조 도읍지인 한성부의 경계를 표시하고

권위를 드러내며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성이다

태조5년(1396년)백악(북악),낙타(낙산),목멱(남산),인왕의 내사산 능선을

따라 축조한 이후 여러차례 개축하였다.

평균 높이 5~8m로 전체길이 18.627km에 이르고

전세계 도성중 가장 오랫동안(1396~1910),514년의 도성 기능을 수행했다.

1899년 도성 안팎을 연결하는 전차가 개통됨에 따라 성문이 제기능을 잃었고

1907년 일본 왕세자 방문을 앞두고 숭례문 좌우 성벽이 철거되었다.

1908년 평지의 성벽이 대부분 헐렸고 성문도 온전치 못하게 되었다

1914년 소의문이 헐리고 1915년 돈의문도 건축자재로 매각되고 말았다

1915년 광희문 문루가 붕괴되고1928년 혜화문 문루가 붕괴되고

1925년 일제는 남산 서북쪽 자락에 조선신궁과 흥인지문옆에 경성 운동장을

지으면서 성벽을 헐어 성돌을 석재로 썼다

해방후에도 주택과 도로 공공 건물 학교를 지으면서 성벽이 훼손되는 일이

많았다.

도성의 중건은 1968년1.21사태후 숙정문 주변에서 시작되어

1974년 전구간으로 확장되었다

단절된 구간을 연결하는라 오히려 주변의 지형과 원석을 훼손하는 경우도

있단다.

현재는 흥인지문 구간인 흥인지문에서 장충체육관까지와

숭례문구간인 백범광장에서 돈의문터까지 멸실된 도성을 제외한

칠십프로정도 구간이 복원 중건 되었다

 

도성은 4대문과 4소문으로 이어져 있는데

4대문은 북쪽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숙정문,흥인지문,숭례문,돈의문이며

4소문은 서북쪽으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창의문,혜화문,광희문,소의문이다.

이중 돈의문과 소의문은 멸실 되고 없다.

 

성곽길은 주로 내사산을 중심으로 백악,낙산,흥인지문,남산,숭례문,인왕산 구간으로

6구간으로 나누어 걸어도 좋고

백악산 구간,낙산 구간,목멱산 구간,인왕산 구간으로

4구간으로 나뉘어 걸어도 좋다.

 

 

 

 

 

 

 

유교의 덕목인 인의예지를 딴 동서남북의 사대문과 사소문의

그중 불의를 부끄러워하는 마음인 의롭다의 義에 해당되는 터만 남은

서대문인 돈의문터로 도착하여 강북삼성병원 경교장옆 경비실에서'

스탬프를 찍었다.

병원 후문을 벗어나 아파트 신축으로 시끄러운 공사장을 왼쪽에 끼고

오르기 시작하면 성곽길 투어 안내푯말이 나오고 새로 단장한듯 깨끗한

성곽이 나오고 이제부터 본격적인 성곽길 투어가 시작된다.

사직 터널위로 다듬어진 성곽길은 걷기 좋게 되어 있고

종로 문화센터가 나오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오분만 내려가면 

사직공원이 나온다

 

 

 

 

 

 

 

 

 

 

 

 

 

 

 

 

 

 

 

 

 

 

 

 

 

 

 

 

 

 

 

 

 

 

 

 

 

 

 

 

 

 

 

 

 

 

 

 

 

 

 

 

 

 

 

 

 

 

 

왼쪽에 무악동과 오른쪽의 종로의 서촌을 끼고 성곽은

나무계단과 돌계단을 올라 범바위를 지나서 인왕산(339.9m)의

정상에 섰다.

인왕산은

산 전체가 화강암 덩어리로 곳곳에 약수터와 경치가 아름다워

서울시민의 유원지였다

정선의 '인왕제색도'가 유명하다

선바위 부처바위 모자바위 기차바위 범바위의 거대한 바위 덩어리가 많은

인왕산에는 호랑이를 떠올린다.

옛날 서울 장안에 인왕산에서 내려온다는 호랑이로 사람들이 해가 저물면

밖에 못다녀 호랑이를 잡을 사람을 구하자 어느 고을 군수가 나섰다

군수는 부하를 시켜 인왕산 중간쯤 반석위에 늙은 중이 자고 있을테니

"중놈아 너를 불러 오라고 해서 왔다"라고 하라며 무슨 글자를 쓴 쪽지를 주었다

부하는 군수가 시킨대로 하였더니 늙은중은 벌벌 떨면서 따라왔단다

군수는"당장 네새끼를 이끌고 압록강은 건너지 않으면 모두 말살 시키겠다."

호통을 치자 중은 떠나려 했다

이광경을 본 사람들이 호랑이로 변해 보라하니 군수가 명령하자

중은 세번 절을 넘어 집채만한 호랑이로 변했다

사람들이 호랑이를 보고 무서워하자 군수가 다시 사람으로 변하라고 하여

사람이 되어 그날밤 호랑이때를 데리고 압록강으로 떠났다는 전설이다.

실제 도성안쪽에는 호랑이 동상이 있다.

 

바위덩어리의 기차바위가 손에 잡힐듯 가까이에 있고

도성안으로는 조선왕의 경복궁과 현재왕의 청와대가 안개속에

희끄무레 앉아 있는 모습이 나타난다.

1392년 당시 한양은 조선개국을 앞두고 북악을 주산 남산을 안산

낙산과 인왕산을 좌우 용호로 삼았던 곳으로 배산임수의 궁궐터로 여겼다

인왕산 백악산과 낙산이 병풍처럼 둘러치고 남산의 녹지가 보기좋게

놓여있는 도성안이 풍수지리를 몰라도 명당은 명당으로 여겨진다.

 

중종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는 치마바위를 우측으로 두고

성곽길은 이어진다

여자의 넓은 치마를 연상시키는 주름진 바위는 경회루에서 보면

한눈에 들어온다.

치마바위의 기막힌 전설이 있는데

16세기초 조선은 연산군의 폭정으로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

11대 왕으로 중종이 등극한다

중종의 비는 연산군의 추종자였던 신수근의 딸이었다

당시 좌의정이었던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으로 누이동생을 연산군에 시집보내고

딸을 중종에 시집보내 부귀영화를 누리려 했으나 두 임금을 섬길수 없어

중종반정에 동참하지 않아 죽임을 당하고 만다.

역적의 딸을 왕비로 삼을수 없다는 반정 공신들의 압력에 의해

책봉 칠일만에 왕비를 폐하여 인왕산밑 사가로 내보낸다.

고모가 연산군의 비이고 아버지가 연산군의 매부라는 이유로

폐비된 꼴이 되었다.

그러나 중종의 애정이 남달라 왕은 매일 경회루 누각에 올라

부인의 사가가 있는쪽을 바라보며 그리워하니

신씨는 궁에서 입었던 붉은 치마를 바위에 걸쳐놓아 화답했다는

치마바위의 전설이 있다.

폐비 신씨는 자손 없이 71세에 죽고 시호도 없이 지내다

180년이나 지난 영조때 단경왕후라는 시호와 온릉이라는 능호와

왕후로 복위된다

치마전설의 그녀는 조선 역사상 가장 짧은 칠일간의 왕비로 남는다.

지금으로 치자면 열두살이면 간신히 초등공부를 마칠때 시집가던 그시절이

너무했다 싶고 왕비되어 도성안에 갇혀 사느니

자유롭게 내맘대로 돌아다닐수 있는 민초로 사는것이 천만다행이다 싶어

네모반듯하고 커다란 돌덩이가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지고 갑갑해진다

 

 

 

 

 

 

 

 

 

 

 

 

 

 

 

 

 

 

 

 

 

 

 

 

 

 

 

 

 

 

 

서울을 한바뀌 돌자면 갈길이 아직 구만리같이 멀어 발길을 재촉하여

자하문 터널위로 통과하여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 도착했다.

"죽는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그의 서시 한글자 한글자가 봄볕에 꽃잎처럼 흩날린다.

일제 말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사랑한 시인의 언덕위에는

다듬어진 잔디밭위에 소나무가 멋진 공원이 되었다

사직동에서 부터 걸어오는 내내 진달래와 개나리보다

발밑에서 쑥쑥 싹을 틔운 쑥만 눈에 들어와 쑥 캐고 싶은걸 꾹 참고 있거늘

잔디 공원에 산책나온 아줌마들이 앉아 쑥을 캐고 있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내려와 걷기 시작한후 두시간여 시간이 지나

부암동에서 해물 칼국수와 들깨 칼국수를 점심으로 먹었다.

기름집에서 들기름 짜는 냄새가 베인 들깨 칼국수는 고소하고

해물 칼국수는 뜨거운 국물이 시원한 맛이 좋았다.

 

 

 

 

 

 

 

 

 

 

 

 

 

 

 

 

 

 

도로를 건너 다시 창의문(북소문)으로 올라섰다.

창의문은 조선의 사소문중 문루가 남아 있다

인조반정때 창의문은 통하여 도성을 장악함으로 반정에 성공했다

종로구 청운동 창의문에서 북악산의 정상인 백악마루를 지나

숙정문을 거쳐 말바위 안내소까지는 신분증을 지참한 사람만

통과할수 있다.

1968년 1월21일 이후 40년동안 폐쇄되었다 2007년 일반인에게

개방된 구간이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일이고 3월에서 10월까지는 오전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입장

퇴장은 오후6시이다

동절기인 11월에서 2월까지는 오전10시부터 오후3시까지만 입장

퇴장은 오후5시이다

창의문 안내소에서 신청서를 작성하고 신분증을 제시하여

번호표가 달린 패용증 목걸이를 매달고 그구간을 지나야 한다.

 

1.21사태란 당시 북한민족 보위성 정찰국소속 공작원124부대

무장 게릴라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여 박정희를 암살하기 위해 세검정 고개까지

침투했으나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당시 북한군 29명이 사살되고 한명은 북으로 도주하고 김신조는 투항했다

유일하게 생포된 김신조의 이름을 따 김신조사건이라고도 한다.

무장공비31명을 가로막고 검문을 벌이다 공비들의 총격으로

최규식 종로 경찰서장이 사망했다

창의문 가기전 자하문 고개넘어 특진된 경무관 최규식 동상이 서 있고

총탄자국이 남은 소나무는 백악마루 아래 성곽길에 서 있다.

그 사건이 있고 난후 향토 예비군을 창설하는 계기가 되었단다.

창의문에서 백악마루까지는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성벽을 쌓아올려

오를수록 절경이 빼어나다.

돌고래 쉼터에서 숨을 고른후 가파른 나무계단으로 가파른 숨을 몰아

한참을 오르면 도성밖은 북악 팔각정이 바로이고 서울 도성이

발 아래 있다

 

 

 

 

 

 

 

 

 

 

 

 

 

 

 

 

 

 

 

백악산(342.5m)정상인 백악마루에 오른다

북악산이라고도 하는 백악산은

경복궁에서 볼때는 자연이 준 후원임셈이다

숙정문과 말바위 촛대 바위가 유명하다.

 

백악산 소나무가 아름다운데 조선개국초부터 특별히 보호해왔으나

현재는 능선주변에만 분포되어 있다

소나무가 많은 성곽길로 내려와 청운대에 도달한다.

청운대에서 바라보면 왼쪽에는 종묘와 오른쪽으로 사직을 세운 경복궁과

세종로가 일직선상에 놓여 있는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와

서울도심을 조망할수있는 최고 전망대로 꼽는다.

종묘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유교의 사당이고

사직은 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도성안과 밖을 드나들던 암문과 산세가 잘보이는곳에 성벽일부를

둥굴게 만들어 주요시설과 지점을 보호하기 위해만든 굽은성인

곡성을 지난다.

곡성은 인왕산과 백악산이 각각 하나씩 있다.

곡성을 지나 촛대를 닮았다는13m의 촛대바위가 나온다

1920년 일제는 민족 말살정책일환으로 지맥을 끊기 위해 촛대바위 정상과

인왕산 백악산 곳곳에 쇠말뚝을 박았었다.

임진왜란 7년 일제 강점기36년을 빼고도 현재까지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놈들은

용서할수 없는 족속들이다.

 

경비가 삼엄한 구간에는 블랙야크 로고가 선명한 등산복을

챙겨입은 젊은 청년들이 몇백미터마다 서서 보초를 서고 있다.

모두 인물 위주로 뽑았는지 수방사 군인들은 하나같이

잘 생겼다.

구름에 가려진 해가 머리위로 내리쬐고 등에 땀이 촉촉해질때쯤

숙정문(북대문)으로 내려섰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인 지혜롭다의 智에 해당하는

숙정문은 현존하는 도성문중 좌우 양쪽 성벽이 연결된 유일한 문인

한양도성의 북쪽 대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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