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14. 10:35ㆍ참고
작가-신정일
‘날이 부옇게 밝았다’는 말에서 유래한 이름이라는 부여는 새벽의 땅이었다. 그러나 그 조용했던 새벽의 평온은 나당 연합군의 침략으로 산산이 깨졌다. 《동국 여지승람》은 당시의 모습을 “집들이 부서지고 시체가 우거진 듯하였다”라고 기록했으며, 이때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몸을 던졌다고 전해져 온다.
정림사지의 백제탑을 보라. 오층석탑의 기단부에 ‘대당평제탑大唐平齊塔’이라는 글자가 화인火印처럼 찍혀 천 몇백 년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사람들은 가끔 옛 추억을 찾아가듯 부소산 낙화암에 올라 요절한 가수 배호의 〈추억의 백마강〉을 부르는 것으로 잃어버린 왕국을 생각하곤 한다.
백마강 달밤에 물새가 울어
잃어버린 옛날이 애달프구나.
저어라 사공아, 일엽편주 두둥실
낙화암 그늘 아래 울어나 보자.
조선 숙종 때 사람 석벽石壁 홍춘경은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나라가 망하니 산하도 옛 모습을 잃었구나.
홀로 강에 멈추듯 비치는 저 달은
몇 번이나 차고 또 이지러졌을꼬.
낙화암 언덕엔 꽃이 피어 있거니
비바람도 그해에 불어 다하지 못했구나.
이 같은 역사를 지닌 부여에서 내세우는 부여팔경은 어떠할까? 양양 낙산사, 삼척 죽서루 같은 관동팔경이나 도담삼봉, 사인암 같은 단양팔경에서 내세우는 아름다운 광경이나 경치와는 이름부터가 다르다. 미륵보살상과 탑하나 덜렁 남 은 정림사지에서 바라보는 백제 탑 뒤의 저녁노을과 수북정에서 바라보는 백마 강가의 아지랑이, 저녁 무렵 고란사에서 들리는 은은한 풍경 소리, 노을 진 부소산에 이따금 뿌리는 가랑비, 낙화암에서 애처로이 우는 소쩍새 소리, 백마강에 고요히 잠긴 달, 구룡평야에 내려앉은 기러기 떼, 규암나루에 들어오는 외로 운 돛단배.
부여팔경은 부소산과 낙화암 그리고 그 아래를 흐르는 백마강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 경치다. 거기에 신동엽 시인의 〈금강잡기錦江雜記〉에 이르면 백마강과 부여 땅에 스민 슬픔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깨닫게 된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초여름 백마강가 고란사에 세 젊은 여승이 찾아왔다. 회색 승복을 단정히 입은 그들 은 이틀을 묵으며 고란사를 찾는 사람들과 그 근처 상인들과 잘 어울렸다. 때로는 보트 도 타고 조약돌을 주워 바랑에 넣으며 이틀을 지낸 후 여승들은 조약돌이 가득 담긴 무거운 바랑을 어깨에 걸어서 허리에 꼬옥 졸라매고 일렬로 늘어서서 강의 중심을 향해서 걸어 들어갔다. 그것을 본 사람이 있었다. 건넛마을 사공이 날씨를 보러 문밖에 나왔다 가 어스름 아침에 강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세 그림자를 보고 말았다. 놀란 그는 마을 청년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그와 때를 같이 하여 주먹만 한 소나기 빗발이 온 천지를 덮으면서 난데없는 뇌성벽력이 하늘과 땅을 뒤흔들었다. 소나기와 천둥이 가라앉은 후 마을 사람들과 절간 의 승려들이 모든 배를 동원하여 그들을 찾았는데 가장 어린 여승의 시체가 물 위에 떠올랐다. 스물둘, 스물넷이라던 두 여승은 끝내 사라지고 말았다. 아무 유서도 없이, 유언도 없이 그들은 떠오르지 않기 위해, 발견되지 않기 위해 무거운 자갈 바랑을 몸에 묶고 물속으로, 죽음의 길로 걸어간 것이다.
그들은 이승 저편 피안의 세계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그들의 죽음에 하늘은 어찌하여 소나기와 뇌성벽력을 조화했을까? 신동엽 시인은 그날 오후 백마강가 에 나가 죽어서 누워 있는 그 젊은 여승을 보았단다. 너무도 앳된 얼굴, 이 세상 그 어느 것에도 상관이 없다는 듯 평화스러운 얼굴을 바라보고는 강기슭을 한없이 거닐었다고 한다.
아름다운 경관과 나라 잃은 슬픔이 곁들여져 이곳을 찾는 나그네들의 심사를 어지럽히는 백마강 건너로 부소산이 솟아올라 있다. 부소산에는 임금과 신하들 이 서산에 지는 달을 바라보며 풍류를 즐겼다는 송월대가 있고, 동쪽 산정에는 임금이 매일 올라가서 동편 멀리 계룡산 연천봉에 솟아오르는 아침 해를 맞으며 국태민안을 빌었다는 영일루가 있으며, 군창 터가 남아 지금도 불에 탄 곡식을 찾아볼 수 있다. 낙화암은 삼천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고사로 유명하지만, 《여지도서》에 삼천궁녀라고 명시된 구절은 없다.
낙화암은 관아의 북쪽 1리에 있다. 의자왕이 당나라 군사에게 패하자 궁녀들이 급히 달아나 이 바위 위에 올라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다. 이에 꽃이 떨어진 바위라는 뜻으로 낙화암이라고 이름 하였다.
삼천궁녀가 떨어져 죽었다고 와전된 것은 어찌 된 일일까? 사람이 떨어져 죽은 바위 즉 ‘타사암墮死巖’이라고 실려 있는 바위가 삼천궁녀가 떨어져 죽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니,
그 역사의 현장인 사비성의 궁궐이 흔적도 없아 사라지고, 백제 문화재단지에 들어선 백제의 왕궁에서 옛 역사를 회고하는 나는 누구인가?
2020년 12월 13일 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