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도 예절이 있다. 진혼곡과 만가, 전동성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중 한곳이다. 1908년부터 시작되어 20여 년에 걸쳐 완공된 이 성당 자리에서 다산 정약용과 외사촌이었던 윤지충, 그리고 권상연이 참수형을 당한 곳이다. 상여도 없이 만가挽歌도 없이 이 세상을 하직한 사람들이 천주교의 순교자들과 그 뒤에 이 땅에서 숨져간 동학군들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하고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구천을 떠돌고 있으리라. 생각하며 전동성당의 아름다운 공간에서 지난날을 떠올렸다.
1979년 10월 27일 이른 새벽이었다. 그 날도 다른 날과 다름없이 새벽에 일어나 옆에서 자는 사람들을 깨울세라 조용히 음악을 들었다. 슈베르트 현악사중주곡인 <죽음과 소녀>를 턴테이블에 얹어놓고 조용히 듣고 있자, 여러 생각들이 겹쳐서 떠올랐다. 그리고 아침이 밝아오고 나는 신 제주 건축공사장에서 벽돌을 져 올리다가 무심결에 라디오를 켰다. 그 시간은 분명히 뉴스 시간이었는데, 웬걸, 내가 좋아하는 낯익은 음악이 해설도 없이 흐르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음악은 슈베르트의 현악 사중주곡 「죽음과 소녀」였다. 1994년 제작된 시고니 위버의 「진실」이라는 영화에서 줄기차게 흐르던 그 음악 중에 잔잔하면서도 모든 것을 체념해 버린 듯한 그러면서도 격렬한 흐느낌 같은 제2악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음악을 들으며 왜 라디오에서 이런 음악이 나오는지 의아해했다. 그러나 그 음악에 이어 모짜르트의 레퀘엠이 흘러나왔고 계속해서 낮고 우울한 음악들이 이어졌다. 이상도 하지, 두 시간이 지난 오전 10시 무렵 그 원인이 밝혀졌다. 17년 동안 나라의 제일가는 실권자였던 박정희 대통령이 그가 총애하던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그 날부터 열흘 간 국장 기간 내내 라디오나 TV에서는 어느 채널이건 간에 슬픔으로 온 세상이 착 가라앉은 듯 장송곡들이 줄기차게 메아리쳤다. 그렇게 오랫동안 그 슬프디 슬픈 음악을 들었던 적은 없었을 것이다. 10대 후반부터 좋아했던 진혼곡과 장송곡들, 브라암스의 독일 진혼곡, 베토벤의 3번 영웅교향곡 제2악장, 포레의 레퀘엠, 베르디의 진혼곡, 모짜르트의 레퀘엠,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비창의 4악장, 쇼팽의 장송소나타, 등 내가 그 무렵 흠뻑 빠져 있었던 그 음악들을 들으며, 한 사람의 죽음이 무언가 설명하기 어려운 기쁨과 동시에 슬픔도 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 밤 그 사람으로 인하여 피해(서울대를 다니다가 학생운동을 하고, 강제징집을 당해 같이 군대생활을 했던)를 입은 뒤 의도했던 바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던 서울의 친구 대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어떠냐 오늘 기분” 하고 묻는 나의 말에 “왜 기쁨보다 허전한 슬픔이 밀려오지?”라고 답하던 그의 목소리에는 묘한 여운이 깔려있었다. 열흘의 국장 기간이 지나고 드디어 장례식날이 되었다. 나는 그 장례식에 앞서서 어떤 절차에 의해서 국장이 치러지는가보다도 어떤 음악을 선택해서 내보낼 것인가가 더 관심이 많았다. 1979년 11월 초, 어느 날, 지금은 사라진 조선총독부 건물 즉 중앙청 앞에서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오래전 일이라 내 기억이 확실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지금은 사라진 옛 중앙청 앞에서 장례식이 거행된 것으로 기억된다. 장례식 내내 베토벤의 영웅 교향곡 중 2악장 장송행진곡이 계속되었다. 나폴레옹의 영웅적인 자태를 찬미하기 위해 작곡하였으나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르자 분노한 베토벤은 17년 후 나폴레옹이 유배지에서 쓸쓸하게 죽었다는 보도를 듣고 “결말에 적절한 음악을 써두었다.” 말했다는 일화를 간직한 곡이 장송행진곡이다. 수많은 국화꽃으로 덮혀 있는 운구차가 서서히 움직이면서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중 장송 소나타가 울려 퍼졌다.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던 사람들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는 가운데 슈베르트의 「죽음과 소녀」가 바톤을 이어 받았다. 그 때 나도 덩달아 처연해져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었다. 그 눈물은 박정희의 죽음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라, 우주의 거역할 수 없는 섭리에 나 역시 순응해야 하는 운명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삶과 죽음은 가깝게 있고 우리 모두는 죽는다. 그러나 이처럼 장엄한 행사장 안에서 수 많은 사람들의 오열과 장송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생애를 마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와는 달리 어느 한 사람 지켜보는 이도 없이 홀로 쓸쓸히 자연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다. 나는 장송곡들을 들으면서 자연스레 죽음을 새삼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죽음학에 대한 공부를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많이 했을 것이다. 훗날 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후 장레식도같은 패턴의 음악이 흐르면서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동서양 문화의 차이가 있지만, 죽음에 대한 예절이 있는 것이다. 우리의 문화가 꽃상여와 만가로 죽은 자들을 보내주었듯, 그들은 진혼곡으로, 장송곡으로 그들을 보낸 것이다. 전동성당을 지나 치명자성지로 오르면서 삶과 죽음을 이렇게 저렇게 생각했다. 천천히 오르는 길목에 눈송이 사이로 피어 있던 동백꽃과, 설중매, 그리고 복수초가 그래도 산다는 것의 소중함을 나에게 일깨워 주고 있었다. 2020년 2월 19일 수요일, 전동성당에서 치명자 성지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