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1. 17. 13:40ㆍ참고
우리땽 걷기----신정일
길 위에서 만나는 인문학 <아름다운 남도의 길에서 전라도 맛을 느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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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에서 첫 번째로 전라도 맛 기행을 실시합니다. 전라남도 일원으로 한정한 이번 기행은 강진 병영의 한정식, 나주 영산 홍가의 홍어의 모든 것, 법성포 굴비 정식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다산 선생이 걸었던 강진의 고성산 길, 월출산 아래의 누릿재와 월출산 아래 길, 영산강 길, 그리고 아름답기로 소문난 영광의 백수해안도로를 걷게 될 이번 맛과 멋이 함께 하는 기행에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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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강진 대합이 유명하다는 뜻으로 “강진康津 원님 대합 자랑하듯 한다.” 는 속담이 있는 강진은 백제 때 도무군(道武郡)이었고, 고려 때에 도강현(道康縣)으로 고쳤다. 태종 17년에 도강현과 탐진현을 합하면서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된 강진군에 강진읍의 지형과 관련이 있는 <연지설화>가 있다.
약 350옂 전 일이다. 강진에 부임한 역대 현감들은 아전들의 횡포로 인하여 소신 있는 행정을 펼 수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어떤 때에는 현감의 자리가 공백일 때도 있었다. 효종 4년인 16653년에 신유가 현감으로 부임하여, 아전의 횡포가 강진의 지세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강진의 지세는 ‘누워 있는 황소의 형국, 즉 와우형臥牛形이었다. 신유는 ’황소는 코뚜레를 뚫어야 말을 듣는다‘는 점에 착안하여 코뚜레 자리에 연지를 파서 지세를 누르자 아전들의 횡포가 사라지고 덕치를 펼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 어린이 공원 주변이 옛날 연못이 있던 곳이다.
이곳 강진은 다산 정약용이 17년에 걸쳐 유배생활을 한 강진의 만덕산을 윤회尹淮는 기문에서“전라도 강진현 남쪽에 우뚝 솟아 맑고 빼어난 산이 바닷가에 이르러 머물렀으니, 만덕산이라 한다., 산의 남쪽에 부처의 궁전이 있어 높고 시원하게 트이어 바다를 굽어보고 있으니, 백련사가 곧 그것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신라 때에 처음 세웠고, 고려의 원묘圓妙대사가 새로 중수하였는데, 전해 내려와 11대의 무외대사 때에 이르러서는 항상 법화도량이 되어 동방의 이름난 절로 일컬어졌다. 섬 오랑캐가 날뛰게 되자 바다를 등진 깊은 지역이 폐허가 되어 버렸으며, 절도 그 성쇠를 같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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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의 승 혜일(慧一)은 “앞 봉우리는 돌창고 같고, 뒷 봉우리는 연꽃 같았다” 하였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시 한편을 지었다.
“백련사 경치도 좋고 만덕산 맑기도 하여라. 문은 소나무 그늘에 고요히 닫혔는데, 객이 와서 풍경소리 듣는구나., 돛은 바다를 따라서 가고, 새는 꽃 사이에서 지저귀네. 오래 앉아서 돌아갈 길을 잊으니, 티 끝 세상 전혀 생각 없네.” 만덕산 중턱에 자리 잡은 백련사(白蓮寺)에서 동백나무 숲길을 지나 산길을 걸어가면 정약용의 숨결이 바람으로 남아 있는 다산초당(茶山草堂)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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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 밑 고을 영암
나주의 서남쪽이 영암군이고 영암읍은 월출산 밑에 자리 잡고 있다. 백제 때 월나군(月奈郡)이었고 신라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진 영암군의 풍속을 “농업에 전적으로 힘쓰며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꾸밈이 없다” 하였으며, 유관(柳觀)은 그의 시에서 “긴 내가 출렁출렁 성을 안고 흐르네”라고 노래하였고, 고려 때의 김췌윤(金萃尹)은 “땅이 창해바다와 접하며 장한 경치가 많다”고 하였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는 월출산을 김극기는 다음과 같이 예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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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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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의 많은 기이한 모습을 실컷 들었거니, 그늘지며 개이고 추위와 더위가 모두 서로 알맞도다. 푸른 낭떠러지와 자색의 골짜기에는 만 떨기가 솟고, 첩첩한 산봉우리는 하늘을 뚫어 웅장하고 기이함을 자랑하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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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 남쪽에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가 있고, 서쪽에 영암군 구림면이다. 이 마을들은 신라 때부터 이름난 마을로서 서해와 남해가 맞닿는 곳에 위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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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은 청천에서 뜨지 않고
월출산은 수많은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모습이 하나의 거대한 수석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 폭의 아름다운 산수화가 되기도 하지만, 나무나 풀 한 포기 제대로 키울 수 없는 악한 산으로 보이기도 한다. 1973년 삼월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가 1988년에 국립공원으로 승격된 이 산자락 밑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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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 홍어 나주 홍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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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하면 떠올리게 되는 흑산도 홍어는 흑산도 근해에서 잡히는 홍어다. 흑산 홍어는 인천이나 군산에서 잡히는 홍어와 달리 육포 자체가 씹으면 입에 착 달라붙을 정도로 차지고 맛이 좋다.
이 홍어를 먹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다. 껍질을 벗겨 날 것 그대로를 초고추장이나 겨자를 넣은 간장에 찍어먹거나, 막걸리와 같이 먹는 홍 탁, 삶은 돼지고기를 얇게 썰고 배추김치와 함께 먹는 삼합三合, 양념을 묻혀 구어 먹는 것, 겨울철에 푸르게 자란 보리 싹과 내장을 넣어 끓인 국, 날 것을 옹기그릇에 담아놓았다가 며칠 뒤 꺼내먹으면 입안이 화끈하게 퍼지는 매운 맛이 일품이다.
이 뱃길을 통하여 흑산도 홍어와 추자도의 멸치젓 배가 드나들었다. 그때의 영광은 찾을 수 없지만 지금도 영산포에는 홍어洪魚를 조리해 파는 상점들이 여러 곳 남아있는데 ‘영산홍가’ ‘선창홍어’ ‘호남수산등의 홍어집들이 그 유명세를 가지고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홍어는 흑산도 홍어가 일품이다. 그러나 흑산도 홍어가 별로 잡히지 않자 흑산도 홍어잡이 배가 한척밖에 남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 틈새를 비집고 칠레산 홍어가 그 빈자리를 메꾸었는데 올해들어 흑산도에서 홍어가 많이 잡히기 시작했다.
어부들의 말에 의하면 “칠레산 홍어는 뻐시어가지고 맛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흑산도 홍어는 창시(내장)같은 것도 하나도 안 버리고 먹는다고 한다.” 홍어는 홍어목 가오리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로 우리나라 연근해와 남 일본 연해 동중국연해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산, 목포, 영광, 인천등지의 연근해에서 많이 서식하는데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지리지 중 가장 오래된 <경상도 지리지>에는 울산군의 토산공물로 실려 있다. 홍어는 전라남도 흑산도에서 나는 홍어를 제일로 치며 겨울철에 맛이 가장 좋다. 홍어는 홍어 자체에 매운맛이 있어 맛이 뛰어나지만 신선할 때보다, 약간 삭혀서 암모니아 냄새가 날 때 가장 맛이 있다.
칠레산은 색깔이 탁하지만 흑산도 홍어는 표피에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지만 뭐니뭐니 해도 홍어는 껍질을 벗기지 않고, 헝겊으로 쓱싹 문질러서 대충 썰어 먹는 맛이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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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는 톡 쏘는 맛이 특징인데, 그 맛은 코를 통해 곧장 올라와 뇌리를 스치는 암모니아 냄새라고 한다. 그 맛을 어떤 사람은 “역겨워야 완성되는 역설의 미학”이라고도 하는데, 그 맛이 만들어지는 것이 흑산도에서 이곳 영산포까지 오는 열흘이나 15일간의 뱃길이었다. 배에 냉동시설이 없던 시절 열흘정도의 시간에 자연발효가 되어 식힌 홍어가 나오게 된 것이다. 영산포 ‘영산강 홍어’집을 운영하는 양치권(55세)씨의 말에 의하면 홍어는 암놈이 맛있고 비싸기 때문에 어부들은 잡자마자 수컷의 성기를 잘랐다고 한다 그래서 억울한 일로 싸울 때에 쓰는 말에 “만만한 것이 홍어좆이라더니 내가 홍어좆이냐”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신정일의 <영산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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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포항에 있는 영광굴비
갈재의 서쪽에 자리 잡은 지역이 영광․함평․무안이고 남쪽이 장성군과 나주시인데 영광을 일컬어 옥당고을이라고 부른다. “아들을 낳아 원님으로 보내려면 남쪽에 옥당골이나 북쪽의 안악골로 보내라”는 옛 말에 나오는 옥당골은 지금의 영광을 말하고, 안악골은 지금의
황해도 안악군 일대를 말한다.
그러한 말이 나오게 된 이유는 들이 넓을뿐더러 바다가 가까워서 바다에서 얻는 이익이 많았기 때문이다.
?택리지?에 “영광 법성포는 밀물 때가 되면 포구 바로 앞에 물이 돌아 모여서 호수와 산이 아릅답고, 민가[閭閻]의 집들이 빗살처럼 촘촘하여 사람들이 작은 서호(西湖)라고 부른다. 바다에 가까운 여러 고을은 모두 여기에다 창고를 설치하고 세미(稅米)를 거두었다가, 배로 실어 나르는 장소로 삼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법성포는 옛날 진나라의 중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백제 땅에 처음 발을 들여 놓은 곳이라고 전해오는 포구다. 고려 때 이자겸(李資謙)은 스스로 왕이 되려고 난을 일으켰다가 부하 척준경(拓俊京)의 배반으로 실패하고 법성포로 귀양을 왔다. 그때 이자겸은 칠산바다에서 삼태기로 건질 만큼 잡혔던 영광굴비를 석어라는 이름을 붙여 사위였던 인종에게 진상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