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0. 16. 14:04ㆍ참고
사단법인우리땅걷기---신정일
길위에서 만나는 인문학. 퇴계 오솔길과 청량산 청량사.
길위에서 만나는 인문학. 퇴계가 즐겨 걸었던 퇴계 오솔길과 청량산 청량사.
독일의 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에는 철학자인 칸트가 매일 걸었던 길이 <철학자의 길>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어떤 전기 작가는 칸트를 두고 “기상, 강의, 식사, 산보 등 모든 일에 일정한 시간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칸트가 회색 코트를 입고 등나무 지팡이를 들고 집 문 앞에 나타나 보리수나무가 있는 작은 길을 향해 걸어가면 이웃 사람들은 정확히 3시 반임을 알았다고 한다. 칸트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사철을 통해 매일 여덟 번 씩 이 길을 왕복했으며,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올 듯이 구름이 잔뜩 끼었을 때에는 노복老僕 람페가 우산을 끼고 뒤따랐다.
몸이 약했던 그는 의사의 도움을 받는 것보다 스스로의 건강은 스스로가 책임지는 것이 옳다고 여겼고 ,이런 산책을 계속해서인지 80세까지 살았다.
그가 걸으면서 지킨 원칙은 코로 숨을 쉬는 것이었고 가을과 겨울 봄에는 감기를 염려해서 길에서 누구를 만나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칸트가 그의 고향 길을 그렇게 걸었던 것처럼 조선 시대의 큰 유학자인 퇴계 이황도 그의 고향 길을 수없이 오고갔다. 그 길이 낙동강의 중 상류인 도산서원에서 청량산에 이르는 길로 <퇴계 오솔길>이라고 명명된 길이다.
칸트와 마찬가지로 퇴계 역시 건강이 좋지 않았던지 <도산잡영>을 보면 건강에 대한 글이 여러 곳에서 보인다.
“나는 항상 오랜 병의 시달림에 괴로워하기 때문에, 비록 산에서 살더라도 마음을 다해 책을 읽지 못한다.”
그가 도산에 머물고 있자 어떤 사람이 퇴계에게 물었다.
“옛날,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명산名山을 얻어 자기 자신을 위탁하였다 하는데, 그대는 왜 청량산에 살지 않고 여기에 사는가? ” 이에 퇴계는 ”청량산은 만 길이나 높은 절벽이 위태롭게 깊은 골짜기에 다 달아 있기 때문에, 늙고 병든 사람의 편안히 살 곳이 못된다. 또 산을 즐기고 물을 즐기려면 그 한 가지가 없어도 안 되는데, 지금 낙천洛川은 비록 청량산을 흘러 지나기는 하지마는, 그 산 가운데 물이 잇는 줄은 알지 못한다. 나도 청량산에서 살기를 진심으로 원한다. 그러면서 그것을 뒤로 하고 이곳을 우선으로 하는 것은, 여기는 산과 물을 겸하고 또 늙고 병든 이에게 편하기 때문이다.“ 라고 대답했다.
퇴계가 그토록 살고 싶어 해서 자주 찾았던 산이 봉화의 청량산이고 지금의 도산서당에서 그곳까지 퇴계의 자취가 남아 있는 길이 퇴계오솔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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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자주 걸었던 <퇴계 오솔길>의 시작은 도산서원에서부터 시작된다. 서원에서 성현이라고 불리는 소리재를 넘으면 온혜리이고 그곳에 퇴계종택이 있다. 온천이 있어서 여러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 온혜리의 퇴계 종택에는 퇴계가 태어난 태실이 있고, 종택에서 나와 1.5Km를 따라 걸어가자 아래 토계마을이다. 그 입구에 있는 산성산에 퇴계 이황 선생이 잠들어 있다.
아래 토계에서 작은 고개를 넘자 원천마을이다. 이 마을에 퇴계의 14대 손인 이육사의 생가터가 있다.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라는<청포도>라는 시로 알려진 이육사(李陸史 1904-1944)의 본명은 원록, 또는 원삼이었다. 다시 지은 이름은 활(活) 이며, 아호는 육사였는데 육사는 대구형무소 수감번호 二六四에서 사용하였다.
여러 차례 투옥 되었던 이육사는 1929년 광주학생운동과 1930년 대구 격문사건에 연루되어 모두 17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렀다. 중국을 자주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육사는 1943년 가을 잠시 서울에 와 있던 중 일본 관헌에서 붙잡혀 북경으로 송치된 후 1944년 1월 북경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생존 시에는 작품집이 발간되지 않았으나 1946년 그의 동생 원조에 의하여 서울 출판사에서 육사 시집이 초간본이 발간되었고 대표작으로는 청포도, 황혼, 절정, 광야 등이 있다.
원천리에서 단천으로 가는 길은 나지막한 언덕배기로 이어지고 , 그 아래에 고즈넉하게 숨은 마을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단사마을이다.
백운지 마을 입구에 백운지교가 세워져 있다. 다리 아래 내려가 물수제비를 뜬다. 가볍고, 날렵하게 생긴 작은 자갈을 골라 낮은 자세로 돌을 날린다. 하나, 둘, 셋, 예닐곱 개의 동그라미가 그려지고 그 동그라미 사이로 노랗게 물들어가는 나뭇잎들이 품에 안기듯 달려든다.
이 물수제비를 초정 박제가는 겹물놀이라고 표현하면서 〈묘향산 기행〉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얄팍한 돌들을 골라가지고 몸을 나직이 비켜서서 물 가운데를 향하여 팔매를 갈래쳤다. 돌은 물껍질을 벗기면서 세 번도 뛰고 네 번도 뛰어 나간다. 느린 놈은 두꺼비처럼 덥적거리다가 빠지고 가벼운 놈은 날래게 제비처럼 물을 차며 나가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떤 놈은 우연히 수면에 참대를 그리면서 마디마디 연장되어 나가기도 하며 혹은 돌을 다금다금 던지듯이 찰락찰락 끝을 채며 인을 찍어 나가니 뾰족한 흔적은 뿔 같고 층층한 파문은 탑 같았다. 이것은 아이들의 놀음이다. 물결이 겹겹이 수면에 움직이는 것을 겹물놀이라 한다.”
지금의 나처럼 퇴계도 가던 길을 멈추고 겹물놀이를 즐기지 않았을까? 길은 어느 새 정자터 마을 입구에 이르고 새로 만든 계단을 내려가자 개목 마을이다. 예전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살았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이 마을이 지금은 빈집만 남고 감나무 몇 그루가 그 빈집들을 지키고 있다.
여기서부터 가송리로 가는 길은 말 그대로 적막강산이고 아름다운 강은 점입가경이다. ‘강물은 푸르지요, 강은 휘돌아가지요,’ 앞산도 첩첩하고 뒷산도 첩첩한 이 강변 길에는 요즘에 세운 시비가 눈에 띈다. 저 멀리 보이는 기와집 몇 채, 가까이 가서 보니 농암 이현보 유적이 분천리에서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란다. 퇴계와 동 시대를 살았던 이현보 선생의 유적지를 지나 길을 휘어 돌자 나타나는 마을이 천 삼백리 낙동강 길에서도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가송리이다.
가사와 송오의 이름을 따라 가송리(佳松里)라고 이름지은 가사리의 쏘두들에는 월명소(月明沼)가 있다. 낙동강 물이 을미 절벽에 부딪쳐서 깊은 소를 이루었는데, 한재가 있을 때 기우제를 지내며, 위에 학소대가 있고 냇가에 “오학 번식지(烏鶴繁殖地)”의 비가 서있다.
이 마을에는 성성재라는 이름의 옛집이 있다. 선조 때 금난수가 이곳에 살면서 퇴계 이황에게 배웠는데 퇴계가 그의 높은 깨달음을 칭찬하여 성성재(性性齋)라고 써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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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건너에 깎아 지른 듯한 단애(斷崖)아래 한가롭게 자리 잡고 있는 고산정(孤山亭)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퇴계의 제자인 금난수(琴蘭秀)(1530∼1599) 선생이 지은 정자이다.
그는 명종 19년(1564)에 이미 예안에서 ‘성재’라는 정자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다가 예안현의 명승지 가운데 한 곳인 이곳 가송협에 정자를 짓고 ‘일등정자’라 하였다.
이곳은 경치가 빼어나게 아름다워서 안동팔경(安東八景)중의 한 곳으로 꼽혔고, 퇴계 선생을 비롯하여 많은 선비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지금도 이 정자에는 퇴계의 시와 금난수의 시 등이 남아있다.
가송리에서 강가를 따라 거슬러 올라 등성이를 넘자 35번 일반국도를 만나게 되고 , 그곳에서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자 청량산 입구이다.
경북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에 자리잡은 청량산(870m)은 지난 1982년에 경북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마이산과 같은 수성암으로 이루어진 청량산은 경일봉, 문수봉, 연화봉, 축융봉, 반야봉, 탁필봉 등 몇 개의 암봉들이 어우러져 마치 한 송이 연꽃을 연상시킨다. 산세는 그리 크고 높지 않지만 아름답게 솟아 있는 그 기이한 경관으로 하여 전국적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강변의 모든 나루가 그러하듯이 옛 사람들이 배를 타고 건넜던 광석나루에는 청량교가 만들어져 그 옛날의 정취를 느낄 수 없다. 다만 청량교에서 바라보는 낙동강은 청량산의 산세와 더불어 빼어난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고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주세붕은 <청량산록>이라는 기행문에서 청량산을 이렇게 예찬했다.
“해동 여러 산중에 웅장하기는 두류산(지금의 지리산)이고 청절하기는 금강산이며 기이한 명승지는 박연폭포와 가야산 골짜기다. 그러나 단정하면서도 엄숙하고 밝으면서도 깨끗하며 비록 작기는 하지만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청량산이다.”
퇴계 이황은 청량산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스스로 호를 ‘청량산인’이라 짓고 이렇게 노래했다.
“청량산 옥류봉을 아는 이 나와 백구, 백구야 헌사하랴 못 믿을 손 도화로다. 도화야 떠나지 마라 어주자 알까 하노라.”
청량산으로 오르는 길은 두 갈래 길이 있는데 곧 바로 오르면 너무 가파르고 조금 더 올라가 오르면 마치 한적한 산책로 같다. 이 산을 사랑했던 퇴계는 청량산의 내청량사 가는 길 옆에 ‘오산당(吳山堂)’이라는 집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하지만 그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남명 조식과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황은 조식과는 달리 벼슬길에 여러 차례 나갔었다. 정치가라기보다는 학자였기에 임금이 부르면 벼슬길에 나갔다가도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기를 몇 차례나 반복했다.
벼슬을 사양하고 전원생활에서 나오려 하지 않아 일부 사람들은 이황에게 ‘산새’라는 별명을 붙이며 조롱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 “세상을 깔보며 자신만 편하게 지내고 있다”고 비아냥거렸다. 당시의 대학자였던 고봉 기대승이 그렇듯 관직에서 물러나는 연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때 이황은 “자기가 몸 바쳐야 할 곳에서 의(義)가 실현될 수 없게 되었다면 당장 물러가야 의(義)에 위배됨이 없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퇴계가 마지막으로 귀향한 것이 그의 나이 68세였다. 이황은 도산서원을 마련하기 전까지 이곳에 집을 지어 ‘청량정사’라는 이름을 짓고 학문을 닦으며 후학들을 가르쳤다.
고려의 공민왕이 노국대장공주와 함께 10만의 홍건적 난을 피해 왔던 곳이 이 산이었고, 신라의 최치원과 김생이 수도했던 곳도 바로 이 산이었다.
그런 연유를 알았던지 주세붕은 이곳 청량산에 다음과 같은 글을 헌사 하였다.
“이 산은 둘레가 백 리에 불과하지만 산봉우리가 첩첩이 쌓였고 절벽이 층을 이루고 있어 수목과 안개가 서로 어울려 마치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또 산봉우리들을 보고 있으면 나약한 자가 힘이 생기고, 폭포수의 요란한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약한 자가 힘이 생기고, 폭포수의 요란한 소리를 듣고 있으면 욕심 많은 자도 청렴해질 것 같다. 총명수를 마시고 만월암에 누워 있으면 비록 하찮은 선비라도 신선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산과 산 사이를 낙동강은 흐르고 녹음 무성한 산을 벗 삼아 걷다가 보면 바람결에 퇴계의 목소리가 들릴지 모른다. “여보게,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나. 조금 쉬었다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