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 자락길

2014. 11. 27. 22:24참고

한겨레][매거진 esc] 여행===이병학기자


경북 영주 소백산 남동쪽 숲길과 순흥 일대 문화유산 탐방…소수사원 등 볼거리 풍성

"숲길 산책하기 좋은 때를 가리자면 사실 요즘만큼 좋은 때도 없어요."

초겨울 산길. 빛깔(단풍)도 형체(숲)도 없이 뼈대만 남은 숲길 안에서 '소백산 자락길' 안내자 배용호(소백산자락길 위원장)씨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드는 시기를 숲길 걷기에 좋은 때로 보는 이유는 간단하다. 한적하다는 것과 쾌적하다는 것. 단풍철 지나 탐방객 발길이 뜸하니 쓸쓸하고도 기분 좋고, 맑은 공기 쐬며 걸으니 심신이 편안해진다는 말씀이다. 비울 것 다 비우고 버릴 것 다 버려서, 화려할 것도 초라할 것도, 놀라울 것도 심심할 것도 없는 담담한 산길이다. 떨어져 구르고 쌓이는 마른 잎들 발길에 채고 부서지는 소리 요란한 오솔길이다. 맨몸에 빈손으로 돌아와 선 나무들이, 골짜기 깊숙이 파고든 햇볕 아래 속속들이 드러난다. 경북 영주, 소백산 남동쪽 산자락을 따라 이어진, '소백산자락길'의 차고 맑고 고요한 산길을 걸으며, 낙엽 더미에 묻히고 또 드러난 옛이야기들을 뒤적이는 맛이 청량했다.

옛길·마을길 이어 만든 143㎞ 소백산자락길

소백산자락길은 소백산(1439.5m) 둘레에 접한 영주·단양·영월(일부 구간)·봉화(일부 구간) 지역의 옛길·마을길을 찾아 이어 산자락에 조성한 143㎞ 길이의 생태·문화 탐방로다. 12구간(자락)으로 나뉜다. "고문헌을 뒤지고 어르신들 말씀을 참조해 옛길을 찾아 이었다"고 한다. 숲길 경치 빼어나고 역사·문화유산이 풍부한 탐방로로, '2011년 한국관광의 별'(문화체육관광부·한국관광공사 주관)로 선정된 곳이기도 하다. 오솔길에 쌓인 낙엽 두툼하고, 이야깃거리도 두툼하다는 제12자락길(좌석리~배점리 8㎞, 3시간 소요)을 걸으며 초겨울 숲길의 정취를 만끽했다.

커다란 바위가 굴러 내려와 마을에 자리잡은 데서 유래했다는 좌석리(좌석2교)에서 자작재로 오르는 길은 내내 짙은 물소리와 함께하는 산길이다. 내성천 상류인 사천의 한 지류 물길이다. 마지막 이파리까지 버린 나무들이, 푹신한 낙엽길에 저마다 긴 그림자들을 드리웠다. 자작재(자재기고개)는 자작나무가 많았던 데서 유래했다. 이 길은 세조의 왕위 찬탈로, 영월 청령포로 유배된 단종과 순흥으로 유배된 금성대군(세조의 동생이자 단종의 숙부)의 한이 서린 길이기도 하다. 배씨는 "순흥에 유배된 금성대군이 순흥부사와 단종 복위를 꾀할 때 밀사들이 오가던 길"이라며 "청령포까지는 순흥에서 저녁 먹고 출발하면 새벽에 돌아올 수 있는 거리"라고 말했다.

자작재 넘어 두레골(두여골·두내골)로 내려가면 장안사가 나온다. 절 못미처 길가에 작은 컨테이너박스가 있다. 탐방객들이 필요한 물과 과일, 간식 등을 진열해 놓고 사람 없이 운영하는 무인가게다. 사과를 하나 사들고 깨무니 갈증이 씻은 듯이 사라진다.

장안사는 최근 지은 절로 특별한 게 없지만, 두레골 밑으로 잠시 내려가면 흥미로운 볼거리가 나타난다. 작은 물길을 건너면 금성대군 신위를 모신 두레골서낭당(금성대군당)과 산신각이 마른 나무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금성대군은 순흥부사 이보흠과 단종 복위를 꾀하다 거사 전 발각돼 사약을 받고, 순흥도호부는 폐부된다. 배씨는 "순흥의 모든 양반가는 몰살되고 집들도 불태워지고 파괴됐다"며 "백성들도 안동·풍기·단양 등으로 흩어져 순흥은 폐허가 돼버렸다"고 설명했다. 당시 희생자들의 피가 죽계천을 타고 10㎞나 흘렀는데, 지금도 쓰이는 피끝이란 지명이 '피가 그친 곳'을 가리킨다고 한다.

조선중기 대장장이 배순
퇴계의 배려로
천민 출신임에도 서원서 글공부
배점마을 마을신으로 모셔져


두레골서낭당·배점마을 옛이야기들 흥미진진

순흥면민들은 해마다 정월 보름 새벽 수송아지를 제물로 바치며 이곳에서 제를 올린다. 정월 처음 열리는 장날에 흥정도 없이 제값 주고 장만한 수송아지는 제삿날까지 '양반님'으로 불리며 금성대군의 화신으로 대접받는다. 선정된 제관들은 매일 죽계천에서 얼음을 깨고 목욕하며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뒤 임한다고 한다. 서낭당 안에는 붉은빛을 띤 돌이 하나 모셔져 있다. "죽계천에서 발견된 혈석(피가 묻은 바위)"이다.

다시 장안사를 지나 점마(옛날 무쇠솥을 만들던 쇠점이 있던 곳)마을을 향해 완만한 산길을 오른다. 여전히 짙은 물소리와 함께하는 숲길이다. 굽이굽이 이어진 오솔길엔 두툼한 가랑잎 더미와 곱게 깔린 낙엽송 솔잎 더미들이 번갈아 나타나 발길을 편안하게 해준다. 낙엽송 우거진 곳은 옛 주민들의 집터나 경작지다. 주민들이 떠난 뒤 그 자리에 낙엽송이나 잣나무들을 심었기 때문이다. 길옆 경사면에 계단식 논들과 축대, 물을 대던 도랑 흔적들이 또렷이 남아 있다. 아담한 자연습지 거쳐 고개 넘어 내려가면, 자두밭이 나타나고 빽빽하게 우거진 잣나무숲 거쳐 점마 마을길로 내려서면 사과밭이 이어진다. 여기서 배점마을까지는 포장된 마을길 구간이다.

배점은, 배씨의 쇠점(대장간)이 있던 곳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 마을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온다. 조선 중기 이 마을에 배순이란 젊은 대장장이가 살았다. 천민인데도 혼자 땅바닥에 글씨를 쓰며 글을 익혔는데, 풍기군수로 있던 퇴계 이황이 소수서원으로 강론하러 올 때 이를 보고는 "배우는 데 귀천이 따로 없다"며 유생들과 함께 글을 배우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배순은 퇴계가 세상을 뜨자, 철로 퇴계상을 만들어 모시고 삼년상을 치르며 스승에 대한 예를 다했고, 선조 국상 때도 삼년상을 치렀다고 한다. 광해군 때 정려(충신·효자·열녀에 대한 표창)를 받았다. 이 마을에선 배순을 마을신으로 모신다. 해마다 정월 보름 주민들이 모여 삼괴정 정려각에 제를 올리는데, "천민 출신을 신으로 받드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고 한다.

배점마을은 12자락이 끝나는 구간이자 1자락이 시작되는 구간이기도 하다. 1자락 길은 죽계 계곡 물길을 따라 올라 초암사와 달밭골 거쳐 비로사로 이어진다. 초암사까지 죽계구곡 물길을 따라 거닐어 보는 것도 좋겠다. 죽계천 상류 골짜기로, 고려 때 안축이 지은 경기체가 '죽계별곡'의 배경이 된 곳이다. 뒤에 퇴계가 이곳 경치에 반해 아홉 곳에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온다. 소백산은 국립공원이어서 아무 산길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 소백산자락길도 통행이 허가된 곳은 길 좌우 20m까지이다.

역사·문화 유적 즐비한 풍기읍~부석면 지방도

풍기읍에서 부석사 쪽으로 이어지는 931번 지방도는 보고 느낄거리 풍성한 역사·문화 탐방로다. 삼국시대 고구려의 벽화고분(순흥 읍내리 벽화고분)에서부터 첫 사액서원인 소수서원, 금성대군과 순절의사들에게 제를 올리는 신당, 영주 지역의 전통가옥들을 재현해 놓은 선비촌, 천년고찰 부석사 등 아름다운 고찰들까지 약 25㎞ 길이의 도로에 보석 같은 볼거리들이 곶감처럼 한 줄로 꿰여 있다.

조선 중기 풍기군수를 지낸 주세붕이 세운 소수서원(옛 백운동서원)과 선비촌, 소수박물관은 한 지역에서 한꺼번에 둘러볼 수 있어, 한나절쯤 시간을 내 둘러볼 만하다. 소수서원은 거대한 은행나무들과 울창한 소나무숲, 깨끗한 물길 등이 강학당·사당 등과 어우러진 경관이 눈부시다. 한옥체험마을로 이름난 선비촌도 '한국관광의 별'로 선정된 바 있다. 배점마을 거쳐 들어가는 아담한 절 성혈사는 아름다운 문창살로 유명한 곳이다. 나한전 문을 장식한 게·학·동자·연꽃 등 문살의 나무 조각상들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다.

내성천 하류의 물돌이마을 무섬마을(수도리)은 350년 역사의 전통마을이다. 반남 박씨와 선성 김씨 집성촌이다. 주민들이 마을 앞 내성천 물길에 해마다 놓는 외나무다리 풍경이 아름답다. 이 마을엔 최근 대형 한옥체험관도 문을 열어 탐방객들을 맞고 있다.

영주/글·사진 이병학 선임기자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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