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

2015. 2. 2. 20:51참고

봄꽃 피는 섬진강과 지리산 자락을 거닐다. ---------신정일

봄꽃 피는 섬진강과 지리산 자락을 거닐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을미년 삼월, 봄꽃이 흐드러진 섬진강과 지리산 자락을 걷습니다. ‘꽃잎 하나 날려도 봄이 가는데,’ 라는 두보의 시를 읊조리며 지리산 자락의 매천사, 쌍선재, 운조루, 국사암에서 쌍계사로 가는 길과 섬진강 따라 펼쳐진 아름다운 길을 걷게 될 이번 답사에 참여바랍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흐르고 흘러온 섬진강이 요천, 보성강 물길을 받아들인 뒤에 구례 지나서 지리산을 만난다. 그렇다 오르고 올라가기만 하는 산은 강을 그리워한다. 그 말이 맞을 듯 싶다. 모든 냇물 모든 지류를 끌어 모은 섬진강 물이 곡 읍에서 산을 뚫고 단숨에 찾아와 지리산을 만나 흐드러지게 끌어안고 춤추고 노래할 수 있으련만 섬진강은 곡성, 압록, 유곡, 구례구를 지나며 더 많은 받아들임을 경험한 뒤에야 이곳 구례에서 지리산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백제 때 구차례현(仇次禮縣)으로 불리다가 신라 때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진 구례에는 지리산녀(智異山女) 전설이 전해온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매우 아름다운 여자가 지리산 자락에 살았는데, 집은 가난했지만 아녀자의 역할을 다하였다. 그 소문을 들은 백제의 왕이 그 여자를 궁으로 데려가려 했으나 여자는 죽음을 맹세하면서 따라가지를 않았다고 한다.

김극기의 시에 봉이 하늘 끝에서 춤추니 산은 옹기종기하고 땅에 뱀이 서린 듯 물이 망망해라하였고, “늦은 비 소소하여 문득 서늘함을 보내니, 시내 빛 산 빛, 점점 아득하여 가네. 강남의 좋은 경치 참으로 그림 그릴만한데, 푸른 벼 붉은 연꽃 10 리에 향기로워라.” 고 하였던 구례는 멀리서 보면 한폭 의 그림이다.

강가에는 버들강아지가 소담하게 피어있고 그 너머로 지리산의 연봉이 끝없이 펼쳐진다.

(...)

고개 돌려서 보면 노고단 아래로 천은사가 있고 바로 그 아랫녘에 광의면 월곡리에 한 말에 유학자이자 저술가였던 매천 황현 선생의 흔적이 남아있다.

삼월이나 사월 초 구례군 산동에 접어들면 구례 냄새가 절로 난다. 밭 가장자리나 담벼락에 피어있는 산수유 꽃, 정말로 구례의 봄은 산수유 꽃 때문에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월곡마을 이 곳이 한말(韓末)의 이름난 시인이었고 절개 높은 선비였던 매천 황현 선생이 살다가 간 곳이다.

이곳에서 매천 황현은 동학농민혁명을 처음에서 끝까지 자세하게 기록한오하기문을 남겼다. 그 서두는 이렇다.

아아! 화변(禍變)이 온다는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는가?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것은 운수가 있고 일이 막히거나 태평스러운 것도 때로는 서로 뒤바뀐다. 이것은 시운(時運)이나 기화(氣化)가 한결 같이 정해진 것이어서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또한 사람들 일의 잘잘못에 기인하기도 하는 것이니, 대개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형태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요 하루 아침이나 하루 저녁에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매천 황현은 18551211일 전라남도 광양군 봉장면 서석촌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는 신라 때 시중 벼슬을 지냈던 원이었고 세종 때 영의정을 지냈던 장수사람 황희정승과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을 지키다가 전사한 황진이 그의 선대 조상이었다. 몰락한 시골 선비 황시묵과 풍천 노시의 23녀 중 장님으로 태어난 그는 출생 당시부터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7살에 입학하여 시를 읽기 시작하였고 11살에 황현은 무리지어 날아가는 기러기를 바라보며 한시를 지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날아가는 기러기가 우짖는 소리는 어디든지 다 같게 퍼질지라도

또한 일에 열중하는 사람들은 듣기가 어려우니

한가하게 노는 사람들은 그 소리를 먼저 들을 수 있다(...)

오미리 마을이 풍수지리상으로 보면 노고단의 옥녀가 형제봉에서 놀다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형상이라고 한다. 그 곳을 찾아 집을 지으면 자손 대대로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 몇 백 년 전부터 전해져 내려 왔다. 그래서 이 곳이 남한의 삼대길지( 三大吉地)로 알려져 온 것이다.

이곳에 삼수부사를 지냈던 안동 사람 유이주가 운조루라는 아흔 아홉 칸 집을 지었다. 운조루(雲鳥樓)라고 불리는 중요민속자료 8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 집은 현재 조선의 풍수를 지은 무라야마 지준의 글에도 소개될 만큼 조선에서 널리 알려진 명당이다.

운조루 입구에 있는 안내 표지판에 따르면 하늘에서 떨어진 금가락지인 금환낙지(金環落地)의 형국을 이루고 있다고 되어있다. 또한 구전에 의하면 위쪽에는 금구몰니(金龜沒泥), 중간지대에는 금환낙지(金環落地), 아래 지역에는 오보교취(五寶交聚)의 세 개의 명당이 있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즉 금구몰니는 운조루가 이미 명당을 차지했지만 금환낙지와 오보교취의 명당을 찾기 위해 몰려들었다고 한다. 조선총독부가 호구조사를 실시한 통계에 의하면 191870호에 350명이었던 인구가 불과 4년 후에는 148호에 744명으로 불어났다고 한다.

금환낙지 형국이라면 문자 그대로 주변의 지세가 원형의 금반지 모양으로 되어 있어야 되는데 운조루에서 주위를 아무리 둘러보고 찾아보아도 금반지 모양의 산세는 찾아 볼 수 없다.

운조루는 1,400평의 대지에 건평 273평인 99(현재는 70여칸)이 되는 저택으로 문중 문서에 따르면 한 때는 883마지기의 농토가 있었고 조선 후기만 해도 농사를 짓기 위해 한 해에 24백여 명의 노동력이 조달되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러나 지금은 과거의 위세는 찾아볼 수 없고 집 관리가 제대로 안 되고 있다.

그 뒤를 따라서 이 마을 일대에 집을 지었던 사람이 몇 십명에 이르렀으며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이 될 무렵에는 300여채가 들어섰었다고 한다. 지금 남아있는 것은 천 사백 여평의 대지에 세워진 운조루(주인이 거처하였던 곳)와 손님을 맞았던 귀래정이 중요민속자료 8호로 지정되어 있고, 그 아랫마을 환동에 금가락지 같은 형국으로 높은 담벼락을 두른 채 대숲에 쌓여 있는 기와집(박부잣집) 한 채가 남아 있을 뿐이다. 이곳 구례 역시 동학농민혁명 당시 수많은 농민군들이 활동하였는데 운조루의 주인 유제양이 기록한 <구례유씨가의 생활일기>에 동학교인들이 부적을 차고 주문을 외웠으며, 신분의 고하를 가리지 않고 행동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농민군들은 스스로 접장(接長)이나 포사(砲士)라고 부르면서 군수물자를 조달하러 다녔으며 특히, 농민군은 말과 철환, , 화약 등을 징발하였는데, 구례의 경우에는 주로 남원의 농민군이 들어와 군수물자를 징발한 것으로 보인다.

구례지역 농민군의 활동은 일부 양반계층의 호응을 얻기도 하였다. 구례현감을 지낸 남궁표와 조규하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남궁표는 구례 접주 임전연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구례 주민들에게 입도를 권유하여 많은 사람들을 교인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특히, 그가 <동경대전>을 열심히 읽었다는 점으로 보아 진실로 동학의 사상을 매우 높이 평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규하는 현감으로 재직할 때부터 농민군들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는 다른 지방의 농민군일지라도 맞이하고 전송하는 일에 정성을 다했다. 더욱이 그는 임실 성수산의 상이암에서 김개남을 만나 자기 사촌의 아들을 그에게 딸려 보냈다. 또한 자신도 동학에 입도하여 김개남과는 서로 접장이라고 불렀다. 김개남도 조규하에게 편지를 보낼 때에는 자신을 낮추고 접이라고 지칭하였다. 이처럼 양반신분에 속하는 사람들도 동학에 들어간 경우가 많았는데, 유달리 구례 지역에서 두드러진 경우였다.

조선의 풍수를 지은 일본의 풍수지리학자 무라야마 지준이 이 꽃이 떨어지게 되면 모든 사람이 애석하게 되니 이 땅은 모든 사람에게 애석함을 주는 인물을 낼 것이다라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이 집의 내막은 비극적이다.

지금 운조루를 지키는 사람이 이시영 시인의 누님의 아들인데 그의 큰 아버지였던 유종택씨는 사회주의자였으며 일본 유학을 마쳤던 인텔리였다. 그는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당시 지리산으로 숨어들어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이 땅의 아픈 역사가 스쳐간 곳이 어디 그 집뿐이겠는가.

(...)

산수유 꽃 우거진 동산 너머로 지리산은 옅은 문루에 쌓여있고 파밭은 싱싱하다. 어린 시절 저 푸르고 푸른 파를 쏭쏭 썰어 넢은 파 간장에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비녀 먹으면 얼마나 맛있었던가. 생각하는 사이에 침이 꼴깍 넘어가고 그 앞으로 할머니 한 분이 갈퀴 나무를 해서 가지고 간다. 옛날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큰 마대포대에 솔잎을 가득 쟁여지고 가는 것이 다를 뿐이다. 갈퀴도 옛날 그대로인 할머니 모습도 저녁 무렵 돌아오던 우리 할머니의 모습 그대로다. 흐르는 섬진강 너머로 멀리 간전교가 보이고 뒤돌아보면 오봉산이 한 폭의 그림과 같다. 제방둑을 지나며 바라본 강변 너머 산동면 위안리에서 발원한 서시천(西施川)28km의 여정을 마치고 합류한다. 전설에 의하면 진나라 시황제의 사신으로 불로초를 캐러왔던 서시가 동남동녀 2백 명을 데리고 이곳을 지나갔다고 한다. 푸르른 풀들이 돋아나고 간전면 간문교 아래로 간전천이 흐르는데 아무래도 저곳에서는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간문천은 물이 얕아 그냥 돌을 딛고 건너갈 수가 있다. 간문교 다리 아래에 정박해 있는 돗단배에는 쓰레기들이 배 전체를 덮고 있다. 다시 다리를 건너 토지면에 접어들었다. 일반 국도19번 길섶에는 노오란 산수유 꽃이 피어있고 산불조심’, ‘산불조심깃발이 바람에 펄럭인다.

(...)

전라도와......”라고 조영남이가 노래 부르기 전부터 화개는 화개장터다. 소설 속에서 옛 시절의 화개 장터는 이러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전라도와 경상도 사람이 만나던 화개장터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길이 고래로 허다하지만 화개협 시오리를 끼고 앉은 화개장터의 이름이 높았고 경상, 전라 양도 접경이 한두 군데 일리 없지만 또한 이 화개장터를 두고 있었다. 장날이면 지리산 화전민들의 더덕, 도라지, 두릅, 고사리들이 화개골에서 내려오고 전라도 황화물 장사들의 실, 바늘, 면경, 가위, 허리끈, 족집게, 골백분들이 또한 아랫길에서 넘어오고, 하동길에서는 섬진강 하류 해물 장사들의 김, 미역, 청각, 명태, 간조기, 간고등어들이 들어오곤 하여... 그러나 화개장터의 이름은 장으로 하여서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끔 전라도지방에서 꾸며 나오는 남사당, 여사당, 협률(協律), 창극, 신파, 광대들이 마지막 연습 겸 첫 공연으로 여기서 반드시 재주와 신명을 떨고서야 경상도로 넘어간다는 한갓 관습과 준례가 이 화개장터의 이름을 높이고 그립게 하는지도 몰랐다.”

(김동리 <역마(驛馬)>)

<!--[if !supportEmptyParas]--> <!--[endif]-->

화개를 가장 화개답게 표현한 김동리의 역마가 아니라도 화개는 옛 시절 전라도와 경상도의 물산이 만나 흥정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장터였다. 그러나 지금 그 옛날 화려했던 화개장터의 옛 모습은 어디에도 없이 다리 건너에 새로 만들어진 초가집도 아니고 콘크리트 집도 아닌 화개장터가 지나는 길손들을 손짓할 뿐이다.

월선네가 주막을 열었던 그곳은 어디쯤일까. 그 월선네가 장이 서는 아침마다 용이를 기다렸던 화개장터는 어디로 가버렸는가. 매천은 <오하기문>에서 화개동을 스쳐간 동학농민혁명을 이렇게 적고 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적은 어둠 때문에 추격하지 못하였으며, 날이 밝자 무리를 수습하여 부 안으로 들어와 민포를 모두 죽이겠다고 떠들면서 10여 채의 민가에 불을 지르고, 부 안에다 도소를 설치하였다. 한편 적은 사방으로 흩어져 마을을 약탈하였다. 화개동에 들어가서는 제일 먼저 민포가 일어난 곳이라며 특별히 미워하여 연달아 5백여 채의 민가를 불태우고, 베틀과 물레, 나막신까지 약탈하여 바리바리 실어 나르느라 사오일 간 광양, 순천으로 통하는 길이 막힐 정도 였다. 민포 중에 앞뒤로 사로 잡혀 죽은 사람은 10여명 정도였다. 적은 계속해서 대엿새 정도 머물다가 돌아갔고 그 중에 흉포한 자들은 인배를 따라 진주로 갔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불태워 버렸다는 오백여 채의 민가는 어느 곳에 있었을까. 옛 기억들을 회상할 길은 없고 푸른 대숲과 차나무와 푸른 섬진강물만 눈에 띄었다.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흥덕왕 때에 당나라에서 가져온 차를 처음 심은 곳이 지리산 기슭 화개동이었다고 한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런 연유로 이곳 화개 연근에는 산자락마다 차나무가 푸르게 펼쳐져 있다. 가탄마을 동남쪽에는 선비가 춤을 추는 형국이라는 무산봉이 있고 가탄마을 북쪽에는 위장병과 피부병에 특효라는 화개약수장이 있다.

초하루 엿새 장이 섰던 화개장터는 서너 칸만 남아있을 뿐이고 강 건너로 가기 위해 줄 배를 탔던 목넘이나루는 한적하다.

쌍계사 4km 화개천의 물길은 맑디맑고 그 물길을 올라가면 화개 골짜기에 이극다. 조선 인조 5(1632)에 나온 진양지 불우조에는 화개면 일대의 암자와 절이 53개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동국여지승람> ‘진주목산천조에는 시내를 따라 의신 신흥 쌍계의 세절이 있고 의신사에서 서쪽으로 꺾여 20리 지점에 칠불사가 있다. 쌍계사에서 동쪽으로 재 하나를 넘으면 불일암이 있고 그 나머지 이름난 사찰은 이루다 기록할 수 없다. 아주 산꼭대기에 있는 향적사 등 몇절은 모두 나무 판자로 덮었고 거주하는 중이 없다. 오직 영신사는 기와를 사용했으나 거주하는 중은 한 두 사람에 불과하니 산세가 아주 험준하여 사람 사는 마을과 서로 닿지 않았으므로 높은 선사가 아니면 안주하는 자가 드문 것이다. 물 근원은 영신사 작은 샘물로부터 이 신흥사 앞에 와서는 벌써 큰 냇물이 되어 섬진강에 흘러드는데 여기를 화개동천이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많았던 절들과 스님들이 현재에는 쌍계사와 칠불암을 비롯한 몇몇 절들만 남아있을 뿐이고 화개장터에서 쌍계사에 이르는 십리 벛꽃 길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까지는 시오리가 좋은 길이라 해도 굽이굽이 벌어진 물과 돌과 장려한 풍경은 언제보아도 길 멀미를 내지 않게 하였다라고 소설가 김동리가 그의 단편 소설 <역마>에서 표현한 것처럼 꽃피는 봄날 쌍계사 가는 길은 그윽하고 화사하기 이를 데 없다.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에 위치한 쌍계사는 신라 성덕왕 23(724) 의상의 제자 삼법이 창건하였다. 삼법은 당나라에서 육조 혜능이 정상을 모셔 삼신산(금강산, 한라산, 지리산을 일컬음) 눈 쌓인 계곡 위 꽃피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을 꾸고 귀국하여 현재 쌍계사 자리에 이르러 혜능의 머리를 묻고 절 이름을 옥천사라 하였다.“

신정일의 기행산문집<섬진강> 중에서

'참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자령과 대관령  (0) 2015.05.19
지리산  (0) 2015.05.18
내장산  (0) 2014.12.23
덕유산  (0) 2014.12.03
서울 둘레길  (0) 2014.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