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장산

2014. 12. 23. 12:00참고

정읍 내장산의 겨울 속으로 들어가다.

정읍 내장산의 겨울 속으로 들어가다.-----사단법인 우리땅걷기 신정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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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을미년 1월 두 번째 토요일인 10에 정읍의 내장산을 갑니다. 보길도와 노화도를 대체해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겨울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내장산의 아름다운 산길을 올라, 서래봉을 거쳐 내장사로 하산하는 길을 걸을 예정이오니 참여바랍니다.

내장산과 정읍사의 고장

구름 걸린 산봉우리가 절벽처럼 서 있어 골짜기 기운을 벗어나 있다. 맑은 물줄기가 거듭 둘러서 들녘 경치가 펼쳐져 있다. 연기 낀 대나무가 언덕에 거꾸러져 있으며, 연꽃 향기가 서로 이어져 있다. 서리 맞은 감나무가 골짜기에 늘어서 있고, 붉은 단풍이 서로 비춘다.” <여지도서>에 실린 정읍의 형승이다.

가을 단풍이 아름다워서 가을마다 수많은 인파로 넘쳐나는 정읍 내장산의 단풍이 그때도 아름다웠던 것을 나타낸 듯한 정읍을 내는 조선 성종 때의 문신인 성임(成任)은 그가 지은 정혜루기(定慧樓記)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호남에 이름난 산이 많은데, 남원에는 지리산, 영암에는 월출산, 장흥에는 천관산, 부안에는 능가산이 있는데, 정읍의 내장산도 그 중 하나이다. 방박(磅礴)하게 솟아 기세가 매우 위험하고 경계가 더욱 뻑뻑하니, 참으로 필부들이 선()에 들어가 도를 배울 좋은 땅이다. 산은 현과 겨우 20리 거리에 있다. 방박磅礡하게 높이 솟아 기세가 매우 험하고 경계가 더욱 빡빡하니, 참으로 필추(苾芻. 비구승)들이 선에 들어가 도를 배울 좋은 땅이다. 그 가운데 큰 사찰을 영은사라고 부르는데, 고려 말년에 지??/span>智嚴 스님이 처음 거처하였고, 본조에 와서 신암信庵스님이 능히 그 자취를 이었고 그 업적을 드날렸다. (하략) ”

그가 언급한 내장산은 호남의 금강산이라고 불릴 만큼 산세가 빼어나다. 신선봉서래봉장군봉영취봉문필봉 같은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는 산자락 아래에 용천이 있으며 내장산 까치봉의 먹뱀이골에서 호남평야를 적시는 동진강이 발원하여 부안군 동진면 노길리에서 51킬로미터의 여정을 마무리하며 바다로 흘러가는 동진강東津江<세종실록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동진은 부안현에 있는데, 태인과 정읍 두 현의 물이 김제 벽골碧骨의 물과 합하여 서쪽으로 흘러서 흥덕 동쪽에 으르러 고부 눌제訥堤의 물과 어울려 동진이 된다. 조수가 이르므로 다리를 놓아 행인을 다니게 하고, 만경현 서남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이곳 사람들이 정읍을 정읍사(井邑詞)’의 고장이라고 부르는데, <정읍사>에 얽힌 얘기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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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부석은 현의 북쪽 10리에 있다. 현의 사람이 장사하러 떠나서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니, 그 아내가 산 돌 위에 올라서 기다렸는데, 혹 그 남편이 밤에 다니다가 해침을 당하지 않았는가 걱정되어 진흙탕 물의 더러움을 의탁하여 노래를 지으니, 그 곡을 정읍사라 한다. 세상에 전하기를 산에 오르면 망부석에 발자취가 아직도 있다고 한다.”

이곳 정읍의 수송동에서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인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사약을 받은 것은 숙종 15년인 168968일이었다.

조선 선조40년에 태어난 송시열은 인조11년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였으며 나중에 봉림대군의 스승이 되었다. 그 인연으로 봉림대군이 임금으로 즉위한 1649년부터 그는 정국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효종에 이어 현종이 죽고 숙종이 왕위에 오른 후 향리에 은거해 있던 그는 장희빈이 낳은 왕자 훗날의 경종이다 에게 원자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689(숙종15)에 제주도에 유배 갔다가 돌아오던 송시열은 수성동의 은행나무 거리에서 죽음을 맞게 되었다. 숙종은 그의 죄악은 국문하지 않아도 여지없이 나타났으니 도사가 약을 가지고 가다가 그를 만나는 대로 사사하라는 영을 내렸던 것이다. 송시열이 국문을 받으러 올라오던 중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을 받을 때 거적 한 장만이 깔려 있었다. 그의 제자인 권상하權尙夏에게 말하기를 ,“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본받아야 하고, 사업은 효종孝宗 임금께서 남기신 뜻을 따라야 한다. ‘원통하고 억울한 마음을 참고 억누르려 해도 절박한 심정 어쩔 수 없구나.(忍痛含寃追不得巳) 이 여덞 글자를 전해주어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옳을 것이다. 주자께서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곧을 직이라는 한 글자를 일러 주셨으니, 내 말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 무렵 송시열은 음식을 입에 대지 않은지 여러 날이었다. 기운이 점점 사그라지는데도 스스로를 가다듬고 있는 송시열에게 약을 들라고 여러 차례 재촉하자 숨이 끊어져 버려 명령을 받지 못할까 두렵구나.” 하였다. 마지막으로 제자들이 자리가 추하니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하자 송시열은 우리 선인(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실 때 이만한 자리도 못 까셨네하고 거절한 뒤 사약을 마셨다. 그의 나이 83세였다.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전라도 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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