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5. 13. 23:20ㆍ백두대간
일시-2015년5월12일 화요일 비 그치고 바람붐
장소-백두대간 두타산 구간 북진
코스-댓재(810m)-햇대등-명주목이-1228봉-통골목이-통골재-1243봉-두타산(1353m)-박달령
-박달골-쌍폭-산성입구-무릉계곡-삼화사-무릉반석-관리 사무소
백두대간 8.6km+접속구간 6.1km=14.7k를 6시간 30분 걸림
백복령에서 댓재 구간은 설악산 덕유산 지리산 구간과 함께
실거리 29km가 넘는 4대 장거리 구간이란다
제대로 하려면 무박으로 백복령에서 댓재까지 한번에 가야 되는데
일행팀이 끊었던 백복령에서 박달령까지도 못 따라 가고만
지난번 산행과는 반대로 오늘은 북진하여 백두대간을 이어가는
코스이다
오르락 내리락 백두의 마루금을 이어가는 코스도 코스지만
접속구간인 긴 계곡길로 내려오는 내리막이 더 힘들었던
그 긴계곡길을 다시 내려가야 한다는점만 빼고는
오늘 일정은 거리상으로 짧은 코스이고 어젯밤 푹 자고
이제 제법 새벽 바람 맞으며 집을 나서는 일도 익숙해져
몸과 맘도 가쁜하고 컨디션도 좋아 열심히 따라 가기로 했다
어제밤에 이어 오늘 아침까지 비 내린다는 일기예보와는 달리
차창가에 때린 빗방울은 댓재에 도착하니 언제 그랬나 싶게
맑고 청명한 하늘이다.
계절의 여왕답게 맑은 공기와 아카시아꽃 향기가
코끝에 전해진다
댓재에 풀어놓은 일행과 같이 등산화끈을 조이고 스틱을 길게 잡아빼어 차비를 하고
하산길은 꼴찌를 하더라도 시작은 함께여서 오늘은 기분좋게
단체 사진도 찍고 댓재의 산신각을 벗어나 백두의 품에 들어섰다
산신각은 산신을 모시는 전각으로 국토의 대부분 산지인
우리는 옛부터 산신을 모셔왔다
불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우리 고유의 신앙이었으나
불교가 우리나라에 들어 오면서 산신은 부처님을 지키는 호법신중이 되어
불교에 수용되었다
산신각이 세워진것은 조선 중기 이후부터로 대개는 사찰 뒤쪽에 세우며
산신각내에는 신신을 모신 탱화를 모신다
보통은 흰수염을 기른 노인으로 표현되나 한라산 속리산 지리산 계룡산에는
드물게 여자 산신을 모시는 경우도 있다
댓재 산신각은 이곳을 알리는 커다란 지도판이 걸린 뒤쪽에 외롭게
다소 의시시하게 모셔져 있다.
810m의 댓재에서 철쭉꽃이 피어있는 산길로 쉬엄쉬엄 오르니
금방 햇대등이라는 푯말이 나온다
두타산까지는 이제 초입이나 다름 없는데
백두대간길인 명주목이 가는길이 아닌 길로 들어섰다
빨리 빠져나왔으니 망정이지 하마트면 또 알바를 할뻔했다
나뭇가지에 울긋불긋 달린 깃발을 따라 명주목이를 지나서
1228m봉까지 오른다
오르고 내리고 내려간 만큼 올라가야 하는 산길따라
봄의 기운이 물씬 풍긴다.
시작과 함께 가볍다고 느낀 몸은 발걸음도 가벼워 통골목이
통골재를 넘었다.
그동안 앞사람 뒤꽁무니만 정신없이 쫓아가느라 걸어온길을
뒤돌아 볼겨를도 없이 걸었던 지난 산행보다는 다소 여유로움이 느껴져
고개 들어보니 하늘은 파랗고 물결처럼 펼쳐진 능선이 비로소 보인다.
산행 시작 얼마 안돼 벌써 점심때가 되었다.
평평한 양지 바른곳에서 점심식사를 하는 일행을 만나
가져온 주먹밥을 꺼내 먹었다.
번거롭고 짐이 많은 닭죽대신 닭가슴살을 저며 짭짤하게 양념한후
볶아 만든 주먹밥이다
먹기 편하고 무엇보다 간편해서 좋다.
처음본 일행들 반찬은 진수 성찬이다
김치 국물로 버무린 김밥에 유부초밥 과일 떡 나물 반찬
샌드위치에 잼까지 가져와 발라먹는 여유라니
산행준비 할랴 음식 준비할랴 곱게 단장한 얼굴까지
새벽이 얼마나 바빴을지 짐작이 간다.
그녀들중 한명은 인수봉 다람쥐라 하는걸보니 바위좀 타다 왔고
누구는 취미삼아 이렇게 따라 다닌다는데
한두번 해본 솜씨는 아닌듯 싶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이제 겨우 백두대간에 입문해놓고
하다만꼴이 아니길 바래 먹던 주먹밥도 걸으면서 먹어도
그녀들 따라잡기는 어려워 보였다.
이쁘게 깍아온 그녀들의 후식을 거절한채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1243봉 오름에는 정돈 안된 바위들이 놓인 너덜길이 나오는데
이는 산성의 흔적이란다
두타산성은
무릉계곡의 학소대를 지나 철다리를 건너 두타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있는 석성이다
신라때부터 처음 쌓았다고 전해지며 조선 태종 14년(1414) 삼척부사였던 김맹손이
험한 지세를 이용하여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임진왜란때는 왜적이 백두대간으로 넘어 강릉을 거쳐 이곳으로 쳐들어와
바닷가에 살던사람들은 두타산성으로 피난하고 의병을 조직하였다
의병장 최원흘을 중심으로 왜적을 점멸시킨 씨움터이다
키큰 전나무와 이름모믈 나무 아래 핀 철쭉꽃 사이를 걸어
백여미터를 올라 두타산 정상을 밟았다.
두타산(1353m)는
삼척과 동해의 분수령으로 서북으로 뻗은 백두대간 분수령과
동북으로 두타산성과 쉰움산(688m)을 거쳐 동해로 이어지는
두개의 산줄기로 나뉘어진다.
두타라 함은 인간사의 모든 번뇌를 털어 없애고 물질을 탐착하지 않는
맑고 깨끗한 불도를 수행하는 것으로 산 어귀의 삼화사와 천은사의 모산으로
자리잡고 있다
두타산 정상은 넓은 공터로 헬기장이 있다
오래된 무덤 하나가 있다는데 무심코 지나쳐 버렸다.
비온뒤 오월의 맑은 하늘이 눈부시게 청명하고
능선따라 불어오는 봄 바람이 날아갈듯 시원하다.
두타산에서 걷기 쉬운길로 2.2km걸으면 작은 돌탑 두개가 있는
박달령이 나온다
박달령 우측으로 난 무릉계곡으로 내려가기만 하면 오늘 일정이 끝이 나는데
오르막보다 더 어려운 내리막이 기다리고 있다
박달골로 내려오는 코스는 가파르다.
정리되지 않은 돌덩이와 잔돌들로 여차하면 미끌어지기 쉬어
스틱을 잡은 손과 두 다리에 힘을 주고 내려와야만 한다.
내리막에서 엉금엉금 거리느라 실갱이를 하는동안
산속 성찬을 벌였던 그녀들은 어느사이 내앞을 가로질러 앞장 서고
나는 또 꼴찌그룹 선두를 유지한채 걷고 있다.
연칠성령으로 내려오는도중 얼떨결에 하늘문을 올라서서 절벽위에서 떨면서
돌아 내려왔던 지난번 산행처럼 실수하지 않으려고
긴장을 하여 안내된 지도대로 쌍폭까지 무사히 걸어왔다.
두개의 거센 물길이 하나의 바위 아래로 떨어지는게 장관이다.
폭포아래로 떨어지는 시원한 물줄기를 바라다보니
흘렸던 등짝의 땀이 식고 돗자리깔고 누우면 신선이 따로없겠다 싶지만
정해진 시간안에 가려면 발길을 재촉하여야 한다.
산악회따라 산행하는것은 저렴한 가격에 산입구까지 대려다 주고
산에서 내려오면 서울까지 편안히 대려다 주는 편리함이 있지만
정해진 시간때문에 게으름피울 시간이 없다는게 흠이다
깍아지른 절벽아래 떨어지는 폭포수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뒤
넓고 높은 바위와 바위 사이로 쉴새없이 흘러내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선녀탕과 병풍바위와 학소대를 지나 무릉계곡을 내려왔다
무릉정공 최윤상의 무릉구곡가
'맑고 시원한 곳에 내 배를 띄우니
학 떠난지 이미 오래 되어 대는 비었네
높은데 올라 세상사 바라보니
가버린자 이와 같아 슬픔 견디나니.'
상류의 동굴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이곳을 지나는데
이바위에 학이 둥지를 틀고 살았다 하여 학소대라 한단다
학이 살았다는 바위에는 두마리의 가짜 학이 앉아 있었다.
무릉계곡은
국민 관광지 제1호로 지정된 이곳은 두타산과 청옥산을 배경으로
형성된 계곡으로 호암소로부터 시작하여 무릉 반석 학소대를 거쳐
약4km상류인 용추폭포가 있는곳까지를 말한다.
강원도 정선군 임계를 거쳐 서울로 오르내리던 조상들의 정취가 어려있는
이지방의 유일한 옛길이기도 하다
일명 무릉도원이라 불리는 이곳은 고려시대 동안거사 이승휴가 살면서
'제왕운기'를 저술하였고 조선 선조때 삼척부사 김효원이 이름지었다 한다
기암괴석과 사이로 위태위태 서 있는 천연림과 폭포수까지
아름다운 경치는 수많은 시인과 묵객들의 발길을 사로잡아
매월 김시습을 비롯하여 1500여편의 시가 무릉반석에 새겨져 있다
낙조
소복이 산마루에는 햇빛만 솟아오른듯이
솔들의 푸른빛이 잠자고 있다
골을 따라 산길로 더듬어 오르면
나와 더불어 벗할 친구도 없고
묵중히 서서 세월을 지키는 느티나무랑
운무도 서렸다 녹아진 바위의 아래위로
은은히 흔들며 새어오는 범종 소리
백석이 씻겨가는 시낼랑 뒤로 흘려보내고
고개넘어 낡은 단청 산문은 트였는데
천년묵은 기와장도 푸르른채 어둡나니.
이고장 최인희 시인의 시비를 읽고
신선이 앉아 놀았다는 무릉반석에 서다 앉다 누웠다
신선보다 더한 찰나를 즐겼으니 잊지 못할 반석일게다.
삼화사 일주문을 지나면 정자 하나가 나온다.
이는 대한제국 광무7년(1903) 당대 삼척지방의 유림재생들은
향교 면륜당에 모여 현학을 강마하고 예의를 존승하였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향교가 폐강되어 유생들이 울분을 달래기 위해
금란계라는 모임을 만들어 정각을 건립하고자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었다
그후 1947년 북평동 단봉 석경등에 정자를 건립하였다
현재의 금란정은 1958년 무릉계곡으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른다.
두타산을 뒤로하고 무릉계곡을 벗어나 무릉계곡 초입에 들어서면
넓은 반석위의 암각서에 적힌 커다란 글씨가 예사롭지 않다
신선이 놀던 무릉도원은 너른 암반과 샘이 솟는 바위 번뇌조차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리는 골짝이란 뜻을 지닌
"武陵仙院 中坮泉石 頭陀洞天(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이란글이 살아있는듯
힘이 느껴지는 글씨를 새겨져 있다
이는 조선전기 4대 명필가인 양사언이 쓴글이라는 설과
옥호자 정하연이 삼척부사 재직시 무릉계곡을 방문하여 썼다는 설이 있다
동해시에서 세월이 흐르면서 글씨가 마모되어 1995년 모형석각을 재작하였다
무릉계곡은 임진왜란시 격전지였던 두타산성과 함께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수많은 민초들의 목숨을 잃은 곳이기도 하다
두타산의 정기를 담고 있는 삼화사에 도착했다.
삼화사는 신라 선덕여왕때 자장율사가 두타산에 이르러 절을 짓고
흑련대라 불렀다 하며 흥덕왕4년(829)에 창건하였다 전해진다
864년 범일국사가 절을 다시 지어 삼공암이라 하였다
삼국을 하나로 화합시킨 영험한 절이라하여 고려 태조때
삼화사로 개칭하였단다
임진왜란과 일제 강점기에 소실되어 중건하기를 반복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무릉계곡의 주산인 청옥산과 두타산의 암릉으로 둘러싸인 협곡계곡을 두번이나
빠져나온 백두대간 이어가는 산행길이 고달펐으나
감히 신선이 살았다는 무릉도원 선계를 구경했으니
왼쪽 네번째 발가락이 검게 변하는 그정도 고생쯤 감수해야
세속의 모든 번뇌가 먼지처럼 사라져 버리지는 못할지언정
조금은 씻겨질것이다.
그나저나 연칠성령에서부터 임진왜란때 의병 불사의 충절을 청옥에 비유하고
또는 옥돌이 많이나서 얻은 이름인 청옥산을 거쳐 박달령까지 빼먹은 구간은
언제 이어갈지 근심걱정을 씻고 내려와서도 걱정이다.
무릉계곡
바람이 흔들어 놓은 나뭇잎
자라는 소리가 들리네.
수런수런 후르르룩
철쭉꽃이 피고 또 피어
높고 험준한 계곡길에
피어나네
새로운 삶으로 피어나
온 산을 덮네.
새 봄 기다린 폭포수는 흐르고 흐르는데
눈멀고 귀먹은 큰 바위는 그 자리에 서서
뿌연 기억만 그리워하네
무릉 도원 신선되어
봄 햇살 아래 물베게 베고 누우니
하늘 아래 신록의 능선이
꿈틀거리네
쩔쭉꽃이 지고 또 지어
무릉 반석에 꽃잎 하나
뚝 떨어지네
봄 바람이 흔들어 놓은 나뭇잎
자라는 소리가 들린다.
수런수런 후르르룩
2015년 5월중순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