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성곽

2016. 3. 10. 22:49참고

조선 오백년의 숨결이 깃든 서울 성곽을 걷는다. -------신정일

조선 오백년의 숨결이 깃든 서울 성곽을 걷는다.

 

날짜를 변경하였습니다.

51일 일요일, 서울 성곽길 18.1키로미터를 걷습니다,. 숭레문에서 출발하여 남산과 동대문과 낙산, 북악산, 인왕산을 거쳐 숭례문에 이르는 길을 하루에 걷습니다. 서울의 속살을 보며 서울의 역사와 문화에 취하여 걸으실 도반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숭례문을 지나 남산을 오르다.

숭례문이라? 언제나 낯설다. 남대문이라고 부를 때 더 친근해지는 숭례문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몇 년 전 어이없는 화재로 상자 속에 갇혀 복구되고 있는 숭례문은 도성의 사대문과 사소문 중에 남쪽으로 나 있는 정문이었다. 조선 태조 7년에 창건된 숭례문은 1448(세종 30)에 재건되었다. 당시 재건하려 했던 이유가세종실록15년 조에 실려 있다.

경복궁의 오른팔이 대체로 산세가 낮고 미약하여 멀리 헤벌어지게 트여서 품으로 껴안은 형국이 없으므로 남대문 밖에 연못을 파고 문안에 지천사를 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남대문 터가 지금같이 낮고 평평한 것은 필시 당초에 그 땅을 낮추어서 평평하게 한 거승로 여겨지는 만큼 이제 그 땅을 다시 돋우어서 양편의 산맥과 잇닿게 한 다음 그 위에 문을 세우는 것이 어떻겠는가? 임금께서 말씀하시니 여러 신하들이 좋다고 하였다.”

지금은 남대문이 밤낮으로 항상 열려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밤이 되면 사대문을 닫고 통행을 막았기 때문에 밤에는 아무리 고관대작이라 할지라도 성 안에 들어갈수 없었다.

남대문에서부터 남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서울 타워로 오르는 길에 옛 성곽의 잔해가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가 오르는 남산과 북악산은 도성을 상징하는 산이라서 태조는 이 두 산에 신사를 세우고 백악대왕 목멱대왕이라는 벼슬을 내린 뒤 제사를 지냈다.

목멱산, 종남산, 인경산, 마뫼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그 모양이 주마탈안형이라 하고, 또는 서쪽 머리를 누에머리라고도 한다. 그 능선에 태조 때 쌓은 성벽이 남아 있고, 정상에는 봉수대와 국사당이 있었지만 봉수대는 헐리고 없으며 국사당은 인왕산으로 옮겨갔다.

걸음 옮기는 곳이 다 꽃이고 푸르러 가는 나뭇잎들도 저마다 다 꽃이다. 흩날리는 꽃잎들의 세례를 받으며 걷다가 보니 남산의 정상에 이른다. 서울 시가가 눈 아래에 그림같이 펼쳐져 있다.

 

동대문이라 불리는 홍인지문

남산에서 순환버스 정류장 쪽으로 이어진 길에 늦게 핀 산벚꽃들이 온통 난리가 아니다. 다시 길은 성곽과 잠시 떨어져서 가다가 산길로 들어선다. 길은 중앙극장에 이르고 타워호텔 부근에서 신라호텔 쪽으로 이어진 성곽 길은 옛 모습이 그나마 많이 남아 있따. 장충체육관에 있는 장충동에서 성은 사라지고, 광희문 교회를 지나 광희문에 이른다.

광희문은 수구문 또는 시구문이라고도 부르는 광희동 2가에 있는 성문이다. 세조 2(1456)에 서울 동남방 곧 장충동 2가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남소문을 내고 광희문이라 하였다. 예종 원년(1469)에 경복궁에서 황천문이 된다 하여 그 문을 막고, 광희동 2가에 새로 수구문을 내는 동시에 남소문의 현판인 광희문을 갖다가 새 문에 달았다. 옛날에 서울 시민들이 죽으면 시체를 이 문으로 내다가 신당동, 왕십리, 금호동 쪽으로 가져다 매장했으므로 속칭 시구문이라 부른다.

광희문에서 성은 끊어지고 도시의 중심부를 지난다. 빌딩숲을 가로질러 복원된 청계천의 오간수교를 지나 포장마차 숲을 지나자 홍인지문이 보인다. 동대문으로 익숙한 이 문은 조선시대에 나라에 중요한 국가시설이 잇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으로,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원래 현판은 홍인문이었으나 세조 이후에 홍인지문으로 고쳐지며 넉자로 되었다. 그 이유는 풍수설에서 기인한 것으로 풍수설에서 인은 목에 속하고 목은 동에 속하므로 홍인은 동방을 뜻한 것이며, 지자를 더한 것은 서울의 지세가 북··남은 산과 고지로 되었고, 오직 동쪽에 험하므로 그 험한 곳을 메우기 위한 뜻이라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이 지대가 도성의 북서·남쪽에 비해 유난히 낮기 때문에 가라앉은 땅 기운을 돋우기 위한 것이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홍인문 밖에는 버드나무가 울창하였으므로 홍인문 밖의 버들이라 하여 필운대의 살구꽃, 복둔지의 복숭아꽃, 천연정의 연꽃, 삼청동과 탕춘대의 수석과 더불어 서울의 놀이터로 유명하였다. 홍인지문에서는 가뭄이 심하면 기우제를 올렸고 그반대로 긴 장마가 져도 비를 그치게 해달라는 영제를 올렸는데 그 이유는 큰 장마다 들 수록 항상 동대문에 물이 들기 때문이었따. 홍인지문은 도성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후기 건축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는 문화재이다.

 

낙산에 올라 조선 오백년을 굽어보다.

관동대로의 출발점인 동대문에서 성곽 길을 따라 낙산으로 오른다. 낙산은 한양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으로 산의 모양이 낙타와 같으므로 낙타산 또는 낙산이라 하며, 또는 변하여 타락산이라 하기도 한다. 성벽에 걸터 앉아 성 밖을 보면 아스라하게 성저십리에 자리잡은 아차산이 보인다. 서쪽을 보면 인왕산이 보이며 인왕산 남쪽에 있는 재가 무악재이다. 인왕산의 남쪽에 북악산이 서 있고, 그 아래 청와대와 경복궁이 자리잡고 있다.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도성 안에서 조선 오백년 사직을 일구었던 것이다.

낙산으로 오르는 길, 성벽 아래의 집들이 마치 80년대 풍경으로 남아 있다. 불과 30여 년 전의 모습일진데 이렇게 아득한 세월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곳 낙산 동쪽에 자리 잡은 봉우리가 동망봉이다. 비운의 임금인 단종의 아내였떤 정순왕후가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간 단종을 향해 아침저녁으로 제를 올리던 곳이다.

낙산공원에서 암문을 지나서 내려오자 하성대 입구역이고, 지하도를 건너서 5번 출구로 나가자 혜화문이 나타난다. 동소문으로도 불리는 이곳은 특이하게도 문루 천장에 봉항을 그리었는데, 이유인즉 유독 새의 피해가 잦았던 곳이라 그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전해진다. 태조 때에는 홍희문이라 하였으며, 중종 6(1511)에 혜화문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혜화문 고개 또는 혜화동 고개라 하며, 혜화문의 속칭인 동소문의 이름을 따서 동소문고개라고 부른다.

 

혜화고개 넘어 북악산 정상에 서다.

혜화문에서 경신중학교를 지나 최순우 옛집을 지나는 길의 성곽은 끊어져 있다가 서울과학고등학교 부근에서 다시 나타난다. 길은 와룡공원 쪽으로 이어지고 여기서부터 계속 오르막길인 북악산 등산로다. 와룡공원 쉼터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산자락에 큰 기와집의 삼청각이 보인다. 탐방안내소를 지나 잘 정돈된 길을 따라가다가 만나는 문이 숙정문이다. 숙정문은 종로구 삼청동의 북악산 동쪽 고갯마루에 있는 조선시대 정북문이며 1963121일 서울성곽에 포함되어 사적 제 10호로 지정되었다.

1413년 풍수지리학가 최양선이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상소를 올린 뒤에는 문을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 이후 숙정문은 음양오행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음에 해당하는 까닭에 나라에 가뭄이 들 때는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열고, 비가 많이 내리면 닫았다고 한다. 도성 북문이지만, 서울 성곽의 나머지 눈과는 달리 사람의 출입이 거의 없는 험준한 산악지역에 위치해 실질적인 성문 기능은 하지 않았다.

도성의 북쪽에 자리잡은 숙정문을 지나면 촛대바우에 이르고, 서쪽을 보면 백악산 정상이 멀기만 하다. 북악산은 경복궁 북쪽에 대나무 숱같이 우뚝 솟은 산으로 백악 또는 공극산, 면악이라고도 부른다. 고려 숙종 9년에 윤관 이 남경 터를 아뢰기를 삼각산, 면악 남쪽의 산형과 수세가 가히 도읍을 세울 만하다.”하였다. 신라 말 풍수지리가인 도선도 충천목성이 가히 궁궐의 주룡이 된다 하였던 곳이다.

이 산에 오르면 서울을 받치고 있는 북한산이 한눈에 보이고 앞에는 경복궁과 청와대가 펼쳐져 있으며, 조선에서 현재로 이어진 서울이 손에 잡힐 듯 보인다. 백악산 정상에서 자하문으로 내려가는 길은 만만치 않다. 자하문 터널을 지나면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새겨져 있고, 다시 인왕산으로 이어진 성곽 길로 이어진다. 숨이 턱턱 막히게 가파르다.

 

죽란시사로 맺었던 옛 선비들의 풍류

드디어 인왕산 정상이 지척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궁궐 터를 잡을 때 무학대사가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과 남산으로 용호를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정도전은 자고로 제왕은 남면항 천하를 다스렸고, 동향한 것은 듣지 못하였다.”며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백악산 아래 궁궐이 들어섰다. 그 일이 좌절되자 무학이 탄식하면서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후에 내 말을 생각하게 되리라.”고 하였다.

저 멀리 바라다보이는 경복궁에서 남쪽을 바라볼 때 인왕산은 오른쪽이 되므로 인왕산이 우백호가 되고 낙산은 좌청룡이 된다. 북현무에 해당하는 것은 북악산이고, 남주작이 바로 남산이다. 그러므로 서울의 주산은 북악산이고 진산은 북한산이다.

성곽 길로 이어진 끄트머리에는 선바위라고 부르는 입암이 있다. 조선을 개국한 뒤 처음 성을 쌓을 때, 무학대사는 이 바위를 성 안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정도전은 안된다고 버티었다. 결국 태조는 정도전이 이 바위를 넣으면 불교가 왕성하고, 성 밖으로 내 놓으면 유교가 왕성하게 된다.”는 말을 듣고 성밖으로 내놓게 하였따. 공사 중이라서 그 길을 따라가지 못하고 인왕천 약수터 쪽으로 내려가기로 한다.

삼거리할머니 슈퍼에서 시원한 맥주로 입가심을 하고 골목길을 내려가다가 홍난파의 옛집과 백범 김구의 최후를 지켜본 경교장을 지난다. 그곳에서 서대문 터가 지척이다. 이곳에는 다산 정약용의 자취가 남아 있다.

지금은 사라진 서련지의 연못은 연꽃이 많기도 했지만 연꽃의 크기로 소문이 자자했다고 전해진다. 죽란시사로 맺은 선비들은 동이 트기 전 새벽에 모여서 배를 띄우고 연꽃 트메 갔다 대고는 눈을 감고 숨을 죽인 채 무엇인가를 기다렸는데, 그것이 바로 연꽃이 필 떄 내는 소리였다. 마치 꽃이슬을 마음속에 떨어뜨리는 듯한 그 청량감, 즉 청개화성을 소중하게 여겼던 선비들의 그윽하고도 절절한 멋이 그 당시 다산과 그의 친구들이 즐겨했던 풍류였다.

서대문을 지나 예원고등학교와 중앙일보, 대한상공회의소를 지나 다시 출발점인 남대문에 닿는다. 여정을 시작한 지 거의 아홉 시간 만이다. 행복과 비애를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꽃피는 봄날, 연두빛으로 푸르러 가는 나뭇잎들과 빗방울처럼 떨어져 내리는 꽃잎을 맞으며 걸었던 성곽 길이 꿈속인 듯 아련하다.

신정일의 <가슴 설레는 걷기 여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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