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5. 11. 14:49ㆍ참고
남원 지리산의 바래봉과 진안의 마이산 그리고 진안고원 길을 걷는다
남원 지리산의 바래봉과 진안의 마이산 그리고 진안고원 길을 걷는다.
2016년 6월 첫째 주말 금요일(3일)에서 일요일(5)까지 남원의 지리산 정령치에서 바래봉을 거쳐 운봉에 이르는 길과 남원 시내 그리고 진안에 있는 마이산과 진안고원 길을 걸을 예정입니다.
우리 땅 걷기에서 한 번도 걷지 않은 진안고원에 조성 된 진안고원 길은 마치 강원도 산촌을 연상시킬 정도로 높은 지대에 형성된 길로 아름답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산촌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 그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그 모든 것이 서로 어우러진 길을 천천히 걸을 예정입니다.
지리산 정령치에서 바래봉 일대를 걷다.
지리산의 한 봉우리인 정령치에서 바래봉으로 이어진 길을 걷습니다.
바래봉은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와 용산리, 인월면 중군리, 산내면 내령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남원시 운봉읍 사람들은 산 모양새가 마치 '삿갓'처럼 보인다 하여 삿갓봉으로 부르기도 합니다. 또한 스님들의 밥그릇인 바리때를 엎어 놓은 모양이라는 의미의 바리봉인데 음이 변하여 바래봉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백두산에서부터 이어진 백두대간 맥에서 보면 고남산과 노치마을의 수정봉을 지나 평지분수계를 따라 가다가 고리봉에 오르면 동북쪽으로 내려가는 산줄기를 만납니다. 이 산줄기를 따라 계속가면 세걸산, 부운치, 팔령치를 지나 바래봉과 덕두봉으로 이어집니다. 이 산줄기를 중심으로 서쪽은 운봉천과 광천에 합수되어 섬진강으로, 동쪽은 만수천에 합수되어 낙동강의 한 지류인 남강으로 흘러듭니다.
남원 운봉에서 산내면 달궁으로 이어지는 737 지방도로를 타고 가다가 정령치 휴게소에서 바래봉(1,186.2m)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이라 초심자도 걸을 수 있는 길입니다.
산내면과 운봉읍의 큰 산지부 경계이면서 운봉과 남원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을 정도로 전망이 좋고, 지리산 전경을 북쪽에서 가장 훌륭하게 볼 수 있는 곳으로도 손꼽히는 것입니다.
나라 안에서 철쭉이 가장 많이 피는 고산지역으로 5월 하순 철쭉제가 유명하 산 정상 바로 남쪽에 국립종축원 목장초지가 있습니다.
“흙의 성질이 두텁고 기름지므로 온 산이 모두 사람이 살기에 알맞은 곳이다.
산 속에는 백리나 되는 긴 골짜기가 많은데, 바깥쪽은 좁지만, 안쪽은 넓기 때문에 가끔 사람이 발견하지 못한 곳도 있으므로, 나라에 세금稅金도 바치지 않는다.
땅이 남해에 가까워 기후가 따뜻하므로 산속에는 대나무가 많고, 또 감과 밤이 대단히 많아서 가꾸는 사람이 없어도 저절로 열렸다가 저절로 떨어진다.
높은 산봉우리 위에 기장이나 조를 뿌려 두어도 무성하게 자라지 않는 곳이 없다. 평지의 밭에도 모두 심을 수 있으므로 산 속에는 촌사람과 섞여서 살아간다.
스님이나 속인들이 대나무를 꺾고, 감과 밤을 주워서 살기 때문에 수고하지 않아도 생리生利가 족하다.
농부와 공인들 역시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도 모두 충족하게 살아간다. 이런 까닭으로 이 산에 사는 백성들은 풍년과 흉년을 모르고 지내므로 부산富山이라고 부른다..’고
이중환의 <택리지>에 실린 글이다. 이중환의 말처럼 지리산은 수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 한국의 대표적인 육산이다. 그래서 조용헌 선생은 골산(骨山)과 육산(肉山)을 빗대어 ‘사는 것이 외롭다고 느낄 때는 지리산의 품에 안기고, 기운이 빠져 몸이 쳐질 때는 설악산의 바위 맛을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남원의 동쪽에 자리 잡은 지리산이 『신증동국여지승람』 ‘산천’ 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지리산은 부의 동쪽 60리에 있다. 산세(山勢)가 높고 웅대하여 수백 리에 웅거하였으니, 여진 백두산의 산맥이 뻗어내려 여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하여 두류(頭流)라고도 부른다. 혹은 백두산의 맥은 바다에 이르러 그치는데 이곳에서 잠시 정류하였다 하여 유(流)자는 유(留)로 쓰는 것이 옳다 한다. 또 지리(地理)라고 이름하고 또 방장(方丈)이라고도 하였으니, 두보(杜甫)의 시 「방장삼한외(方丈三韓外)」의 주(注)와 통감(通監) 집람(輯覽)에서 ‘방장이 대방군의 남쪽에 있다.’한 곳이 이곳이다. 신라는 이것으로 남악(南岳)을 삼아 중사(中祀)에 올렸다. 고려와 본조에서도 모두 이에 따랐다. 산 둘레에는 십 주(州)가 있는데, 그 북쪽은 함양이요, 동남쪽은 진주(晋州)요, 서쪽에는 남원이 자리 잡고 있다. 그 기이한 봉우리와 깍은 듯한 절벽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 동쪽은 천왕봉과 서쪽의 반야봉(般若峯)이 가장 높으니 산허리에 혹 구름이 끼고 비가 오며 뇌성과 번개가 요란해도 그 위 산봉우리는 청명하다. 해마다 가을 하늘이 높으면 새매가 북쪽에서 모여드는데 열군(列郡)의 사람들이 다투어 그물을 쳐서 잡는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태을(太乙:북극의 신)이 그 위에 살고 있으니 많은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며, 용상(龍象)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도 한다.’
<신정일의 <우리 산하>에서
진안 고원 길은 필자가 유년시절과 청소년시절을 보냈던 곳으로 <느리게 걷는 사람(문화체육관광부 문학부문 우수도서>의 무대인 진안군 백운면과 임실의 아름답고 유서 깊은 길을 걷게 될 이번 여정은 여름의 초입에 산촌마을의 정서와 고개에 얽힌 이야기들을 마음껏 느끼게 될 것입니다.
“마이산은 계절 별로 부르는 이름들이 다르다. 봄에는 돛대봉, 여름에는 용각봉, 가을에는 마이산, 겨울에는 문필종이라고 부른다. 시대 별로 부르는 이름들이 다 다른데, 옛 신라 때에는 서다산(西多山) 고려시대에는 용출산(聳出山), 조선 초기에 이르러서는 속금산(束金山)이라 부르다가 태종 때에 이르러 마이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산의 특징과 매력은 누가 뭐래도 그 생김새가 기기묘묘한 형태로 갖가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흔히 동쪽에 있는 봉우리를 숫마이봉, 서쪽에 있는 봉우리를 암마이봉이라 부르는데 숫마이봉 중턱에는 화암굴이 있고, 이 굴속에는 맑은 약수가 솟아올라 이 약수를 마시면 옥동자를 잉태한다는 전설이 있다.
역사 속에 이 산과 인연이 깊은 사람이 조선을 개국하여 조선의 첫 번째 임금이 된 이성계李成桂다.
이성계가 고려의 장군이었을 때 이 산을 지나다가 시 한편을 남겼다.
“동으로 달리는 천마 이미 지쳤는가.
갈길은 먼데 그만 쓰러지고 말았구나.
연인涓人은 몸통만 가져가고
두 봉우리 이루고 하늘로 솟아 있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이성계의 셋째 아들인 태종이 이곳에 왔다가 그의 아버지이자 부왕인 이성계가 지은 이 시를 보고 산 이름을 마이산이라고 고쳤다. 하지만 그 자신은 이 산을 속금산이라고 불렀는데, 그렇게 된 연유가 있다.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고 살았던 이성계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성계에게 金으로 된 자(尺)를 건네주며 ‘이 금척으로 삼한강토三韓疆土)를 헤아려 보고 국가를 정제하라’ 고 하였다.
그 뒤로도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우왕 6년에 운봉 지역으로 침입해온 왜구 이자발도(阿只拔都)의 무리를 크게 무찌르고 개선 길에 올랐다. 이 성계가 돌아가던 길에 마이산에 들렀다가 깜짝 놀랐다. 이 산의 형상이 꿈에 신인으로부터 금척을 받았던 곳이었다. 그런 연유로 이산은 조선 창업을 예언한 신령스런 산으로 극진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 태조 때 정도전(鄭道傳)이 태조의 공덕을 칭송하기 위해 몽금척夢金尺謠를 춤으로 만든 뒤 그리고 악장을 만들었다. 태조는 이를 가상히 여겨 정도전에게 채색비단을 내리고 악공에게 익히게 하였다.
춤으로 꾸며진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1402년(태종 2) 6월 예조와 의례상정소가 함께 조회와 연향악의 용악절도(用樂節度)를 정하였을 때 ≪고려사≫에 전하는 <오양선 五羊仙>·<무고 舞鼓>등의 정재와 함께 <몽금척>·<수보록 受寶籙> 등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때 이미 춤으로 추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태종은 이 산의 모습이 꿈속에서 받은 금척을 묶어 놓은 듯, 하다고 해서 속금산이라고 명명했고, 그런 이후에 훗날 태종이 된 정안군을 이 산에 보내어 산신에게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는 것이다.
서쪽의 암마이봉 절벽 아래에는 1백20여 기의 돌탑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는 유명한 마이탑사가 자리 잡고 있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 35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돌탑들은 거센 폭풍우에도 넘어지는 일이 없으며 단위에 놓여있는 정화그릇은 겨울에 물을 갈고 기도를 드리면 그릇 표면으로부터 10~15cm의 고드름이 솟아오르는 신비를 보여주기도 한다.
자연석을 차곡차곡 쌓아 마치 송곳처럼 정교하게, 태산과 같이 장엄하게 마이산 자락에 솟아 있는 이 돌탑들은 주탑인 천지탑天地塔을 정점으로 줄줄이 서 있다.
이 탑들이 만들어진 정확한 연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와 비슷한 돌탑이 옥천군 동이면 청마리에 있는 마을탑이다. 이 탑들을 두고 마한시대의 탑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 마이산의 돌탑을은 고조선 시대의 돌탑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이 탑들의 조탑방식이 우린나라에서 보기 드문 오히려 아시아 북방 사막의 유목민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탑들은 청마리의 마을탑들보다 더 원형이 오래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고조선 시대에 쌓기 시작하여 조선시대말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탑들은 음양사상에 의해 축조 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마이산이 동서로 남북을 마주보는 형상인데 비해, 천지 탑은 남북으로 나란히 서서 동쪽을 향하고 있다.
천지탑 바로 아래에 조성된 탑이 바로 오행탑五行塔이다. 음양설陰陽說에 의하면. 북北은 음陰이고, 남南은 양陽이 분명하다. 또한 오행설에 의하면 중앙에 토土가 자리 잡고, 서쪽으로 금金이 북쪽으로 수水가. 동으로 목木에 이어 남쪽으로 화火가 이른 것이 곧 오행상생五行相生의 수리數理이기 때문에 천지탑과 오행탑은 음양오행의 이치를 탑으로 조형한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이 탑은 서편이 (서봉西峰(즉 부봉婦峯)으로 음양으로는 음陰이며, 오행으로는 금金에 해당하여)이 가로 막혀. 금金으로 금金을 묶은 속금의 형국이다.
그런 연유로 천지탑 아래에 서 있는 오행 탑을 조선의 궁궐인 근정전 임금의 자리 뒤편에 그려져 있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가 이곳에서 유래했다고 보기도 한다.
일월오봉도는 조선시대 궁궐 정전(正殿)의 어좌(御座) 뒤, 또는 야외 행사 때에는 천막 안의 옥좌 뒤에, 사후에는 빈전(殯殿)에, 진전(眞殿)에는 국왕의 초상화 뒤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병풍이다.
이 탑이 유례 없는 큰 사라호 태풍을 비롯한 수많은 태풍에도 하나도 흔들리거나 쓰러지지 않는 것은 석질에 순인력(順引力)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숫 마이봉 남쪽 기슭에는 은수사가 자리 잡고 있고 맞은편에는 마이산과 비슷한 작은 마이산이 서있다.
이 탑사에 있는 돌탑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여러 개 전해져 온다. 그 중 하나가 조선 후기에 이갑룡李甲龍이라는 사람이 발원하여 전국 명산의 돌을 몇 개씩 날라다 이곳의 작은 바윗돌과 함께 쌓아 만든 탑이라는 이야기이다.“
신정일의 <길 위에서 만나는 인문학>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