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1. 11. 23:22ㆍ일반산행
자전거를 타고 산성을 놀러다니다 병자년겨울을 흔들어 깨워 글을 쓸수밖에 없었다는
김훈의'남한산성'을 읽은 사람은 한번쯤 가보리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나들이 가고픈 가을날 오후 카메라와 생수한병을 들고 집을 나섰다.
남한산성,성남,하남,광주에 걸쳐있는 도립공원으로 너무 잘 알려져 오히려 잊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하철8호선 산성역에서 버스가 연계되어있고, 자가용은 1000원이면 온종일 산성에서 보낼수 있다.
신라 문무왕때 토성으로 축성되어 주장성 또는 일장성으로 불리웠다가
후금의 침입을 막고자 광해군이 석성으로 개축하여 인조4년에 준공되었고,
그후 외성축과 성내조영은 조선말까지 계속되었다.
본성,외성,옹성,으로 되어있고 둘레는 11.7km 높이3-7.5m 4장대(서장대만 보존) 4문 5옹성 16암문 2봉하대가 있고
유사시 임금이 이어할수있는 행궁,종묘,사직,관아,재옥,객사,종각,사찰등이 있다.
산성 정문인 남문(자화문)을 통과해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주차장까지 가다보면
멀리 경사진 산등성에 앉은 산성쌓기전부터 있었다는 '망월사'가 눈에 들어와 들뜬맘을 차분히 가라앉힌다.
마을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샛길로 청량산(482.6m)에 오르면 드디어 성벽을 볼수있다.
병자호란때 본성에 이어하여 45일간 항전하던 그곳이다.
당시 중국대륙은 그동안 조선이 받들던 명이 쇠하고,
후금을 세운 누루아치 아들 홍타이지가 국호를 청으로 바꾸어
용골대를 앞세워 조선을 침공하면서 임금과 세자는 남한산성에 피신한다.
산성을 빠져나와 강화도로 떠나려 하지만 폭설로 인해 포기하고,
성안에 갇혀 완전고립무원의 절망적인 처지가 된다.
청장 용골대와 청병들이 산성을 에워싸고 삼전도 들판에 본진을 펼쳐 길고 지루한 싸움이 시작된다.
남한산성의 임금은 무력하기 짝이없고, 갑자기 임금을 받아들인 성안의 백성들도 힘든상황이온다.
성안 민촌은 지방관아,대장간,술도가,포도청,사형장,장터,우시장,방앗간,활터,서낭당,매염터,매탄처등이있어 자족하는 마을이었다.
마을 군데군데 무우청과 속찬배추가 한낮 햇볕에 푸르게 넘실대고 있었다.
청량산에는 서장대라 불리웠던 수어사 지휘본부,영조때 이층으로 복원한 '수어장대'가있다.
수어사 이시백이 군졸들의 언발과 손,귀등의 환부에 돼지기름을 발라주던 장소가 양지바른 이쯤되겠구나.
동남쪽 축조책임자였던 이회원혼을 달래는 청량당문앞에는 한그루소나무가 진한향기를 품고 있었다.
왼족에 성벽을 두고 서문까지 가는길은 늙은 소나무가 유난히 높이 서 있다.
서장대를 향하는 어전행사에 늙은 신료들은 미끄러운 산길을 이가지를 꺽어 언땅을 짚었겠구나.
청진에 투항한 서문(우익문)의 외벽은 경사가 심해 거여,마천방면으로 가는 가장 빠른길이다.
적의 눈에 띄지 않게 만들어 놓은 암문을 빠져나와 '연주봉옹성'에 올랐다.
잘 다듬어진 옹성 높은곳에선 산성의 외벽들이 잘보였다.
북장대터를 지나면 북문이 나온다.
조선이 성문을 열고 나가 싸운 유일한곳이나 참패하여 북문밖은 붉은눈으로 덮였다한다.
샛길로 내려오면 '침괘정'과' 행궁'이 나온다.
골짜기 사이로 어둠이 몰고올때쯤 본 행궁은 복원중이라는 팻말과 함께 굳게 닫힌 자물쇠가 달려있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으로 삶을 열어나가자며 끝까지 싸우기를 주장하는 예조판서 김상헌,
죽음은 견딜수없고 치욕은 견딜수있는것, 치욕이 죽음보다 가벼운 것이라며 화친을 주장하는 이조판서 최명길
사이에서 죽어서 살것인지,살아서 죽을것인지 갈등하며 고심하던 행궁,
임금은 늦은밤 적막이 찾아오고 바람소리만 들려도,
"칸이 성벽을 넘어들어왔다"는 군병과 민초들의 수근거리는 소리로 들렸을테고
신새벽 새벽달이 질때까지 숨죽여 흐느꼈을것이다.
당상관들이 엎들여 국운을 걱정하였던 차디찬 마루바닥은 보지못하고,
겨울비가 고인땅에 늙은 신료들이 무릎을 끓고 한숨만 남긴 행궁마당만 멀리 볼수가 있었다.
이어진 산성탐방은
병자호란후 인질로 심양에 끌려가 충절을 지키다
순절한 삼학사,홍익한,윤집,오달제와 김상헌,정온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 '현절사'로 시작했다.
북문에서 벌봉쪽으로 가는 성벽길, 가뭄탓인지 고운단풍은 아니지만 물들어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놀란 청솔모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재빠르게 나무위로 올라갔다.
눈,코,귀,피부, 온몸으로 느끼는 가을은 짧고 아쉬워 단풍구경하러 찾아다니는가보다.
단풍도 알고보면,호된겨울을 얼어죽지 않고 견디려는 생존을 위한 처절한 싸움이라고한다.
몸안의 물기를 빼어 줄기와 뿌리에 자신의 에너지를 주고, 빨갛고 노랗게 변하다 떨어진다는데,
난 갑자기 여기쌓인 낙엽냄새를 코평수를 늘려 실컨 마시고도 쓸어다 차바닥에 깔고싶은 이기적인 생각이 든다.
가을이 점점 깊어지는가보다.
동장대터를 지나 남문밖으로 나가 '벌봉'(515.2m)올랐다.
한마리벌이 서있는 모습이다.
날개달린 자유로운 영혼은 훨훨 성 안과 밖을 넘나들수 있다.
소설에선 망월대 얕은 봉우리는 시야가 열려있어 행궁과 민촌들을 샅샅이 보았다고 하는데,
내행전과 행궁마당에 홍이포를 쏘아댔다는곳에 막상 오르니
고요한 산성안은 잘보이지 않고 이어졌다 끊겼다하는 성벽만 보였다.
오늘의 길잡이는 외성과 검단산을 향해 삿대질하며 열심히 설명한다. 요즘 배낭안에서 담배가 나오는데,얼마나 어렵게 끊고, 속상한다.
왔던길을 돌아 암문으로 들어서니 쉬어가라는 손짓을 하며 막걸리를 한잔씩 하는이도 있었다.
내성으로 들어와 '동문'으로 향하는 길은 가파른 내리막이었다.
거꾸로 왔다면 헉헉거릴 모습에 내심 안도하고가는 도중에 저밑에서 땀을 흘리며 오르고 있는 친구를 만났다.
같은시각에 같은장소에서 우연이다.
같은것을 보고 같은 생각이었다면 인연이라 해야 할것이다.
살랑거리는 바람에도 벌써 떨어져버린 낙엽이 바닥을 덮었다.
봄이 되면 산철쭉이 일품이라는 '장경사'를 옆으로지나 '동문'(좌익문)에 다달았다.
동문 안쪽으로 교관들의 낚시터였던 '지수당'이라는 연못이 있다.
삼남지방과 강원도에 인조의격서를 들고 성밖으로 나가는 미천한 대장장이 서날쇠가 소설에 등장한다.
실존인물은 천민 서흔남이다.
공을 세웠으나 무덤은 사라지고 묘비만 남게되었다고 전해지는데,
부서진 묘비가 지수당 연못가에 옮겨져 있었다.
그외에 한말에 동문앞에서 천주교인들이 사형을 당한 '천주교순교성지'와 '역사관''만해기념관'등이 있다.
갇힌 성안에선 군마에게 먹일풀이 없어 초가지붕과 군졸 방한 가마니를 삶아먹이고
싸움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말라죽은 그 말들을 살아남은자들은 끓여먹고...처자식을 성밖에 두고 성안에서 죽은자와 달아난자...
그래도 방앗간집 며느리는 해산을 하고,해가 바뀌어가고 봄기운은 서서히 찾아오고 있었다.
송파강은 녹아 물비늘이 반짝인다.
빈텃밭에는 노란싹이 나오고 흙알갱이 사이로 냉이가 올라와 시간은 지나간다.
김상헌은 치욕스런 삶을 버리려 하지만 실패하고
젊은 당하관 윤집,오달제는 척화신을 자청하며 적에게 목숨을 바친다.
1월30일 홍예가 낮은 서문으로 이른아침에 임금은 나섰다.
삼전도에 도착한 임금은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려 예를 올린다.
긴하루가 저물고 임금은 송파강을 건너 도성으로 돌아가게 된다.
삼전도에서 칸이 철군하자 임금이 전곶장에 나가 전송한다.
광해군의 실리주의 노선을 살렸다면 군신관계를 청산하고 국력신장 계기가 되었을텐데 ..
인조반정으로 능양군이 임금이된 인조는
지나친 대명사대주의자로서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못해 병자호란이라는 굴욕적인 역사를 남기게 되었다.
어제는 임금을 건네준 사공이 오늘은 식량을 얻어볼요량으로 청장을 건네주는게 어리섞은 백성이다.
이름도 생소한 금융위가 이 어리섞은 백성을 괴롭힌다.
태평양 건너에서는 독단과 불신이 인종을 초월한 지도자를 배출하고,
변화와 화합하자며 "나,너가 아닌 우리와 그들의 차별이 없다"고 외치고 있다.
이건 드라마가 아닌 실제상항이다.
허리에 대못을 박고있는 백성이기에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우리의 지도자가 알았음한다.
내가 서있는 거실창가에는 남한산성,검단산이 이어지는 능선위로 아침이 밝아오고,
부엌창가로 아차산,용마산 멀리 도봉산의 오봉너머로 석양이 붉게 물들다 사라진다.
1936년 12월14일~1937년2월2일 겨울에는 언눈위로 또눈이 내려 가루눈이 날리고 눈보라가 많았다한다.
눈덮인 겨울에 다시 그곳에 가볼수 있을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