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의 역사 1

2013. 12. 6. 11:49참고

 

헝가리 역사와 문화1~5------김지영(한국 외국어대 헝가리어과 외래교수)

 

 

유럽 정착이전과 정착시기의 역사

유럽의 중앙부에 자리한 헝가리는 우리에게 잘알려지지 않은 나라이다.

엄혹한 냉전의 시절 1956년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느에서 일어난

반소 헝가리 혁명에 대해 노래한 김춘수 시인의 '부다페스에서 어느소녀의 죽음'을 통해

어렴풋이 존재를 아는정도이다.

'아이리스'촬영지로 헝가리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정도이다.

1989년 체제전화당시 동유럽 국가중에서도 최초로 우리와 외교관계를 맺고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체제 전환을 이끌었고

과거 북한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꾸준히 우리나라를 지지해오고 있는 우방국가이다.

역사적으로 헝가리 민족이 러시아 북부의 우랄산맥과 알타이 산맥의 초지에서

유럽으로 이주해온 아시아계 유목민의일족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친근하게 느껴지는 민족이기도 하다.

역사학자와 언어학자들의 연구에 의하여 헝가리어및

헝가리 민족의 친족관계는 북구 및 러시아에 거주하는

소수민족과 맺어진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인류학적인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튀르크게 고대 이란계 슬라브계 게르만계

요소가 많이 나타나고 있는점을 살펴볼때 헝가리 민족의 기원을

아시아 혹은 러시아의 어느 한곳으로 단정짓기가 어려운 점이 있다.

기원전 4000년경에 사모예드족이 시베리아 북동쪽으로

우랄어족에서 분리되어 나가는데 이후의 우랄어족을

핀우그르 어족이라고 부른다.

이 핀우그르어족의 주된 거주지로는 우랄산맥과

볼가 강 중류 사이와 카마강과 볼가강의 합루지점 북쪽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원전 2000년경 핀 우그르 어족은 서쪽으로 이동한 핀 페므르어족과

우랄산맥 남동쪽에 남은 우그르 어족으로 분리 된다.

우그르 어족은 산림과 초원을 만나는 지역에서

농업과 목축을 통해 생활하고 고대 이란계 민족을 통해

청동기 문화를 습득한다.

기원전1500-1000사이에 발생한 기후변동으로 우그르 어족을 분리시켜

최종적 고대 헝가리인들만의 사회를 이루게 하였고

이들을 기마유목민족화 시켰다.

계속되는 기후 변화로 헝가리인들은 남쪽으로 이동하며

이란계 스키타이 문화의 영향을 받고 철기를 사용하게 된다.

기원전500년경부터 기원후 700년경 사이에 헝가리인들이 유럽대륙으로 건너와

우랄산맥서쪽의 바시키리아 지방에 거주하면서 독자적인 민족문화를 형성한 시기를

'마그나 홍가리아'라고 부른다

헝가리인들은 '머저르'라는 호칭을 사용하며 독자적인 민족 공동체 인식을 갖기 시작했고

목축생활과 약탈 전쟁을 행하였다.

반기마유모민족화 씨족과 씨족장을 중심으로 한 부족연합체가 구성되었으며

카자르 제국의 세력권하에 있었다.

750년경헝가리인들이 바시키리아 지방을 떠나 돈강과 아조프호수사이에

거주한 시기는 '레베디어'라고 부른다.

이시기에 헝가리인은 여러 민족과 접촉하며 인종적으로 변화를 맞게 된다.

이후에는 새로운 튀르크계 민족인 페체네그족의 침입으로

드네프르강과 드네스테르강 사이로 이동하게 되는데

이시를'에텔쾨즈'라고 부른다.

머지않아 에텔쾨즈 같은 초원지대에서는 계속되는

동쪽에서의 침입을 막기 힘들다는 판단하에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갖추고

유목생활에도 적합한 카르파티아 분지로 이동하여 896년경

이곳에 도착하게 된다.

이러한 원정은 물질적 경제적 동기와 더불어 영토 확장을 목표로 하지 않고

그들의 군사적 우월성을 통해 주위의 세력들에 의한

카르파티아 분지 위협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에서 행해졌다.

하지만 955년 아우크스부르크에 패배를 기점으로 더이상

서쪽으로 원정황동을 할수없게 되었으며 비잔틴제국과

신성 로마제국의 사이에서 이동이냐 기독교 수용이냐의

선택에 직면하게 되었다.

 

헝가리 민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흥미로운 전설들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고고학적 역사적인 조사를 통해 확실하게 밝혀진 사실은 없다

5세기에서6세기사이에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이동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이민족의 어족은 우랄어족의 한 지류인 핀 우그르 어족에 속하지만

그들의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문화는 대부분 아시아와 동유럽의 광할한

평원에서 살았던 터키 유목민족과 유사하다.

헝가리 민족의 부족은 890년대 카르파티아 분지에 침입했다.그들은 그 지역을 차지 하고

슬라브족과 불가리아 터키 민족을 통치했다.

 

2.기독교 수용과 유럽화,중세,모하치의 패전

카르파티아 정착과 원정 활동이후 헝가리는 그들 민족의 존립을 위해

기도교를 수용하게 된다.

헝가리는 오랜 이동 과정에서 습득한 아시아 기마유목민족적 요소들을 버리고

 

서유럽 기독교 문화권에 속하게 되면서 역사와 문화 발전에 있어서

서유럽과 함께 하게 되엇고 완전한 유럽국가가 되었다

이후 아르파드의 후손인 바이크(세레명 이슈트반)는 기독교를 기반으로한

헝가리왕국을 건설해 1000년에 왕위에 올라 이슈트반 1세가 된다.

 

10세기에 이르러 경제적 사회적 환경은 유목 농경에서 정착하고 마침내 헝가리인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게져 군주의 지도 아래 최초로 자신들의 나라를 세웠으며

최초 기독교왕인 이슈트반 1세(997-1038)가 게저의 뒤를 이었다.

이슈트반 1세는 토지 소유를 통해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주 단위 지방 행정조직을 구성

주교좌 건립과 수도원완성을 토해 교회조직을 확대 하였다.

라틴어을 보급하고 시장갯ㄹ 무욕로를 개방하고 그가 이룩한 국가 보직

법률사회체게는 14세가까지 변하지 않고 골격이 유지되어

중세 초기 헝가리 왕국에 영향을 끼쳤다.

이슈트반 1세 치하에 헝가리 왕국은 중부 유렵의 주요국으로 성장했다.

이기간동안 신성 로마제국,보혜미아 왕국,폴란드 왕국 러시아 공국들 주변국과의

전쟁과 평화의 시기가 반복 되었다.

이슈트반 1세가 사망한후 헝가리 왕국은 내적으로는 왕위 계승문제와 성직자와

중간귀족계층간의 갈등 외적으로는 신성로마제국과 동로마 지국의 위협으로

흔들리게 되었고 라슬로1세가 즉위한 뒤에야 진정되었다.

라슬로 1세는 법질서확립과 저항세력 진압을 통해 봉건적 질서 확립시키고 왕국의

교회조직을 광권하에 귀속시켰으며 슬로베키아와 크로아티아 지역을 정복하였다

당시 로마네스크 문화가 웅성하였다.

라슬로1세 사후 타 민족과 동화 왕권다툼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지만

벨러3세 즉위후 다시 안정을 찾았다.

이시기에 정치 문화 발전이 있었고 화폐경제가 확산되고

세르비아 불가리아가 헝가리 왕국과 비잔틴 제국사이에 완충지 역활을 하게 되었다.

벨러3세가 프랑스출신 왕비를 맞이하여 프랑스문화가 유입되고 농업이 발전했다.

그후 언라시드귀족들의 불만을 야기한다.전쟁 경비를 충당키위해

세금을 더두었기 때문이다.

귀족들의압력에 의해  권한과 권위 신장을 내용으로 하는'어러니 불러'칙서를 발표했다.

벨러4세는 귀족들 토지를 왕실소유로 하고 중앙집권을 강화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는 봉건귀족의 반발을 사고 몽골제국침입으로 실패했다.

1241년 몽골의 침입으로 헝가리는 인적 물적 피해를 입고 이를 복구하려

외래인을 받아들이는 정책을 편다.

국가 방위목적으로 봉건 귀족들에게 성과 요새를 건설할수있도록 허락했는데

이 귀족들의 세력확대로 이어졌다.

서유럽기독교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헝가리가 몽골 침입의 저지선역활을 하여

오랜 투자가 결실을 맺은것이라 평가한다.

그후 헝가리 왕국은 왕권다툼과 봉건 귀족들 세력 확장으로 혼란에 빠져

봉건적 무정부 상태가 지속된다.

중세 초기에는 헝가리인들이 카르파티아 분지에 정착하여 더이상 이동하지 않게 됨에 따라

물질 정신문화 발전이 이루어졌다.

서유럽문물이 헝가리에 들어오면서 헝가리 고유 전통적인 문화가 급격히 퇴조한다.

건물은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으로 지어지고 라틴어로 씌여진 종교문학작품들이 유행한다.

이시기에는 현존 최고 역사서인 '게스타 홍가로룸'이 라틴어로 쓰여지기도 한다.

카로이1세는 나폴리 왕국의 언주 왕가 출신으로 치열한 왕위 다툼끝에 왕위에 오른다.

카로이 1세는 교황과 이탈리아 은행가들의 도움으로 왕권을 확대해 나갔으며

당시 주조된 금화는 우럽에서 가장 안정적인 통화 수단이 되었다.

또한 주변 민족들의 헝가리 유입은 계속되고 정책으로

이들을 특정지역에 거주토록 했다.

카로이 아들인 러요시1세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영토확장 발칸반도로 세력확장해

'러요시대제'로 불린다.

그는 언드라이2세가 발표했던 황금칙서내용을 재확인하며

귀족들지지도 이끌어낸다.

카로이1세와 러요시1세가 재위한 언주왕가 시대에는 왕국이

경제 문화발전을 이루고 영토 확장하여 다시 번창하게 된다

이시기에 오스만 튀르크가 자주 침입했는데 귀족들은

자신의 세력확장에만 신경써 농민들만 고통받았다.

이때 즉위한 얼베르트1세는 귀족들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일반 귀족들에게도 참정권을 주었다.

트란실바니아 지역의 군사 지도자였던 후녀니 야노시에세

오스만 튀르크의 침공에 대비한 방어를 맡기기도 했다.

야노시는 천부적인 군사재능과 높은 수준의 교육으로

오스만 전투에서 승리하여 외부 도움없이 1456년벨그라드 전투에서

승리해 오스만의 유럽 침략을 70년간 중단시켰다.

이러 왕위에 오른 마챠시1세는 헝가리를 중심으로 다뉴브강 유역의

민족을 통합하여 다누브제국 건설의 꿈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관료선발계층다양화를 통한 왕권 강화를 실시하고

모라비아 슐레지아 지역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르레상스 문화가 전개되고 대학과 도서관이 설립되고

타 민족과 동화와 편입을 이끌어'정의의 마챠시1세'로 불린다.

관료들과 귀족들에게 지급한 토지는 귀족들 토지 소유층 형성을 가속화 시켰고

이는 그의 사후에 그가 이룩한 모든 기반이 파괴되는 결과를 낳았다.

귀족의 탐욕은 일반 농민들에게 미쳐 농민들 생활은 어렵게 되고 1514년

도저 죄르지를 지도자로 삼아 봉기를 일으켰다.

군사 경험으로 실패로 끝나고 그들 모든 권리와 자유를 귀족에게 박탈당해 농노의

신분으로 전략하고 말았다.

계속되는 오스만튀르크의 침략은 왕국내 귀족들 세력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헝가리 왕국에게는 상당히 부담스러운것이다.

마침 즉위한 오스만 튀르크의 슐레이만1세는 유럽 정복을 위해

헝가리 왕국에 대한 대대적 침략을 감행해 1526년의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 왕궁은 2시간만에 참패하고 만다.

모하치 패전은 헝가리 입장에서 역사의 연속서이 깨어짐과 동시에

400년간 시련의 역사의 시작이고'유럽 역사에서는

이스람세력의 유럽 침공의 시작이었다.

중세 헝가리 왕국에서는 마챠시 성당 버이더후녀드 성등의

고딕 양식의 건축물이 많이 지어졌다,

더불어 알프스산맥 북쪽최초의 르네상스 문화가 나타나며

인쇄소가 설치되고 훈족과 헝가리인을

대등하게 비교한 역사 기록이 간행되기도 한다.

 

 

15세기에 남쪽 국경에서 오스만 제국이라는 막강한 적대 세력이 나타났다.

마차시1세(1458-1490)는 이들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으나 그의 후계자였던

울라슬로2세(1490-1516)는 나라를 보호할만할 경제적 군사적 배경을 갖추지 못했다

울라슬로2세와 마찬가지로 선하지만 강단이 없었던 그의 아들 러요시2세(1516-1526)

는 가까스로 주변국의 도움을 받는데 성공했다.

우방국인 합스부르크 왕조는 이순간 교황청 프랑스 오스만 제국에 이르는 많은

적대국들과 마주해야 했다

1526년 오스만 제국에서 가장 카리스마 넘쳤던 슐레이만1세는 부더로 행진했다

같은해 8월29일 모하치에서 헝가리보다 압도적으로 많았던 그의 군대는 90분만에

헝가리 저항을 물리쳤다.

러요시2세는 전장에서 도망쳐 도나우강 근처에서 죽었고 중세 헝가리 왕국은 붕괴되었다.

모하치 전투이후 헝가리 왕을 이을 후계자가 없었다.

헝가리 영주들 몇몇은 신성롬재국홍제의 동생인 페르디난트1세(1526-1564)를 지지했고

일부는 부유한 영주중 ㅎ나인 서포여이 야노시(1526-1514)를 지지했다.

두 경쟁자는 15년건 헝가리 왕국의 왕위를 두고 싸웠다.

슐레이만 1세가 서포요이 야노시를 지지하자 복잡해지고 1529년 슐레이만1세는 군대를 이끌고

빈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빈을 이스탑불과 멀고 슐레이만 군대가 도착했을때는 이미 그해에 전쟁을 치르기에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서포여이 야노시가 사망한 1541년 이후 헝가리 중부만을 통치 하게 되었다.

중세 헝가리 영토는 세부분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오스만제국은 헝가리 중부를 통치했고 자치권이 비교적 많이 보장된 동부는

트란실바니아 공국이 되었으며 페르디난트 1세는 헝가리 북서부를

어떤 방해도 받지 안고 차지할수 있게 되었는데

바로 이곳이 소위 로열 헝가리라고 불리는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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