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역사 2

2013. 12. 7. 15:45참고

 

3.합스부르크 재국의 통치와 트란실바니아 공국

 

헝가리 왕국의 고위 귀족들은 모하치 패전이후 ㅅ로 자기편에 유리한 인물을 와으로

세우기 위해 또 다시 내전을 했다.

외부 왕국과 혈연관계가 있는 인물물이 왕이 되기 바랐던 귀족들은

두편으로 나뉘어 서포여이 야노시와 페르디난트 1세를 와ㅇ으로 세우려고 대립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스만 튀르크는 침공을 감행했고 합스부르크왕궁의 빈 침공을 위한 진출로를

확보해 두려는 계산하에 중부 헝가리를 점령하면서 페르디난트 1세와 서포여이가 세력권으로

삼고있던 지역들을 가로 막아 헝가리 왕국을 셋으로 분할되게 하였다

헝가리 삼분상태는 150년간 지속었고 헝가리 민죽은 많은 고난을 겪었다.

수많은 전쟁현장이 되었으며 국가 발전의 맥이 끊겼다.

오스만튀르크가 점령한 중부 헝가리은 많아 거의 초토와 되었다.

또한 터키식 욕탕과 회교사원들이 세워지며 동양적 외양이 나타나기도 했다.

150년간 오스만튀르크가 지배했음에도 헝가리와 헝가리인에 대한 인식이 사라지지않았다는 사실이

이지역에 헝가리적 정체성을 유지할수 있었던 이유였다.

서부 북부 헝가리에 자리잡은 헝가리 왕국은 합스부르크왕국의 세력권하에 있었는데

포조니를 임시 수도로 삼고 기존 제도를 그대로 유지 했다.

헝가리 왕국과 오스만 튀르크의 접경지역에 거주하는 농민들에게는 이중 과세가 부과되어

이지역 농민들은 세습농노의 신분으로 전략하게 되었다.

헝가리 동부 지역을 차지하게 된 트란실바니아 공국은 헝가리인 세게인 독일인

3게의 민족이 상호간 연합체제적인 성격을 가지고 공존하고 있었다.

4개의 기독교 종교인 카톨릭교 루터교 칼뱅교 유니테리어언교가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활동할수 있도록 보장받았다.

인종 언어 종교적 다양한 색체를 지닌 트란실바니아 공국이 배우 폭넓은 관용성으로

사회 구성원들과 조화를 이루어 나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트란실바니아 군주였던 바토리 이슈트반은 합스부르크의 침공을 막아냈을 뿐아니라

이들에 대한 저항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과정에서 소몰이꾼 출신의 무장 조직체인 허이두들을 대주고 잘활용하여 그들이

헝가리 역사에서 중요한 역활을 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모하치 패전이후에도 헝가리 문화 발전은 중단되지 않았다

휴머니즘과 르네상스와 더불어 종교개혁이 펼쳐져 성경이 발행되기도 했다.

이시기에 국가의 힘이 약해져 카톨릭이 붕과되고 신교중 칼빙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트란실바니아 공국의 군주가 된 베틀렌 가보르는 탁월한 외교적 능력과 결단력으로

오스만 튀르크군을 철수시키고 귀족 세력의 반발을 잠재워 강력한 중앙집권을 이루어냈다.

중상주의를 도입하고 교육 유학을 장려하며 종교문제도 관용적이었다.

셋으로 분리된 헝가리를 제통일 하려했지만 일찍 사망하여 꿈을 이루지 못했다.하지만

그의 치적을 통해 트란실바니아 공국은 유럽에서 인정받는 독립군주국으로 변모하고

베틀렌가보르 사후에는 강력한 군주가 나타나지 않고 트한실바니아 공국은 결국 합스부르크의

수수방관속에 오스만튀르크의 속국이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대 최고의 정치,전술가이자 작가인 즈리니 미클로시가 헝가리의 독자적인 투쟁을 통한

오스만 튀르크의 축출을 목표로 등장하게 되었다.

많은 전투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지만 합스부르크의 방해로 그의 도전은 실패로 끝난다.

이후에 합스부르크적 투쟁들은 합스부르크가 헝가리의 자율권을 완전히 박탈하려는

계획을 실천하게 한다.1686년 헝가리는 합스부르크에 의한 오스만 튀르크의 지배를 벗어나지만

귀족들의 권리를 포기하고 왕위 계승이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세습되는 등 헌법개정안 또한 발표된다.

헝가리는 재통일 되었고 유럽의 역사에 다시 편입되었다.

17세기에 영구 농노제가 고착디었고 당시 헝가리 귀족계층비율은 유럽에서도 높은 편에 속해

귀족은 신분을 세습하고 고위 공직을 독점했다.

헝가리 왕국은 합스부르크제국에 속해있었기 때문에 문화적 중심지는 트란실바니아공국이고

대내외적으로 절망적 상황속에서 작가,정치가,사상가,성직자들은 헝가리 문화부흥을 위해

교육에 힘썼다.헝가리 문화는 바로크문화가 유행했고

트란실 바니아 공구에서는 후기 르네상스 양식이 유행했다.

오스만튀르크에 의한 국토의 3분상태는 헝가리인들의 민족적 일체감과 사회구조를

크게 변화시켰지만 헝가리 민족 국가에 대한 이상이 완전히 사라진것은 아니었다.

계속되는 합스부르크의 탄압속에서 라코치2세는 독립을 위한 투쟁을 시작하였고

이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어느정도 독립을 유지하는데 발판이 되었다.

이후 합스부르크와 헝가리왕국이 더 이상 마찰을 일으키지않으려고 귀족들에게

봉건적 특권을 유지시켜주며 친합스부르크화 시켰다.이로 인해 90년동안

전란이 일어나지 않아 왕국의 인구는 크게 늘었고 농업생산이 크게 증가했다.

이러한 인구증가는 합스부르크가 헝가리적 요소 약화정잭으로 주변 민족의유입을 추진하면서

발생한 측면도 있다.

이로 인해 헝가리 민족은 다민족 국가로 바뀌었고

향후 민족문제의 시발점이 된 사건이 되기도 한다.

이시기에 트란시바니아 지역은 농업생산의 정체와 인구과밀

교통망 낙후등으로 지속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후 즉위한 마리아테레지아는 계몽주으 정신을 포함한 중앙집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노력의 일환으로 귀족 권력축소 농민및 농노 구제 로마 카톨릭 중심의 정책

교육제도 확립이 이루어졌다.

그의 사후 즉위한 요제프2세 도한 계몽주의를 바탕으로한 통치를 이어간다.

요제트2세는 종교 정책과 함께 교호의 권한을 축소시켰고

농노를 보호하였다.

또한 독일어 칙령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민족언어인 헝가리어와 이를 바탕으로

한 민족의 전통을 되살리자는 조루가 확산되는데 기여했다.

18세기에도 지금까지 그랬듯이 교회가 문화와 교육을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18세기 후반부터는 계몽주의가 대두되어 그 흐름이 바뀌어나갔다.

이에 심취한 작가들의 활동을 계기로 헝가리어 교육과 개혁에

대한 움직임이 나타났고'이는 언어 개혁으로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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