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2. 18. 21:49ㆍ참고
4,합스부르크 제국의 통치와 독립투쟁
새롭게 합스부르크의 왕으로 즉위한 리포트2세는 개혁주의자로써
헝가리 귀족들을 안심시키는 척 하며 뒤로는 사회 여러 계층 의식을 성장시키려고 했다.
뒤이어 즉위한 페렌츠 1세는 계몽주의에 입각한 보수적인 인물로써
강압적 통치를 통해 합스부르크 내적갈등 요인들을 봉합하려 했다
리포트1세의 개혁주의 통치에 희망을 가지고 있던 헝가리의 지식인들은
피렌츠1세의 강압 통치에 실망하고 머르티노비츠 이그나츠를 중심으로 비밀 결사외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헝가리의 독립성과 자주성의 재획득을 목표로 하는 이조직은 그러나 합스부르크 정부에 의해
진압되었고 시대는 헝가리 전체를 공포에 몰아넣기 위해 참혹하게 처벌되었다.
19세기 헝가리의 개혁시대는 이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뒤이어 발생한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계몽사상을 바탕으로 봉건사회로부터
탈피해 시민사회로 전환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헝가리에서도 일어나게 된다.
나폴레옹전쟁 말기에는 빈 왕실이 헝가리 귀족의회를 무시하는 움직임이 보이자
헝가리 내부에서는 강력한 불만과 저항이 확대되었고
결국 합스부르크는 헝가리 의회를 다시 인정하고 소집하게 된다.
1825년 이 사건은 개혁 운동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렇게 소집된 의회에서는
국가개혁의 새로운 시작을위해 헝가리 학술원 설립이 결정되었다.
이는 헝가리 왕국의 공작으로서 진보적인 사고를 지녔던 세체니 이슈튜반에 의해
실행되었는데 그는 이분만 아니라 경제제도와 사회구조를 개혁하기 위해 노력하고
선박회사 제분소 란츠교등을 건설하였다.
개혁과정에서 온건적인 태도를 지향했던 세체니의 제안에서 나아가 헝가리 왕국의
전체적인 통치권을 자신들이 행사할수있도록 하자는 움직임이 일었고 코슈트 러요시가 주도 하였다.코슈트 러요시는 야권주자 선두로 봉건제를 약화시키고 헝가리어를 공식어로 지정하였으며
이를 통한 절대주의타파를 목적으로 하였다.
19세기 전반기에 문화적 사건은 언어개혁이다.
독일어칙령에 반발한 헝가리인들은 민족의 존속을 위해 민족언어의 부활에 논의했고
결국 새로운 어휘의 추가와 세련미를 더한 언어개혁을 실시하게 된다.
또한 여러 교육제도로 문맹자가 감소하고 연극이 대중화 되었다.
커토너 요제프의'반크 반'은오늘날까지 헝가리 드라마의 주요한 작품으로 간주한다.
헝가리 최초 옾라가 발표되기도 하였는데 이것들은 정치 사회적으로 시민사회로의 전환을 목적으로
한 토쟁을 성공적으로 이끈 대중적 기반이 되었다.
헝가리인들은 비 헝가리계 주민들에 대해 가지는 공포감에 의해
왕국 내제 민족은 헝가리에 동화시키려는 노력을 하였다.
지식인들은 민족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중요한 과제는 민족 언어형성이라는것은 깨닫고
이를 우선적으로 실행하였다.
이로 인해 민족 언어를 사용항 과거 역사를 다룬 문학작품이 쓰여졌고
민족 문화의 뼈대가 성립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헝가리 시민혁명 이전까지는 문화적 성격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국민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농노와 농민들의 지지를 필요로 하는 헝가리의 개혁주의자들은
1848년 전 유럽을 휩쓴 자유와 민주준의 혁명을 맞이하게 되었고
1848년3월15일 코슈트 러요시와 페퇴피 샹도로를 중심으로 혁명을 일으켜
독립과 자주성을 위한 여러사항을 요구했다.
합법적 과정을 통해 평화적으로 목적을 달성한 헝가리 시민혁명은 400년간 지속되어 온
봉건질서를 종식시키고 단숨에 시민사회로으 전환을 가져오게 하여
헝가리 역사상 가장 커다란 전기를 마련한것이었다.
혁명 후 헝가링에서는 귀족과 농민들과 갈등 민족 문제등이 다시 걸림돌로 작용하며
반혁명적 움직임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합스부르크는 헝가리 독립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견지 하였고
결국 헝가리와 합스부르크간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승리와 패배를 반복하던 전쟁에서 헝가리는 내부갈등과 러시아군의 참전으로 패배하게 되고
독립전쟁은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혁명과 독립 전쟁을 이끌어낸 성과들은 헝가리 사회에서 봉건징서가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했고
시민 사회로의 발전 역시 가로 막지 않았다.
헝가리 시민 혁명과 독립전쟁이 제압됨으로 헝가리 왕국은 합스부르크 군대에 의해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된다.
합스부르크의 철저한 보복으로 인해 두 민족의 갈등의 골이 깊어졌고
당시 합스부르크는 제국 내 전지역에 대해 민족적 다양성을 무시한 통일을 추진하였다.
합스부르크는 서유럽과의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헝가리를 재대로 통치할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코슈트에 의해 조직된 헝가리군은 이탈리아와 연합해 합스부르크와의 전쟁을 준비한다.
이에 합스부르크는 '10월교서'를 통해 위기를 벗어나려했고 헝가리는 이를 계속 거부하였지만
외부의 도움을 받을수 없는 국제 정세의 변화를 감안하여 다시 때를 기다리게 된다.
이후 코슈트는 다뉴브 연방 국가안을 제시하며 다시 한번 움직였지만 이는 실현가능성이
매우 부족한 것으로 판명되었고 이와 더불어 헝가리가 독일의 동방진출과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에 따른 팽창 정책의 틈에 끼어 국가와 민족의 자주성을 완전히 상실하는 것보다는 합스부르크와 타협하여
하나의 입헌군주국을 세우자는 입장이 데아크를 비롯한 지도층들의 공통된 의견으로 나타나게 된다.
마침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합스부르크의 위력이 약해지자 이들도
헝가리와 타협해야만 하는 필요성이 생기게 되었고 1867년6월12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탄생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