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 5. 11:58ㆍ영화
감독-이석훈
출연-황정민(엄홍길) 정우(박무택) 조성하(이동규) 김인권(박정복) 라미란(조명애) 김원해(김무영)등
세계의 지붕,지구의 등뼈라 불리는 히말라야에서 펼쳐진 감동 실화는
2013년 케이블티비에 출연한 엄홍길로 영화화 될것임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히말라야는 8848m의 에베레스트를 비롯한 8000m봉우리들이 14개가 모여있는 산맥이다
고대 인도어인 산스크리트어로 눈을 뜻하는 hima와 거처를 뜻하는alaya의 합성어로
'눈이 사는곳'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사람의 영역이라기보다는 신의 영역인 높은 산이다
18세기부터 히말라야를 향한 탐험가들의 도전이 시작되고
인도 측량국장 앤드루워가 19세기중반 히말라야 산맥을 측량한뒤
세계최고 높이의 산임을 입증했다
세계2차대전이 끝나고 네팔이 문호를 개방하자 산악인의 히말라야 등반을
본격적으로 맞게된다
영화는 엄홍길이 박무택과 박정복을 구조하러 가면서 시작된다
엄홍길은 1985년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등정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1988년 다시 도전하여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다.
한국인은 고 고상돈에 이어 두번째다
그뒤 13년만에 히말라야 8천미터급 14좌에 완등했고 2004년 5월 14좌에 속하지 않는
얄룽캉과 로체샤르까지 완등하여 세계최초 16좌 완등으로 산악인의 전설로 통한다
엄대장과 박무택은 박무택이 대학 등반팀에 있던 시절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엄대장(황정민)의 말을 듣지않고 동료의 시신을 구조헬기에 태우려 고집을 부리다
사망할뻔했던 박무택(정우)과 박정복(김인권)에게
"너희들 다시는 산 타지마, 내 눈에 걸리면 죽는다."고 경고한다
그런뒤 칸첸중가 등반팀을 꾸리던중에 둘은 지원하게 된다
하지만 엄대장은 단칼에 거절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발만으로 오르는 등산과 달리 등반은 등산보다는 좁은개념으로
손을 쓰지 않고는 오를수없는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방법을 동원해야
오를수 있는것이다.
대구출신 두사람은 엄대장집 마당에 텐트르 쳐놓고 아이들과 아내를 이미
한편으로 만들었다
엄대장은 무작정 찾아온 둘에게 입단 테스트를 하는데
북한산에서 무거운 짐에 스노클까지 씌우고 백운 산장까지 올라오게 하고
내려갈땐 쓰레기를 잔뜩 짊어지고 내려오는 테스트를 시킨다
뜨거운 사우나까지 체력과 정신력을 테스트 한뒤
가까스로 대원으로 합류시킨다.
드디어 대원들과 고대하던 칸첸중가 등반에 나섰다
쨍 하고 빛나던 날씨가 산에서는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르는일
갑작스런 기상악화로 정상에 오르는것이 불가능해지자 포기하려던 참에
따라 올라가겠다는 박무택을 데리고 엄대장은 절벽에서 비박하며 하룻밤을 보낸다
추위와 어둠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살아남은 둘은 하늘을 바라본다
새벽의빛이라는 오로라와 새벽 여명의 해가 히말라야 구름바다와 깊은 산을 뚫고 나오는
찬란한 모습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영상으로 기억된다
비박이란 텐트를 사용하지 않고 지형지물을 이용해 하룻밤을 지새는것으로
산이 침대이고 바위가 베개인셈이다.
실제 엄홍길과 박무택은 2000년 칸첸중가 정상100미터지점은 앞두고
8500미터 절벽에 매달려10시간 밤을 지새웠다
영화에서도 절벽비박을 했는데 설벽으로 변신한 채석장 절벽이었단다
그리고 마침내 칸첸중가 정상에 도착한다
"여기는 정상 더이상 오를곳이 없다."
둘은 태극기를 휘날리며 인증샷을 찍는다
칸첸중가 등반이후 둘은 히말라야 케이투 시샤팡마 에베레스트 정상을 오르며 경력을 쌓고
무택은 대학 후배와 결혼도 하고 홍길의 뒤를 잇는 산악인으로 거듭난다
실제 엄홍길과 박무택은 히말라야 4좌를 등반하며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이자
형제와도 같은 우애를 나누는 관계였다고 한다
시간은 흘러 무택은 리틀 엄홍길이 되어 신입대원 훈련중에 홍길이 쓰던
체력단련과 말투까지 똑같다
홍길이 발 부상으로 더 이상 산에 오르지 못하자 은퇴를 선언하고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등반용 도끼인 피켈을 무택에게 선물한다
함께 14좌를 등정하기로 했던 무택은 누구보다 홍길의 은퇴를 안타깝게 여겼지만
대학에 돌아와 교수가 되어 강의와 집필을 하며 살아가게 된다
실제는 2005년 휴먼원정대와 2007년 로체샤르까지 16좌등정을 마치고 은퇴하여
영화와는 다르다
어느덧 무택은 대장이 되어 학교 후배들과 에베레스트 등반에 나섰다
하산하던중에 데스존에서 목숨을 걸고 후배를 구하던중에 설맹이 오고 만다
데스존이란 8천미터이상 고도 지점으로 기압이 낮아 대기중 산소량이 삼분의일로 줄어들고
급강하는 기온으로 공기에 노출된 신체 부위가 동상이 발생하는 곳이다
설맹이란 좌외선의 반사때문에 생기는 눈의 염증인 결막염으로 앞이 안보이는 현상으로
정상에서 기념촬영시 고글을 벗으면 큰일인데 영화에서는 고글을 벗었다
무택은 앞이 보이지 않자 한발짝도 나갈수 없어 후배를 먼저 내려보낸후 구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베이스켐프에서는 기상악화와 어두워지는 상황에서 아무도 구조에 나서지 않는다
"사람이 있고 산이 있어야지 사람이 없고 산이 있으면 뭘하냐."고 나선이는
박정복(김인권)이다
어둠을 뚫고 홀로 에베레스트 데스존으로 향한다
동이틀 무렵에야 조난당한 무택을 찾는다
"야 이새끼 왜여기 이러고 있냐 너무 딱딱해"라며 오열할때 뭉클했다
이미 무택은 동상에 걸려 움직일수가 없어 그자리에 잠들고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채
정복도 실종되고 먼저 보낸 후배도 모두 히말라야 산이 되고 만다
뉴스에 나오는 사고 소식을 접고 홍길은 죄책감과 미안함에 잠 못 이루고
무택을 잊지 못한다
결국 세계 최초 죽은 동료의 시신 수습을 위한 휴먼 원정대가 만들어지게 된다
홍길은 뿔뿔히 헤어져 생업에 뛰어든 대원들을 설득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중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일하는 조명애(라미란)은 엄대장의 무택에 대한 무조건 신임으로
차별과 질투를 느꼈다고 고백한다
얼마후 쉽지않은 결정으로 모두 모인 휴먼 원정대는 꾸려지고 한국을 떠나
히말라야 산중턱에 머물며 일주일 넘게 폭설과 강풍속에서 겨우 시신을 찾는다
하지만 대원들의 체력은 고갈되고 시신이 무거워 함께 하산하기란 불가능하다
산쟁이들 사이에서는 그런 경우 부부간이래도 두고 내려오는것을 당연하게 여긴단다
베이스캠프에서 남편을 기다리던 무택 아내의 힘든 결정으로
햇볕 잘 드는 양지바른곳에 돌무덤을 세워주고 그들의 미션은 끝났다
영화는 거의 사실과 다를바가 없는데
2005년3월14일부터 5월31일사이의 휴먼원정대는 산악역사상 처음있는일로
방송으로 보도 되었다.
2004년 4월 박무택 백준호 장민대원 세명은 엄홍길과 한국에서 준비한후
네팔에서 헤어져 에베레스트로 향했고 엄홍길은 얄룽캉이라는 15좌등정을 하기위해
서로 흩어졌다
세명은 8천미터급 캠프에 도착하여 과일통조림으로 마지막 식사를 한다
2004년5월18일 오전10시10분 8850m 정상에 무택이 먼저 오르고 이어 장민이 올랐다
등정후 하산길에 에베레스트 북동면에서도 가장 험난한 암벽구간인 세컨드 스텝에서
탈진한 대학생인 장민을 부축해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세컨드스텝이란 에베레스트 꼭대기 부근의 세개의 거대 암벽을 부르는 말로
퍼스트 세컨드 써드스텝으로 8500,8600 8750미터에 있다
설상가상 무택은 설맹이 와 후배를 먼저 내려보내는 결단을 한다
박무택 대장은 움직이는걸 포기하고 비박에 들어간다는 무전을 산아래
전진캠프에 날린다
산소계기판은 영을 가리키고 숨을 못쉬겠다는 무전을 끝으로 연락이 두절된다
하산길의 장민도 연락이 끊긴다
전진캠프 배해동 원정대장은 두사람을 구하기 위해 외국 원정대에
구조를 동참해줄것을 호소하여 이탈리아 원정대와 셀파 두명이
사고지점에 급파 되지만 실제 현장에 도착한 사람을
아무도 없었다
해발8750미터에서 설맹과 싸우고 있는 박무택 대장에게
마지막캠프에 도착한 백준호는 지친몸을 이끌며 산소통을 들고 무
모한 구조에 나섰다
그러나 준호와의 무전도 끊긴채 10시간이 흐른다
새벽6시 준호는 무택과 조우했지만 무택은 돌이킬수 없을만큼 심각한 상태로
하산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렇게 박무택은 잠들어갔고 백준호 역시 체력이 떨어져 구조가 어렵다는 말을 남기고
연락이 두절되었다
얄룽캉 등정후 먼저 귀국해 무택 일행의 등정소식을 전해듣고 소식을 들은지 한두시간뒤에
비보를 들었다
그 소식을 들은 엄홍길은 충격에 빠졌다
정상으로 가는 길목에 매달려있어 등정할때마다 지나치게 되는데
내가 아니면 누가 해결할수 있는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휴먼원정대를 꾸리게 된다
히말라야에서 시신을 수습해 내려온다는것은 전례가 없는 불가능에 가까운일이고
원정비용도 문제여서 언론을 통해 휴먼 원정대의 계획을 발표하고 도움을 요청한다
우여곡절끝에 18명의 원정대원이 선발되고 그들은 팔공산과 한라산에서 등반훈련을 마치고
박무택 백준호 장민의 집에 들로 그들에게 가져다줄 편지와 물건을 챙겼다
드디어 2005년 3월14일 인천공항을 출발하였다
시신 원정에 나서는날 엄홍길 대장은 목감기와 허리통증으로 몸이 안좋았다
기상악화로 전진캠프에서 5월19일 박무택 사망일주기가 지나갔다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은 다른팀들이 무택의 시신을 발견하였다고
무전으로 알려왔다
원정70일째인 5월23일 오월이 넘으면 몬순기라 등반이 불가능하기에
주어진 마지막 기회여서 8300미터 캠프에 도착하여 마지막 출정식
라마제단에 향을 피워 신의 영역 입성을 허락해달라고 비는 주문을 올렸다
드디어 5월29일 세컨드 스텝밑의 박무택시신을 발견하고
얼어붙은 몸을 빙벽에서 분리시켜 하산하려했으나
운구장비에 시신을 들어가지 않고 백미터 이동도 두시간이 넘게 걸렸다
무택의 시신을 옮기는 도중 또 다른 시신이 발견되고
산에 올랐다 그대로 산이 되어진 사람이 도처에 있었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고 더이상 내려올수 없게 되자
네팔쪽하고 동쪽이 보이는 능선상에 돌무덤을 만들어 주고 원정대는
내려온다
백준호와 장민의 유품을 불에태워 영혼과 함께 날리고
세명은 세계의 어머니의 여신이라 불리는 초모랑마 정상 아래
편안히 잠들었다.
고인이 된 박무택과 14좌등정 약속을 지켜 엄홍길과 더불어 조명애가 산에 오르며
영화는 끝이 나지만 휴먼 원정대도 고산병으로 사망하는 신의 영역인 히말라야는
잠시 허락하면 머물다 내려오는것뿐이라고 엄대장은 말한다
실제로 그가 16좌를 완등하는 도전과 기록갱신이라는 영광뒤에는
10여명의 등반대원과 원주민 샐파등의 목숨을 잃은 희생이 있었다.
실제 원정대를 방불케하는 영화제작으로 산악전문가와 함께
도봉산 등산학교에서 안전벨트 차는법 하강하는법 암벽훈련등
사전훈련을 한뒤 네팔 히말라야 3800미터급까지 스텝 전원이
등반하여 촬영했고 프랑스 몽블랑 빙하지대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고산병으로 고생하면서 현지 로케이션 촬영으로 생생한 현장감과
산악인들의 동료애와 의리가 전해졌다
배우 스텝 모두 촬영이 끝날때 즈음에는 준 산악인으로 거듭났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산에 왜 오르냐고 묻자 "산이 거기 있으니까."라고 대답한 에베레스트 첫등반가이자
에베레스트 신화가된 영국의 조지 리 맬러리의 우문현답은 이미 유명한 말이 되었다
"원정대의 가슴 뜨거운 도전으로 사람과 사람사이의 순수한 우정과 의리를 진정성있게
그리고 싶었다"는 감독의 요구대로 영화는 시원한 감동을 주었다
신이 인간에게 내린 축복이자 불행이 되는 히말라야는 산악인들의 영원한
선망의 대상이다
히말라야의 새----------------류시화
한 낮의 태양이 매서운 눈처럼 쏘아 보는곳
원주민들이 히말라야 새라고 부르는 붉은머리 독수리는
천천히 만년설을 향해 날아갔다
태양도 눈을 녹이지 못하는 그곳
까마귀들은 더 이상 그를 추적할수 없었다
나 역시 그 흰눈에 눈이 부셔
그곳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을수가 없었다
2016년 1월 씀
글-이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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