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9. 1. 15:30ㆍ영화
감독-허진호
출연-손예진(덕혜) 박해일(김장한) 윤제문(한택수) 라미란(복순) 정상훈(복동)
박주미(양귀인) 박수영(영친왕)안내상(김황진) 정세형(이건)고수(이우)등
조선의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를 그린 영화는
2009년 초판 발행된 권비영 소설 '덕혜옹주'가 원작이다
지나치게 영민한것, 품어서는 안 될 그리움을 품은것, 조선 마지막 황제의 딸로 태어난것
그녀의 죄가 있다면 세가지가 있는 황녀의 삶을 책을 쓰지 않고는 견딜수없는
이야기였다고 작가는 전했다
1907년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1905년 일어난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기 위한
"일본의 불법행위를 각국 위원에게 알리고자 하니 세계가 모두 대한 제국의 고난을 알고
공법에 의거하여 공의로써 다시 대한제국의 국권을 찾을수 있도록 도와달라."는고종의 친서를 들고
이준 이상설 이위종 특사는 비밀리에 파견 되었다
하지만 프랑스 만국평화의의 입장이 거부 되고 울분을 참지못한 이준은 7월4일 할복 자살했다
고종의 마지막 외교는 여기까지였다
헤이그 특사이후 일제는 더욱 압박하고 통감 이토히로부미는 고종에게 특사파견의 책임을 추궁하여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등극시켰다
1918년 국내에서도 독립기운이 활발해지자 독립운동가 이회영은 오세창 한용운 이상재등과
고종의 망명을 계획한다
고종의 승낙을 얻은뒤 종국 망명을 도모하지만
1919년1월21일 묘시에 식혜를 마신 68세 고종은 삼십분도 안되어 경련과 함께 사망했다
독살했다는 의혹과 이후 3.1운동의 촉발제가 되었다.
고종은 9남4녀의 자녀가 있었지만 순종 영친왕 의친왕 덕혜옹주 사명만이
성년이 될때까지 생존했다
영화로 돌아가
6살 어린나이의 옹주는 눈앞에서 아버지를 잃고 만다
13살이된 1925년 일본국의 고문인 친일파 한택수(윤제문)는
대한제국백성들의 내선일체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조선 왕가의 존립을 볼모삼아 옹주를 일본으로 강제 유학보내기에 이른다
한택수는 왕실의 관한 업무를 관장하는 이왕직 장관을 지낸 한창수를 표현했다
명령을 거역할시 어머니를 시해하겠다는 협박으로 끌려가다시피 떠난 유학길이라
항상 고국의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지냈다
역사적 사실은
옹주는 고종이 회갑년인 1912년 5월25일 푸른 오월에 고종과 임금의 수라를 만드는
소주방 나인 출신인 복녕당 양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907년 강제 퇴위를 당한후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고종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옹주가 순종실록에 따르면 덕혜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받은건 1921년 5월4일이다
이전에는 복녕당 아기씨로 불렸다
1925년 이왕직차관은 순종에게 누이 옹주의 일본 유학을 통보한다
한국인들에게 고종을 상기 시켜주는 문제의 황녀를 그대로 놓아둘수 없었던 것이다
떠밀리듯 경성을 떠난 옹주는 도쿄에 도착했고 이방자 여사가 마중나와 말을 걸었지만
대꾸도 하지 않았다
옹주는 늘 끓인물을 담은 보온병을 들고 다녔다
1926년 옹주는 영친왕과 함께 와병중이던 순종을 알현하고 도쿄로 돌아갔다가
순종이 승하하고 귀국하여 인산에 참석하지 못하고 도쿄로 돌아가야 했다
일본 생활 5년째 어머니 귀인 양씨가 유벙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비보를 듣고 귀국했지만 일제는 귀인 양씨가 귀족에 포함되지 않으므로 왕족인 덕혜옹주가
복상할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장례 이틀뒤에 일본으로 돌려보냈다
이로 인한 정신적 충격으로 하루종일 방안에 누워있고 식사를 거르고 밤에 뛰쳐나가 무작정 걸어다니는
정신분열증이 시작된다
1931년 5월 일본은 쓰시마의 도주인 24살의 백작 소 다케유키와 옹주를 결혼시킴으로
한국인들의 기억에서 그녀의 존재를 지워버리고자 했다
다음해에 딸을 낳았다
1945년 그후 태평양 전쟁의 패전으로 일본이 항복선언을 하고 이제 고국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데
자신을 유학시켰던 친일파들은 유유히 돌아가는 마당에 왕정복고를 두려워한 이승만 정부로부터
왕족의 입국을 거부당하고 절망감과 좌절로 옹주는 점점 미쳐간다
왕족의 특권을 포기하고 평민이 된다는 결정에 따라 면세 특권이 박탈당해 소 다케유키도 백작 작위와
재상상 특권을 잃고 덕혜옹주에 대한 지원도 끊겼다
비록 정략결혼이었지만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해 옹주를 아꼈다던 남편은
그녀를 1946년 마쓰자와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그리고 소 다케유키는 영친와 부부와 협의한 끝에 옹주와 이혼하고
어머니 성씨를 따서 양덕혜로 호적에 등재된다.
한편 1950년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으로 부임한 김을한 기자는 소 다케유키에게 전화걸어
덕혜옹주 근황을 물었지만 입원중이라는 냉담한 답변만 듣고 영친왕을 만나고 나서야
옹주가 일만원에 달하는 비싼 입원비를 내고 정신병원에 갇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김을한 기자는 정부 요인들을 찾아 옹주를 조국으로 돌아오게 해달라고 간청했지만
정부는 신경쓰지 않했다
김을한이 쓴 '인간 영친왕'에서 자기의 동생 김장한이 덕혜옹주의 약혼자로 내정 되었었다고
주장했다
1956년 8월 마이니치 신문에는 또 하나의 옹주의 비보가 게재된다
당시 24세였던 옹주의 딸 소 마사에가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가출했다는 소식이다
수색에 나섰지만 영영 발견되지 않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과 자유당정권의 종말을 고하고 1961년 5.16정변으로 박정희 소장이
정권을 잡았다
그해 11월 미국 방문길에 오른 국가 재건최고의 의장격인 박정희가 도쿄에 들렀을때
김을한 기자가 박정희을 찾아 옹주의 귀국을 간청했고 영친왕비인 이방자 여사와 만나
영친왕과 덕혜옹주의 귀국에 대한 협조를 약속했다
1962년 1월26일 마침내 51세인 덕혜옹주는 38년동안 원치 않았던 일본 생활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녀를 실은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착륙하자 소학교 동창인 민용아와 당시 72세였던 유모 변복동이
눈물을 흘리며 맞이했다
창덕궁 낙전재에서 순정효황후 윤씨를 만난 다음 서울대 병원에 입원했다
그해 2월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하고 이덕혜라는 이름을 되찾고
칠년간의 입원치료끝에 퇴원하여 낙선재로 들어갔다
1968년 전 남편인 소 다케유키가 낙선재로 찾아왔지만 만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1989년 4월21일 벚꽃잎이 날리던 날 창덕궁 수강제에서 77세 나이에 세상을 떴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한장의 낙서가 남아 있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
어머니와 고국을 그리워하며 쓸쓸히 지내던 옹주앞에 어느날 일본 군인이 된 장한이 나타난다
장한(박해일)은 일본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이왕족의 감시하는 임무를 가졌으나
사실은 독립운동에 적극가담하고 옹주를 지키는 호위무사가 된다
장한은 후일 옹주를 귀국 시키는것에 공을 세운 그의 형인 김을한 기자와
고종이 옹주의 배우감으로 내정 했었던 김장한의 두 실존인물을 합친 하나의 인물이다
옹주곁에는 또 하나의 여인이 있었다
시종인 복순(라미란)은 그녀의 영원한 친구이자 마지막 말동무였다
기모노를 바꾸어 입고도 당당했던 우리의 황녀역을 연기한 배우는 손예진이다
한택수는 일본으로 강제 징용된 조선 노동자 앞에서 천왕폐하를 위하는 일이라며 연설을 시키자
옹주는 처음에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장한은 동포들의 자긍심이자 마지막 한줄기 희망인 옹주님이 절대 말을 하면 안된다고 설득하지만
위독한 어머니 소식을 전해들은 옹주 마음이 흔들리다 연단에 선다
연설도중 남루하고 겁에 질린 동포들의 얼굴과 손이 다친 어린 아이들을 보는 순간 옹주는 한국말로
"저는 조선의 옹주 이 덕혜입니다
동포 여러분 우리에게는 돌아갈 고국이 있습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옵니다"라고 말한다
강제로 끌려온 동포들의 사기가 올라가자 화가 치밀어 독기가 오른 한택수로부터 따귀를 맞은
옹주가 쓰러지고 복순이 맞따귀를 때린다
그뒤 한택수는 옹주를 더욱 괴롭히며 옹주의 모든것을 빼앗아 간다
끝까지 옹주를 곁에서 모시겠다던 복순을 고국으로 돌려 보내지게 되는데
일분 군인한테 얻어 맞으면서도 못 가겠다는 복순과 차마 두둘겨 맞는 복순을 볼수없어
조선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리는 옹주의 이별이 영화에서 슬픈 장면이다
한편 독립운동을 돕는 장한과 의친왕의 아들인 이우왕자(고수)는 영친왕을 상해로 망명시킬
계획을 세운다
실제로는 영화배우인 고수를 닮은 외모인 이우왕자는 일본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에 들어가
군 기밀을 독립군에 전달하는등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
이우 왕자는 1985년 히로시마 폭탄으로 사망했다.
일본 주요장교가 참석하는 대회에서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김복국(김대명)이 폭탄을 터트리게 된다
한택수 제거를 못해서 중간에 망명이 틀어지고 결국 영친왕은 망명을 포기한다
실제 영친왕은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가 되어 28대 왕통을 계승했지만 선종인 선왕이 승하했을때는
이미 나라가 사라져 계승할 왕위가 없어진 후였다
열한살에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 왕족과 정략결혼을 하고 1963년 귀국때까지 까지
속내가 뻔한 이토히로부미의 배려와 도움아래 잘 살았지만
육이오때 한국에 주둔한 유엔군을 위해 한국어 교본을 전파하고 유학온 청소년들을
돕는일을 했었다
서울 종묘에 있던 선조들의 위패를 복사하여 도쿄 저택에 모셔 자신이 오백년 조선왕조의
후예임을 잊지 않았다
영친왕부부는 수개월 일정으로 유럽여행을 떠난다는 정보를 임시정부에서 알았지만
일제에서 사전 탐지되어 납치계획은 무산되었다
영화속 영친왕 망명 작전은 역사속 의친왕 망명 작전을 참고 되었다
항일 의지가 굳건했던 의친왕인 이강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로 유학시절부터
독립운동자금을 보탰다
1919년11월 항일 독립운동단체와 대동단의 주도하에 신의주를 거쳐 상해 임시정부로
탈출 시도 했는데 만주 안동현역에서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어 붙잡인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황족의 자유가 엄격하게 감시 당했다
덕혜옹주와 장한은 독립운동 은신처로 피해 배를 기다리는데
배에는 한택수가 타고 있다
여러발을 총탄을 맞고 쓰러진 장한과 옹주는 헤어지고 만다
옹주는 일본인 소 다케유키와 정략결혼을 하고 옹주는 잊혀진 사람으로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져 갔다
1945년 일본이 항복선언을 하고 이제 고국으로 돌라갈수 있다고 생각한 옹주는 딸과 함께
시모노세끼항구에서 입국심사를 하는데 입국을 거부당한다
그와중에 그토록 괴롭혔던 한택수는 입국심사대를 빠져 나가며
"옹주님 오래간만입니다
제가 그랬죠 옹주님은 절대 조선땅을 밟을일 없다고."하며 유유히 일본을 떠난다
실소와 울부짖음으로 옹주는 미쳐갔다
세월이 얼마나 흘렀을까
1962년 도쿄를 방문한 국가 재건최고의회 의장인 박정희와 기자 간담회에서
장한은 일본에 남아있는 구 황족의 귀국을 언급한다
검버섯이 핀 얼굴은 늙은 기자는 다리를 절며
소 다케유키를 찾아 나서고 정신병원에서 그녀를 만난다
절대 아무물이나 마시지 말라며 조국을 떠날때 생모가 준 보온물병을 든채 나타난
옹주는 영혼과 육체가 이탈되어 온전치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마침내 고국땅을 밟는 늙은 옹주
먼발치에서 기다리는 복순을 알아보고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앤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뜰앞에 나갔더니 언제 피었는지 모르게 하얀 작은꽃
풀잎이 흔들리는 소리에 뜰앞에 나갔더니 아무도 없는데 홀로 피어 있는 작은꽃...."
김윤아의 '작은꽃'노래로 영화지만 역사속 인물이 튀어나와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옹주이기전 한여인의 슬픈 삶이
고스란히 전해져 가슴을 후벼 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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