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8. 15:18ㆍ백대명산
일시-2021년 5월7일 금요일 흐리다 비온뒤 황사낌
코스-소요산역-매표소-일주문-구절터-넓적바위-공주봉-안부 삼거리-암릉-의상대(587.7m)
-나한대우회로-삼거리 이정표-선녀탕 삼거리-선녀탕 왕복-자재암-원효폭포-일주문-소요산역
소요산을 가기 위해 일호선인 경원선을 갈아타고 소요산역에서 하차했다
전철로 이동하는 시간에 비가 오고 산행즈음에는 개어 다시 없이 산행하기 좋은날로
선선한 공기와 간간히 부는 바람도 도움이 되었다
황사만 없었다면 끝내주는 날씨였는데 바람타고 황사까지 날라왔나
다음 다음날까지 세상은 불투명했다
역사를 빠져 나왔다
한동안 거세게 쏟아졌다는 비는 그치고 해가 쨍하다
코로나로 등산객들이 줄어드는 바람에 역사 건너편 몇몇상가만 문을 열고
맛집 거리의 가게 대부분은 문을 닫았다
마땅히 살만한 간식거리가 없어 입구에서 호도과자 삼천원어치를 사들고
단풍거리를 걷는데 이미 푸른잎이 커진 단풍나무는 싱그럽기만 하다
가을이면 한단풍한다는 소요산이 입구부터 기분좋게 만든다
원효의 숨결이 스며든 소요산은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와의 전설이 남아
곳곳에 그들의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소요산 산행은 입장료 없이 산능선을 타고 가는 방법도 있으나
조금이라도 쉽게 가려면 매표소에서 천원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일주문을 통과해야 한다
소요산에 들어갔다 나오면 천원이 아깝지 않다는것을 알게 된다
매표소와 일주문을 통과하고 약수터를 지나 산행 초입까지 대략 이킬로 거리의
완만한 시멘트 도로를 오르는것만으로도 충분한 운동이 되어 벌써 몸이 따끈해진다
원효폭포와 원효굴 갈림길에서 우측 능선으로 오르면서 산행은 시작이다
일차 목표점인 공주봉까지는 1.3km
비온뒤 땅은 촉촉하고 풀잎들은 생생히 살아났다
나뭇가지에서 마르지 않은 빗물이 가끔씩 똑똑 떨어진다
오르막은 가끔 계단도 놓여있고 밧줄도 달려 있으나 어려운길은 아니다
구절터를 지나고 전망좋은 넓적바위도 지났다
이어 공주봉이다
해발고도 526m의 공주봉은 자재암을 둘러싸고 말발굽 모양으로 펼쳐지는
등산로의 첫 봉우리가 되며 공주봉을 지나면 소요산의 최고봉인 의상대로
가는 길목이다
원효와 정을 나눴던 요석공주는 신라 29대 무열왕의 둘째딸로 일찍이 홀로되어
요석궁에 있었다
이때 원효라는 스님이
"그 누가 자루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주겠는가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
라는 노래를 부르며 전국을 떠돌아 다녔는데 무열왕의 귀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노래를 들은 무열왕은 이 스님이 필경 귀부인을 얻어 귀한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 라며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이보다 더 좋은일이 없을것이다 라며 요석공주와 짝을 이루게 하였다
둘 사이에 대학자인 설총이 태어났다
이후 원효는 파계승이 되어 거지꼴로 스스로 소성거사라 칭하며 전국을 돌아다니며
"모든것이 거리낌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나이다" 라는 무애가로
가무와 잡담중에 불법을 널리 알렸다
대중교화를 마친 원효는 소요산 원효대에 정착하여 수행에 전념하였다
원효를 사모하던 요석공주는 아들을 데리고 소요산 아래에 별궁을 짓고 살면서
원효가 수도하는 원효대를 향해 예배를 올렸다고 한다
원효대사가 요석공주를 두고 이름 지었다는 공주봉 정상은
마당처럼 넓은 마루가 깔려 있어 눕거나 앉아 쉬기에는 그만이다
두명의 산객이 점심을 먹고 있고 그옆에는 고양이 한마리가 누워 오수를
즐기고 있었다
정상석은 따로 없고 조금 비껴있는 자리에 녹슨 철표지판이 서 있을뿐이다
공주봉에서 의상봉까지 1.2km 가는길은 뾰족뾰족 돋아난 바위길이다
암릉길 우측으론 절벽이다 낙석 위험이 높아 곳곳에 낙석위험 표지판이 붙어 있다
산 아래 멀리 동두천 미군부대 진영도 보였다
비온뒤라 숲냄새가 진하다
햇볕이 반짝거려도 비에 젖었던 공기는 숨쉬기도 편하고 시원하여
물도 몇모금 마시지도 않은채로 올라왔더니
벌써 오후 한시가 되어간다
샘터 갈림길에서 점심을 먹고 일어났다
이어 의상대까지 칠백오십미터는 차돌길이다
칼처럼 날카롭게 잘린 바위들이 뾰족뾰족 서서 걷기 불편한 암릉을 지나고 올라서야
소요산 정상인 의상대에 오를수 있다
의상대는 해발고도 587.5m이다
동두천의 명산이고 단풍으로 유명한 소요산은 1981년 국민 관광지로 지정되었고
화담 서경덕과 봉래 양사언 매월당 김시습이 자주 소요하였다 하여 소요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철학적 거인도 아니고 평범한 속인에 불과한 나는 딱히 할일도 없으면서
산에서는 소요하기보다 항시 서둘러 하산하기만 바라는 심정이 크고 오늘도 인증만 마치곤
부리나케 땅을 밟아야 마음이 놓일것이다
소요산의 최고봉이 의상대인 이유는 조선 태조가 소요산에 머물며 자재암을 크게 일으킨후
자재암을 둘러싸고 있는 소요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불교와 관련된 이름이라
자재암을 창건한 원효의 수행 동지인 의상을 기려 불리게 되었단다
조선 건국 이성계가 왕자의 난으로 실각한 이후 이곳에 들어와 행궁을 짓고 머물며
백운대에 자주 올랐다는데 조선 행궁지의 모습은 없고 주차장 옆에 표지석만
세워져 있어 행궁터는 관리 사무소 어디쯤 될거라 추정만 한단다
의상대 정상석은 차돌바위 덩어리 위에 검정 대리석으로 꼭 납골당 묘비석을 떠올린다
정상석을 뒤로 하고 내려오면 긴 나무계단이 기다린다
계단을 내렸다 다시 오르면서 걷다 나한대 우회로로 빠졌다
나한대에서 칼바위를 거쳐 중백운대까지 가는길이 소요산에서 가장 위험구간으로 여겨진다
그런대로 쉬운길을 택해 걷는중이다
금송굴 기점을 지나 계곡길로 하산하는데 계곡엔 물이 마르고 돌만 무성하다
길은 쉽고 걸을만 하다고 했더니 입이 방정이라 너덜이 나온다
그러길래 날머리 도착할때까지 입방정을 떨면 안된다
선녀탕 기점이다
그제서야 계곡물이 졸졸 흐르고 선녀탕까지는 삼백미터
시간도 많고 체력도 남는데 선녀탕에서 목욕은 못해도 구경이나 하자며 올랐더니
조금 오르니 낮은 폭포가 있고 설마 그게 선녀탕은 아닐거라고 자꾸만 올라가도
물은 고사하고 점점 마른바위와 나무 뿐이다
오던길로 돌아서 폭포앞에 서니 작은 웅덩이가 선녀탕이었다
오래된 철계단을 내려서 선녀탕 갈림길에서 물 흐르는 계곡길을 지나
자재암에 도착했다
봉선사의 발사인 자재암은 신라 선덕여왕 14년 645년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순종 원년 정미의병때 의병활동 근거지로 이용되었던 탓에 일본군의 공격으로
불타는 수난을 겪고 복원했다
천연암굴인 나한전이 신비롭고 깊이 파인협곡으로 쏟아지는 옥류폭포의 물줄기가 시원했다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관세음 보살을 참견하고 자재무애의 수행을 쌓았다는 뜻으로
유래된 자재암이다
요석공주와 인연이 닿은후 오로지 수행에 전념하기 위해 자재암에 머물고 있을때였다
비내리는 어느날밤 약초를 캐다 길을 잃은 한 여인이 하룻밤 쉬어가기를 청했단다
원효대사는 여인에게 "마음이 생한즉 옳고 그르고 크고 작고 깨끗하고 더럽고 있고 없고
가지가지 모든법이 생기는 것이요 마음이 멸한즉 상대적 시비에 가지가지 법이 없어지는것이다
나 원효에게 자재무애의 참된 수행의 힘이 있노라"라는 법문을 말했다
이에 여인이 미소를 지으며 유유히 사라졌고 이후 원효대사는 이 여인이 관세음보살의 화현임을
알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대사가 앉아 고행수도했다는 동굴위 원효대를 지나 백팔계단을 내려 해탈문을 통과했다
원효대 아래 원효폭포와 원효굴을 포함하여 소요산은 원효의 숨결이 새겨지지 않은곳이 없고
산아래 폭포가 두개씩이나 쏟아지는것도 특이했다
북한산에도 원효봉이 있는데 원효와 연관된 산들은 곳곳에 수두룩하다
폭포 가기전에 대리석의 속리교는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 의미의 다리다
원효의 해골물 일화는 유명하다
신라의 고승인 원효와 의상이 함께 당나라에 유학을 떠났으나
유학길에 해골물을 통해 득도한 원효는 한때 나마 요석공주 마음을 받아 들였다
반면 당나라 유학을 성공리에 마친 의상은 선묘라는 여인의 마음을 끝내 받지 않았다
백두대간이 태백산에서 소백산으로 내려오면서 지역은 강원도에서 경상도로 바뀐다
경북의 늦은목이를 지나며 대간길에 비껴있는 봉화산 아래에는 의상이 창건한
영주 부석사가 있다
그곳에 가면 의상과 선묘낭자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만날수있다
암튼 사랑이 먼저인지 수행이 먼저인지 둘다 어렵고 힘든일이다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형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니 동굴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았다."원효의 깨달음이
이 즈음 세상에도 통한다
一切唯心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