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9. 3. 14:09ㆍ참고
선운사 상사화(꽃무릇)를 보고 고창성으로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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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평일 기행을 실시합니다. 9월이면 선운산 기슭을 빨갛게 물들이는 상사화(꽃무릇)을 보고 고창성을 답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생에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그 중에 서로 엇갈린 운명 때문에 만나지 못하고 시들고 마는 상사화가 가장 절정인 시절 고창을 갑니다.
시간이 허락하신 분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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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지나간 것들은 지나간 것들대로 아름답다.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지금 현재 이 선운산의 깊숙한 곳에서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이 고요와 바라보는 나뭇잎의 미세한 흔들림이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리라.
명나라 때의 문인 오종선吳從先이〈소창자기小窓自紀〉에서 “속세를 벗어나 정을 줄만한 대상은 오직 산뿐이다. 산은 반드시 사물의 도리를 깊이 관찰하는 눈과 명승지를 탐방하기에 알맞은 체구와 오래도록 머무는 인연이 있어야만 비로소 허물없는 교우관계를 허락한다.”고 하였는데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오늘의 산행은 어쩌면 그리도 잘 맞아 떨어지는지,
용문굴에서 조금 내려가자 도솔암의 마애불 앞에 도착한다. 암벽타기를 즐기는 산악인들이 연습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바위벽을 돌아가면 도솔암으로 오르는 길 옆 절벽에 고려시대 초 지방 호족들이 세웠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전체 높이 17m, 너비 3m인 이 불상 낮은 부조로 된 거대한 크기의 마애불로 결가부좌한 자세로 양끝이 올라와 있고 입도 역시 꾹 다물고 있는 모습이기 때문에 부처님다운 부드러움이나 원만함이 없이 위압감을 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마애불의 머리 위에 누각 식으로 된 지붕이 달려있었는데 인조 20년(1648)에 무너져 내렸다고 한다. 선운사 마애불의 배꼽 속에는 신비스런 비결이 하나 숨겨져 있었다. 그 비결이 세상에 나오는 날에는 한양이 망한다는 전설이 끈질기게 전해져 왔다. 오지영이「동학사」에 기록한 비결 탈취 과정은 이렇다.
지금 고창군(당시 무장현) 아산면 선운사 동남쪽 3킬로미터 지점에 도솔암이란 암자가 있고, 그 암자 뒤에 50여 척 높이의 층암절벽이 솟아 있는데, 그 절벽에 미륵이 하나 새겨져 있다. 이 미륵상은 3천 년 전에 살았던 검당선사(黔堂禪師) 진상이란 것으로 그 미륵의 배꼽에는 신비스런 비결이 한 숨겨져 있는데, 그 비결이 세상에 나오는 날에는 한양이 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비결과 함께 벼락 살을 동봉해 놨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비결을 꺼내기 위해 손을 대면 벼락에 맞아 죽는 다는 것이다. 그 벼락 살이 같이 봉해져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지금(당시)부터 130년 전에 전라감사로 내려왔던 이서구(李書九)가 그것을 꺼냈을 때 벼락이 쳤던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전라감사로 부임한 이서구는 어느 날 선화당에 앉아 조용히 천지의 망기(望氣, 나타나 있는 기운을 보고 무슨 조짐을 알아냄)를 보고 있자니, 서남쪽에서 매우 상서로운 기운 한줄기가 뻗쳐올라가고 있는지라, 예삿일이 아니라고 생각되어 말을 몰아 그 쪽으로 달려가 보니, 그것이 선운사 미륵의 배꼽에서 뻗어 올라가고 있었다. 여기에 무엇이 들었기에 이러는가, 그 배꼽을 쪼아보니, 그 속에는 책이 한 권 나왔는데, 그 순산 뇌성벽력이 하늘을 찢는 바람에 바람이 혼비백산, 그 책을 도로 거기 넣어놓고 회로 봉해버렸다는 것이다. 그 때 이서구가 본 것은 “전라감사 이서구 개탁”이란 글자뿐이었다. 그 사건이 있은 뒤로 세상 사람들은 그 비결을 꺼내보고 싶어도 벼락이 무서워 꺼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미륵비결이 숨어있는 마애여래불
이 비결을 1892년(임진) 8월 무장 접주 손화중과 동학의 지도자들이 꺼내게 된다. 어느 날 손화중의 집에서는 선운사 석불비결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 비결을 내어보았으면 좋기는 하겠으나, 벽력이 또 일어나면 걱정이라 하였다. 그 좌중에 오하영(吳河泳)이라고 하는 도인이 말하되, “그 비결을 꼭 보아야 할 것 같으면, 벽력이라고 하는 것은 걱정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한 중대한 것을 봉해서 둘 때에는 벽력 살이란 것을 넣어 택일하여 봉하면 후대인이 함부로 열어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내 생각에는 지금 열어보아도 아무런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이서구가 열어볼 때에 이미 벽력이 일어나 없어졌는지라 어떠한 벽력이 또 다시 일어날 것인가. 또는 때가 되면 열어보게 되나니 여러분은 그것은 염려 말고 다만 열어볼 준비만을 하는 것이 좋다. 여는 책임을 내가 맡아 하겠다.”고 하였다. 좌중에서는 그 말이 가장 이치에 합장하다 하여 청죽(靑竹) 수백 개와 새끼 수십 타래를 구하여 부계(浮械)를 만들어 그 석불의 전면에 안치하고 석불의 배꼽을 도끼로 부수고 그 속에 있는 것을 꺼냈다. 그것을 꺼내기 전에 그 절 중 들의 방해를 막기 위하여 미리부터 수십 명의 중들을 결박하여 두었는데, 그 일이 끝나자 중들은 뛰어가서 무장관청에 고발하였다. 전날 밤에 동학군들이 중들을 결박 짓고 석불을 깨뜨려 그 속에 있는 것을 도적질하여 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수백 명이 잡히었는데, 그 중 괴수로 강경중(姜敬重), 오지영, 고영숙(高永叔) 세 사람이 지목되었다.
이 사건으로 동학의 지도자들이 여러 형태로 피해를 받았지만 손화중이 왕이 될 것이라니 세상이 뒤집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줄을 이어 무장 접주 손화중의 집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이 결국 동학농민혁명의 주력으로 활동하게 된다. 바라볼수록 마애불과 잘 어울리는 한 그루 소나무를 뒤로하고 도솔암으로 오른다. 깎아지른 절벽과 푸르른 나뭇잎 새들이 손짓하는듯한 정경 속에 내원궁(內院宮)이라고 부르는 도솔암은 자리 잡고 있고 그 안에는 보물 제280호로 지정된 선운사 지장보살 좌상이 있다. 남해 금산의 보리암 만큼이나 영험하기로 소문이 나있는 지장보살은 관음전에 있는 금동보살과 크기나 형식은 비슷하지만 그 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아름답다. 먼저 온 몇 사람이 정성스레 절을 올리고 있는데 우리들은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고만 있다. 그래 나는 저 내원궁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백중기도를 올리는 사람들 곁에 앉아 보지도 못하고 저 건너 산봉우리의 낙조대만 바라보고 있으니...
도솔암에서 물을 마신 후 대나무 잎 새가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며 잠시 내려가면 훤칠한 미남처럼 가지를 늘어뜨린 장사 송을 만나게 되고 그 옆에 진흥굴이라고 불리는 천연굴이 있다. 불교에 심취한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도솔왕비와 중애공주를 데리고 이곳 선운사에 와서 이 굴에서 자던 중 꿈속에서 미륵 삼존불이 나오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하여 이곳에 중애사를 창건하고 다시 이 절을 크게 일으키니 그 것이 선운사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이 지역이 신라 땅에 속했을 지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옛날에는 양초를 켜놓고 기도드리는 사람이 더러 있었지만 지금은 마루도 만들고 부처님도 모셔놓아 얼핏 절을 연상시킨다. 믿음이 크면 여러 가지 부속물 들이 생기는 것인지 믿음이 없어지면 부속물들에만 더 신경을 쓰는지 모를 일이고 내려가는 신작로 길은 그런대로 시원하다.
복분자술이 한국의 대표주
선운산의 아름다운 풍경 한 가지를 떠올리라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동백꽃을 먼저 떠올릴 것이지만 나는 선운산의 상사화를 떠올린다. 9월경에 선운산 골짜기를 시나브로 걸을라치면 가을나무들 새로 새빨갛게 피어난 꽃들을 볼 것인데 그 꽃이 상사화이다. 잎이 지고 난 다음에 꽃대만 올라와서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그 꽃이 잎과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상사화라고 부르는데 아직은 이른 계절이라 볼 수가 없고 또 하나 들라하면 선운사의 복분자주와 풍천장어일 것이다. 복분자는 딸기의 일종이고 우리 지역에서 고무 때왈이라 불리는 검은 딸기인데 그 술은 먹으면 요강단지가 뒤집어진다는 속설이 있지만 사실은 딸기가 뒤집어진 요강단지와 흡사해 복분자라고 불린다고 한다. 하지만 그 말을 곧이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선운사 동백장에서 하룻밤을 머물면서 복분자술로 하룻밤을 지새우기가 일쑤이다. 풍천장어 역시 정력에 좋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에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안 먹고 가면 서운한 필수 음식이 되고 말았다. 또한 이 산에는 <선운산가>라는 선운산과 관련된 백제 때의 노래가 전해온다. 백제 때 지금의 상하면, 공음면, 해리면을 아우르던 장사현에 살던 사람이 나라의 부름으로 전쟁터에 나갔으나 전쟁이 끝난 뒤에도 돌아오지 않자 그 부인이 선운산에 올라가 낭군을 그리며 부른 노래인데 가사는 전해지지 않고 노래에 얽힌 이야기만 남아있다.
선운 야영장을 지나자 바다로 가지 않고 이 선운사 골짜기를 찾은 사람들이 깨끗하지 않은 물임에도 불구하고 물놀이를 하고 있고 쉬엄쉬엄 걸어가자 선운사에 이른다. 선운산 동쪽 기슭에 위치한 선운사는 사기에 의하면 백제 제27대 위덕왕 24년에 검담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검단선사가 그와 친분이 두터웠던 신라의 의운조사와 함께 진흥왕의 시주를 얻어 창건했다고 한다. 훗날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선운사 창건설화는 이렇다. 죽도 포에 돌배가 떠와서 사람들이 끌어오려고 했으나 그 때 마다 배가 자꾸 바다 쪽으로 떠나가곤 했다. 그 소식을 들은 검단선사가 바닷가로 가보니 배가 저절로 다가왔다. 배 위에 올라가 보니 그 배 안에는 삼존불상과 탱화, 나한상, 옥돌부처, 금 옷을 입은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의 품속에서 ‘이 배는 인도에서 왔으며 배 안의 부처님을 인연 있는 곳에 봉안하면 길이 중생을 제도 이익利益이 있게 하리라’라고 쓰여 진 편지가 나왔다. 검단선사는 본래 연못이었던 현재의 절터를 메워 절을 짓게 되었다. 이 때 진흥왕이 재물을 내리고 장정 100명을 보내 뒷산에 무성했던 소나무를 베어 숯을 굽게 하여 경비에 보태게 하였다. 절터를 메울 때 쫓겨난 이무기가 다급하게 서해로 도망을 가느라고 뚫어놓은 자연석굴인 용문굴이 등불암 마애불 왼쪽 산길 위에 있다. 그 당시 선운산 계곡에는 도적이 들끓었다고 한다. 검담선사가 그들을 교화하고 소금 굽는 법을 가르쳐서 생계를 꾸리게 했다. 그때 그들이 살던 마을을 검단리라고 하였으며 그들은 해마다 봄가을에 보은염이라는 이름의 소금을 선운사에 보냈고 그 전통이 그대로 해방 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그 후 충숙왕 5년과 공민왕 3년에 효정선사가 중수했으나 폐사가 되었고 조선 성종 14년에 행호(幸浩)선사가 쑥대밭만 무성하던 절터에 서있는 구층석탑을 보고 성종의 작은 아버지 덕원군의 시주를 얻어 중수했지만 정유재란 때에 불에 타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 당시 광해군 6년(1614) 월준대사가 재건한 뒤 몇 차례 중수를 거치며 오늘에 이르렀다.
한창 번성했던 시절에는 89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3 천여 명의 승려가 머물렀다는 선운사는 현재 조계종 제 24교구의 본사로서 도솔암, 참당암, 석상암, 동문암 등 4개의 암자와 천왕문, 만세루, 대웅전, 영산전, 관음전, 팔상전, 명부전, 산신각 등 십여 개가 넘는 건물들이 남아있다.“ 신정일의 <사찰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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