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6. 29. 10:51ㆍ백두대간
일시-2016년 6월28일 화요일 맑음
장소-백두대간 윤지미산 구간 남진
코스-화령재(320m)-대삼각점-윤지미산(538m)-무지개산 갈림길-무지개산(441.4m)-329.6봉
-신의터재-지기재(260m)
무지개산 왕복 포함백두대간 16.8km+접속 ㅇkm=16.8km 5시간 30분걸림
새벽공기가 시원했다
천지간의 꽉 찬 음양으로 치자꽃 향기가 현기증나게 달콤하게 왔다 사라지는
유월이다
나의 백두대간 여정도 절정으로 치달아 벌써 사십삼차에 다달았다
새벽 달 보자고 초저녁부터 기다린다더니 다음날 새벽에 집 나가려는 부담감으로
자다깨다 잠결인지 꿈결인지 헤매던 내가 나도 모르게 초조함이 서서히 사라져가고
이제는 두근거리던 심장도 많이 차분해졌다
이주만에 다시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인 화령재에 도착했다
진달래 철쭉 산벚꽃이 사랑의 열병 앓듯 쏟아지던 봄길은 이제 찾을길 없고
길가의 푸른 잡초마저 뜨거운 열기로 후끈거리는 여름길에 나섰다
오늘 대간길은 지각이 단층 사이에 함몰된 낮은 지대가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지형인
중화 지구대로 접어드는 화령재에서 추풍령까지 54.69km중에 일부이다
산행 좀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빠른 걸음으로 서너시간이면 충분하다는 구간이다
역사적인 전투가 많았던 천혜의 요새인 화령재의 표지석 반대편 도로위로 올라선
대간길에 접어들어 일정을 시작했다
얕으막한 흙길로 올라 내려다보니 상주 청원간 뻥 뚫린 고속도로가 산을 가로 지르고
있었다
화령재에서 0.74km 떨어진 삼각점을 지나면 임도 좌측 숲속으로 대간길은 이어진다
오르락 내리락 작은 봉우리인 무명봉을 몇개 넘고 능선길은 짙어진 푸른 녹음에 햇살도
살짝살짝 비껴갔다
얼마쯤 걷다보면 어디선가 라디오 소리인지 스피커에서 나오는 말소리가 들려온다
오른쪽 밭에 얼핏얼핏 보이는 비닐 하우스는 비닐이 아니라 인삼밭 재배 지역이란다
안부를 지나고 가파른 오르막을 짧게 올라서면 매직펜으로 가늘게 윤지미산이라 적힌
산 정상이 나온다
윤지미산은 논어에 나오는 정신을 하나로 모아 중심을 잡으라는 가르침인 允執厥中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무명봉이었던 산에 올랐던 윤지미라는 사람이 장난삼아 이름을
적어 놓은것이 그대로 산 이름이 되었다는 어이 없는 설이 있다
허기사 가끔씩 다른산에 같은 이름으로 헷갈릴때도 있지만
그 많은 산의 봉우리마다 각기 다른 이름들은 맨처음 어디서 부터 왔는지 궁금도 했다
말 지어내기로 소문난 사람들이 많을테니 앞으로도 새로운 봉우리가 더 생길거 같다
화령재에서 2.9km 떨어진 거리에 있는 윤지미산은 해발 538m로
오늘 산행중 제일 높은 정상이고 대간중에 가장 낮은 구간의 산이다
윤지미산 정상을 벗어나 식용과 건축자재로 쓰이는 잣나무 군락지를 지나
다시 오르락 내리락 완만한 봉우리를 넘고 넘어서
지루한 숲길을 걸어야 한다
437.7봉을 넘고 다시 조망 없는 숲길을 헤치고 걸으면 무지개산 갈림길이 나온다
윤지미산에서 무지개산 갈림길 까지는 4.5km 인내심이 필요하다
갈림길에서 0.2km 떨어진 무지개산을 찍었다
해발 441.4m의 무지개산은 대간길에서는 벗어나 있다
정상같지 않은 정상을 찍고 다시 갈림길로 내려서 점심을 먹기 위해 휴식했다
그동안 최소한의 무게라도 줄여야 한다길래 집에다 고이 모셔 놓았던 의자를 오랜만에
가져와 펴고 앉으니 단 몇분을 쉬어도 편함함이 달랐다
무지개산 갈림길에서 329.6봉을 지나고 신의터재가는 길에는
정원수와 약용 향료로 쓰이고 나무중 가장 질겨 소의 코뚜레로 사용하는 노간주 군락지와
표고용과 건축재 약용으로도 쓰이는 잎이 크고 단풍이 아름다운 서어나무 군락지가 나온다
이어 여러개의 묘지옆을 지난다
도종환 시인의 씀바귀 무덤도 아니고 나무 뿌리가 봉분 위로 뻗고
사람키 만큼이나 자란 잡초아래 봉분이 내려 앉아 관리가 전혀 안된 여러개의 묘지옆을 지났다
드디어 화령재에서 12여km를 걸어 점점 짙어지는 초록 잎들이 한낮의 더위에 시들어질 즈음에
나도 더위와 목마름에 지쳐가며 신의터재에 다달았다
신의터재는 상주시 화동면의 이소리와 내서면의 어산리를 오가는 해발 280m의
낮은 고개이다
임란 이전에는 신의현(신의티)이라 불리었고 임란 이후에는 신의터재라고 불리었으나
일제때 민족정기 말살정책 일환으로 어산재로 바뀌었다가
문민정부 수립후 광복 오십주년을 맞이하여 옛이름인 신의터재로 다시 고쳐
현재는 신의티와 신의터재 두이름이 혼용되고 있다
1996년 상주시에서 만드 신의터재 표지석과 2009년 화동면 산악회에서 만든 신의티 표지석
그리고 2010년 산림청에서 만든 신의터재라 적힌 표지석까지 세개가 있다
산줄기도 쉬어간다는 신의터재에는 휴식공간인 정자가 있고
음수대에서는 지나가는 길손들의 생명수인 물이 나온다
임진왜란 당시 최초 의병장이었던 의사 김준신 유적비도 있다.
임진왜란은 1592년 임진년 4월13일 섬나라 일본의 고니시가 이끈 선봉대가 부산포에
쳐들어 오면서 시작된다
동래성을 함락한 왜군은 한성을 향해 북진하였고 충주 함락소식에 선조는 평양으로
다시 의주로 도망가기 바빴다
백성의 마음을 얻으면 백성은 알아서 복종하거늘 몽진길에 백성에게 야유를 받았던
선조는 왕이 되어서는 안되는 사람이 왕이 된 모양 걸핏하면
왕 노릇 못해 먹겠다는 양위 파동을 일으켜 후대에도 치졸한 왕으로 전해지는
부정적인 평가가 많다
여차하면 해외로 조망칠 위정자들이 있는 현세를 보면 역사는 돌고 도나보다
관군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곳곳에서 의병들이 일어나 장렬하게 싸웠다
1598년까지 이차에 걸쳐 7년간 이어진 전쟁은 조선 사회에 많은 상처를 남기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노량해전을 마지막으로 일본군이 조선에서 완전히 물러나면서
긴 전쟁은 막을 내렸으나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전사하고 말았다
신의터재의 인근 화동면 판곡리의 김준신은 임란이 발발하자 이 재에서 의병을 일으켜
상주성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젊은 나이에 전사한다
의사의 활약에 분노한 왜병에게 김준신 가족의 남자들은 거의 학살당하고 부녀자들은
연못에 몸을 던졌다
이에 노산 이은상 선생이 1973년 낙화담의 적천양시로 그들을 찬양하였다
"임진년 풍우속에 눈부신 의사 모습
집은 무너져도 나라는 살아있네
절사곡 피묻은 역사야 어느적에 잊으리
설악 높은 본대로 이르는말
꽃은 떨어져도 열매는 맺었다고
오늘도 낙화담 향기 바람결에 풍기네"
이 못은 옛날 판곡 마을 안산인 속리산 줄기의 백화산이 화성을 띄고 있다는
풍수지리설에 의해 화기를 중화 시켜야 한다고 믿는 마을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못이라고 전해진다
천육백여평에 이르렀다는 연못인 낙화담은 세월이 흐르면서 작은 연못으로 변했다
"남아는 마땅이 죽어야 할 자리에서 죽어야 한다."유명한 말을 남긴 김준신과 함께
조선중기 상주의 삼대 인물로 정기룡 장군돠 정경세가 있다
사벌면 충의사에 위패가 모셔진 정기룡 장군은 임란과 정유재란때 활약한 육지의 이순신이라 불리고
정경세는 화령재 외서면에 종가가 남아 있는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한 대학자이다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중에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라고 했듯이 청춘의 폭풍이 지나간 역사의 뒤안 고갯길은
바람도 숨을 멈추고 푸르스름한 혼백이 모여들어 주변은 서늘했다.
말린 과일과 수분 보충으로 잠깐의 휴식을 끝내고 다시 발길을 재촉한다
신의터재에서 지기재까지는 4.6km남았다 이런 속도라면 한시간 삼십여분이면
갈수 있는 거리이다
낮은 봉우리를 넘고 숲을 지나는데 새소리가 선명하다
아침에는 배 고파 울고 저녁에는 님 그리워 운다는 새들이 다른 새들을 부르는 소리에
숲도 늙은 나무와 젊은 나무들이 틔워낸 새로운 생명이 펄떡 거린다
숲은 건강했다
점점 짙어지는 녹음속의 숲은 들숨과 날숨으로 더운김을 품어대며 유혹하고
숨을 길게 들이 마시고 내뿜고 오직 걷기만 할뿐이건만 머리에 얹은 얼음물은
금세 뜨뜻해진다
덥지만 않다면 이대로 어디라도 갈수가 있을텐데 뜨거워진 머리통은 식을줄을 모른다
금은골 마을로 통하는 농로를 지나고 대밭 사이를 지난 대간길은
안쑥밭골 논둑길을 걸어간다
동네 이름이 쑥밭이라니 쑥이 삼밭에 가면 삼이 되고 삼이 쑥밭에 가면 쑥이 된다는데
이 마을에는 인삼밭과 쑥밭도 있고 산딸기가 많아 이래저래 먹을것이 풍부한 마을이다
사과와 포도 감을 재배하는 과수 농장도 많았다
아직 영글어 가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하지만 행여 떨어진 과일이라고 무턱대고
집어 먹었다간 절도죄가 된다니 눈에서 먹고 싶은 과일 냄새가 나도록
눈으로만 먹고 지나쳐야 한다
지기재 마을 입구에 이르러서 다시 숲으로 올라갔다 내려와 지기재에 도착했다
지기재는 옛날 이 부근 뒷동산에 도둑이 많아서 적기재라고 부르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지기재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민가와 가까운 야산의 대간길이 삼백의 고을답게 눈처럼 희고 고왔다
플라시보 효과인지 흙길이어서 그런지 대간 출정때마다 마신 박카스 대신
비타 오백만으로도 부드럽게 걸었다
몸과 마음을 잡아 끄는 대간길이다
그날에
그날의 정열
피보다 붉어라
그날의 함성
민중의 북소리이어라
그날의 분노
산천 초목 붉게 차오리라
그날의 통곡
녹아 내린 몸부림이어라
그날의 슬픔
잔인한 회오리여라
그날의 안부 물어오면
바람에 실린 혼이 되었다 말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