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52차 후기 2

2016. 10. 13. 15:39백두대간

 

 

눈을 뜨니 새벽한시가 넘었다

다시 깜빡 졸다 눈을 뜨니 새벽 네시가 넘었다

전날 못잔 잠을 두배로 잔듯 몸은 개운했다

뒤척뒤척 채비를 마치고 대피소 마당에 나오니 아직 어둡다

별자리를 하나둘 걷어가는 어둠이 점점 스러져가고 지리산속의 대기가

새벽의 푸른빛으로 되살아났다

라면 끓이는 냄새가 진동하여 역겹다

흰죽을 끓이고 라면을 끓여 억지로 먹었다

먹은만큼 간다고들 하지 않던가 배고프지 않아도 먹어둬야 걸을수 있기 때문이다

아침 이슬을 함초롬이 먹음은 세석평전이 어슴프레 보일때쯤 대피소를 벗어났다

세석 고원은 약 삼십만평의 넓은 면적으로 둘레가 십이킬로나 된다

촛대봉과 영신봉 사이의 남향으로 완만하게 펼쳐져 작은돌 밖에 없는 토양이라

잔돌평전이라고도 불리는 세석평전은 한때 남한땅에서 최고로 명성을 날렸던

철쭉꽃 명승지였다

옛날 지리산 자락에 한쌍의 젊은 남녀가 있었는데 그들에게 자식이 없었다

고민에 빠진 여인은 반달곰의 꾀임에 빠져 산신령의 금기를 어기고

소원성취를 해준다는는 샘물인 영신봉 음양수를 몰래 마셨다

이를 안 산신령이 여인에게 세석 평전에서 평생 철쭉꽃을 가꾸라는 벌을 내린다

뜻하지 않게 남편과 헤어진 여인은 손가락에 피가 나도록 철쭉을 가꾸었다

후세 사람들은 철쭉꽃이 이 여인의 애처로운 모습을 닮아 꽃이 아름답다고 믿는다

산철쭉은 연분홍보다는 주로 연보라빛을 띈다

세석 평전을 지나 1703m의 촛대봉에 오르자 지리산 능선들이 발 아래에 있고 

뭉게 구름낀 파란 하늘이 손에 잡힐듯 가깝다

굽이치는 능선들이 꿈틀거리며 살아 숨쉰다

촛대봉 정상 봉우리에서 가야할  삼신봉 연하봉 제석봉 천왕봉을 바라보니

첩첩 산중이다

촛대봉에서 천왕봉까지는 4.4km 남았다

내려오는 바위길에서 맑은 대기와 붉은 혈기로 동쪽 하늘을 물들이고

이윽고 황금빛의 싱싱한 생명이 붉게 올라오는 일출광경을 바라보았다

촛대봉에서 아래로 길게 내렸다  다시 암벽을 올려 삼신봉 봉우리를 넘고

아래로 길게 내리면 연하선경이다

촛대봉에서 연하봉까지 구불구불 멋진 돌담길 주변을 연하선경이라 말한다

해발 고도 1730m의 연하봉에서 다시 아래로 길게 내려서면 장터목 대피소가 나온다

능선을 바라보는 새 한마리가 당당한 폼새로 높은 나뭇가지에 앉았다 푸드득

멀리 날아간다

너무 울어 목에서 피가 나면서도 제피를 되마셔 목을 축이고 또 울어 풀꾹풀꾹

목쉰 피울음을 운다는 풀국새도 아니고

환생하여 배고파 죽은 자식들을 찾아 다닌다는 뻐꾹뻐꾹 우는 뻐꾹새도 아니고

까악까악 날아가는 새까만 까마귀가 분명하다

장터목은 옛날 천왕봉 남쪽의 산천군 시천면 주민들과 북쪽의 함양군 마천면 주민들이

서로 생산물을 물물 교역을 하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계단을 오르고 나면 제석봉 사면에 올라서게 된다

제석봉 사면의 천왕봉 가는 길목에는 수문장처럼 죽어서도 눕지 못하고 서있는

음산한 고사목이 처절한 역사의 증언으로 쓸쓸하다

제석봉에는 전나무와 구상나무 분비나무등 아름들이 큰 침엽수가 우거졌었다

자유당 말기시절 제석봉 사면근처에 제재소를 차려놓고 권력에 힘입어

탈법과 불법으로 거목들을 마구잡이로 베어내면서 나무들은 수난을 당했다

여론이 들끓으면서 말썽이 생기자 도벌꾼들은 증거를 감추려고

제석봉우리에 불을 질러 산은 폐허가 되고 오늘날까지

울창한 숲 대신 군데 군데 고사목과 황량한 초원의 황무지로

남아 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무슨 죄가 있길래 이데올로기 싸움에

총 맞아 죽고 불 타죽고 모두 사람들이 한짓이다

 

부정한 자는 이곳을 통과하지 못한다는 전설이 있는 하늘로 통하는 바위굴인

통천문을 통과했다 마지막 암벽을 넘어 드디어 천왕봉은 서서히 위엄을 드러낸다

정상석은 뾰족한 바위 덩어리위에 해발 고도 1915m로 하늘에 닿을듯 높다

백두산의 정기가 흐르고 흘러 한민족 기상이 발원하는 천왕봉 봉우리에 서니

절로 감격스럽다

두번째 방문이다

세계 최초 히말라야14좌 완등한 이탈리아 메스너는

"등반은 죽음과 맞서서 얻는 깨달음이다"라며

왜 나는 정상에 가지 않고 못 견딜까라고 스스로 묻고는

"정상이란 산의 꼭대기가 아니라 하나의 종점이자

모든것이 모여드는 소실점 결국 세계가 무로 바뀌는 곳이다"라고

고백했다

누구나 내 안의 정상을 꿈꾸듯이 소박하더라도 구도자가 되고 싶은 사람이 하는

행위라면 틀린 답은 아닐것이다

서쪽의 벼랑 지역은 팔일오 직전 엄청난 굉음으로 붕괴되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놀라서 변고가 있을거라고 믿었으나 불상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산 마다 쇠말뚝을 박아 민족 정기를 끊어내려 했던 지독한 일본은 항복하고

우리는 광복을 맞이했다

지리산의 제왕인 천왕봉에는 성모라는 여신상이 있었다

천여년의 지리산의 수호신으로 지내온 여신상은 지금은 중산리 천왕사라는

조그만 암자에 머물고 있다

1380년 황산대첩에서 패한 일본인들이 지리산을 넘어 도망칠때 분풀이로

여신상을 두쪽 내면서 최초로 상처를 입었다

그래도 여신상은 천왕봉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다가 일제 강점기때에는 일본놈들이 임진왜란의 화가 풀리지 않자

사당을 철거하고 여신상을 아래로 굴러 버렸다

이후 산청에 사는 한처녀가 여신상을 다시 올렸지만 해방되던해

누군가에 보쌈 당했다가 얼마후 다시 올려 놓여졌

이후 육십년대는 잘 견디다가 1972년 봄 천왕봉에서 철야기도를 드린 교인들이

여신상을 훼손시켜 버렸다

이렇게 행방불명 되었던것을 1986년 1월 천왕사 혜법스님이 몸통과 머리부분을 발견해

봉합한후 이민족과 이교도인들로 또 다시 훼손당하지 않도록 천왕봉 남쪽 자락의

천왕사에 모셔 놓았다

바다로 금세 갈아 앉을듯이 잃어버린 이십년 하면서도 온갖 노벨상을 쓸어담으며

도륙질 하던 일본을 개인적으로 무지 싫어한다

미워하면서 닮아간다는 말도 있던데

유럽에서는 가는곳마다 재패니즈냐는 질문을 받았다

꿈에서라도 일본 여자 되는거 싫고 고고한 재래종 난초를 닮은 한국인이고 싶다

따지고 보면 민족 분단도 일본놈들 식민지배가 한몫 거들어 역사적 책임이 있다

위안부 문제만 봐도 그렇고 잘못을 인정하면 정 많은 우리는 용서를 할텐데

인정 안하는것을 보면 용서 받지 못할 종족인가보다

천왕봉은 행정구역상 산청군 시천면과 함양군 마천면이 경계를 이룬다

함양방면으로 칠선계곡을 빚어내 물줄기를 토해내고

산청쪽으로는 통신골 천왕골을 이루어 중산리 계곡으로 이어지고 있다

천왕봉에서 발원한 물줄기들은 세갈래로 헤어졌다가 진양호에서 다시 한데 모여

남강을 거쳐 낙동강으로 흐르면서 경남인의 젖줄이 된다

천왕봉은 지리산의 최고봉 천주라는 말에서 유래된것으로서 지리산의 웅대한

기상을 상징한다

동서남북 사방을 둘러 보니 멀리 남해 바다와 천지가 발 아래에 있고

장엄하기 이를데 없는 조망이다

위대한 處士 남명 조식은 작은 아버지인 조언경이 조광조 일파로 몰려 죽고

아버지는 파직하고 이내 세상은 뜨자 고향인 김해로 내려와 살다 회갑을 맞은다음

김해를 떠나 지리산 천왕봉 아래 덕산에 자리 잡고 살며 세상을 뜨기까지

학문을 제자들에게 전수했다

걸음을 옮길때마다 짤랑거리는 소리를 듣고 흐트러진 정신을 다잡기 위해

성성자라는 놋쇠방울과 칼을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고 한다

산길에서 배낭에 달린 벨소리로 인해 오히려 정신 사나운 나 하고는

근본이 다른 사람인가보다

'덕산에 묻혀 살다'에서

"봄날 어의엔들 방초가 없으리요마는

옥황상제가 사는곳 가까이 있는 천왕봉만을 사랑했네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무엇을 먹고 살것인가

흰 물줄기 십리로 뻗었으니 마시고도 남음이 있네"라고 짓고

'덕산계정 기둥에 새긴글'에서

"천석이나 되는 저 큰 종을 좀 보소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울리지 않는다오

허나 그것이 지리산만 하겠소

지리산은 하늘이 울어도 울리지 않는다오"라고 지었다

김일손의 '천왕봉 인상'에는

"지리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채색 장식화보다 수묵 담채화를 좋아하고

예쁜 분원사기보다 둥근 달항아리를더 좋아하고

바그너나 모짜르트 보다 바흐를 톨스토이 소설을 책상에 앉아 줄을 치며

읽을것이다"라고 했다

정치 학자인 동주 이용희는 남명 조식을 그리며

"정치가는 다 망해갈때도 최상이라고 말하지만

학자는 가장 좋은 시절에도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사회 문화 경제는 몰라보게 변했어도 예전이나 지금이나 정치는 제자리를 돌고도니

무슨 조화속인지 모르겠다

삼대에 걸친 덕을 쌓아야 볼수 있다는 천왕봉의 해돋이는 지리산의 최고 명소로 꼽는다

주말이나 연휴때에는 인증하기도 버겁게 인파가 몰려 많은 사람들의 손때가 묻은 

천왕봉 정상석이 평일이라서 한가로웠다

하늘이 내리는 정기를 천왕봉 봉우리를 통해 몸으로 흘러 천지가 발 아래로 함께 흐르는

천왕봉 봉우리를 누구는 밥 먹듯이 쉽게 오르겠지만 보통사람들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백두대간길은 천왕봉에서 마침표를 찍는다

여기서부터 날머리인 중산리 입구까지 5.4km 는 공포의 내리막이 기다리고 있다

사방 팔방 눈을 돌려 풍광을 가슴에 새기며 천왕봉을 뒤로 하고 돌아섰다

보호대를 무릎에 감고 암릉길을 가파르게 내려서 우리나라 사찰중에서

가장 높은 해발 1450m에 위치하고 있는 법계사로 내려왔다

법계사에서 순두류쪽으로 우회하면 쉽게 내려오는 길이 있다더만

법계사를 거쳐 중산리로 내려오는 길로 까마득하게 내려섰다

산이 산을 품고 있는 미궁의 지리산 어디서나 쉽다는말은 금물이지만

무릎에 무리가 오는 길고 지루한 내리막보다는 오히려 거꾸로 중산리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북진이 나을성 싶다

로타리 대피소를 지나 오르막은 잊은채 내리막을 정신없이 내려오다 보면

칼바위가 나온다

지리산 어딘가에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이성계가 장수를 보내 그의 목을 베어오라고 하였다

바위틈에서 한남자를 발견한 부하가 단칼에 남자를 내리치니 부러진 칼이

계곡밑으로 떨어져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바위다

두쪽난 바위가 칼 처럼 뾰족하게 생겼다

칼바위와 법계사 순두류 일대에도 중산리 빨치산 부대인 불꽃사단의 아지트였다

중산리 계곡입구에서 다시 버스 정류장까지는 아스팔트 길이다

대간길에서는 흙길이 꽃길이고 아스팔트길도 발바닥이 아파 나쁜길이고

바위길은 몹쓸 지랄길이다  

지리종주길에서 마지막 접속길은 거의 경보 수준으로 빨리 걸어

약속시간보다 한시간이나 빠른 오후 한시에 산에서 땅으로 내려왔다

가을 햇살이 쨍 하게 꼿힌다

삶은 자기만의 길을 가는것이고 행장은 가벼울수록 걷기 편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지리산의 가을

 

비 구름 몰아낸 지리산의 하늘이

점점 올라가네요

진짜 가을인가요

지리산 가을역에서 가을을 알립니다

산들바람에 넋을 잃고 걸었습니다

한 밤중 천지가 만들어 놓은

하늘 가까운 천왕봉에 서니 오싹합니다

하늘에 떠 있던 흰구름은 이부자리되어

산 줄기를 덮어 줍니다

구름이 바다가 되어 버리고

구름속에 미미한 점이 되어버린

세상속에 내가 태초의 아이 같습니다

햇살이 잘게 쪼개지는 깊은 계곡에도

무성했던 이파리가 점점 시들어갑니다

초록잎이 퇴색해가고 여위어만 가네요

가을저녁 나뭇잎이 두류계곡 물위로

한잎 두잎 떨어지고

나는 우수에 젖습니다

그리고 나는 시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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